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페이지에 다 밑줄 긋고 싶은 작품이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 - P20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 P50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쯤에 돌아 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 P54
견딜 수 없었던 하루. 점점 비참해지는 날들, 울다 - P55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나의 불쾌함)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나는 모자라는 게 없다. 내 생활은 전 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 P75
그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그것도 대답을 얻으리 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 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P78
춥다. 밤이다. 겨울이다. 나는 집 안에서 따뜻하지만, 그러나 혼자다. 그리고 이런 밤에 나는 다시 깨닫는다: 이제 나는 이런 외로운 밤을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걸, 이런 고독 속에서 행동하고 일하기, 그러니까 저 ‘부재의 현전과 달라붙어서 늘 함께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 P79
오늘 적막한 일요일 아침, 울적하고 암담한 마음속에서: 지금 천천히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매우 엄중한 절망적인 테마가 있다: 도대체 앞으로의 내 삶은 그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 P92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 P101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 P111
1921년 가을 프루스트는 베로날 과용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셀레스트: "언젠가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계곡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죽은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고 믿나요 셀레스트? 정말 내가 마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난 지금이라도 당장 죽고 싶어요." - P167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 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 P216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 P235
망각이란 없다. 이제는 그 어떤 소리 없는 것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뿐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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