이곳에 온 지 몇 달 만에 깨닫게 된 사실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아니 보여줘도 되는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을 드러낸 채로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 P15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 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 P37
나는 폴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그의 이름을 다급히 불렸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이제 두번 다시 나는 이런 감정으로 그를 바리볼 수 없을 것이다. 한 번도 그럴듯하게 명명된 적이 없는 초라한 내 사랑. 이제 와 고백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만큼은 건네고 싶었다. 삼 십대의 사랑은 그렇게 쉽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니까. - P65
그러나 그들이 내 뱉는 문장들은 어쩌면 그렇게 상투적이었을까.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 - P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