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펠 씨는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손을 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체에서도 뭔가 죽은 것이 느껴졌다.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이걸 읽겠다고 할 필요도 없었는데. - P10
그래,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내 주변을 정리하려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또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나를 돌아본다는 건 꼭 마지막에 가서만 가능한 걸까) - P19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기억나는 것이라곤 조용하고 당연해 보이는, 거의 기계적인 세월의 흐름이며, 내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극적이지 못할 것이다. - P19
그러나 학교는 아이의 삶에서 또 다른 새롭고 커다란 경험을 의미했다. 그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인생의 위계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 P33
"겁낼 것 없다, 아빠가 곁에 있잖니." 아버지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새삼 그가 얼마나 강하고 든든한 존재인지를 느꼈다. 아버지만 곁에 있으면 어떠한 일도 일어날 리 없었다. - P38
사랑이라는 말은 아직 알지 못했겠지만 그 느낌으로 가득했고, 아름답고 동시에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
사랑은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워 때때로 그 느낌을 단순한 우정으로 끌어 내려야 했다. - P39
아버지,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 쓰기위한 거죠? 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노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해보는 소리지. 돈이란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이 통장에는 삶의 내용이 들어 있고, 그건 평생의 결실이야. 여기에 내가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이지. - P48
내 속에는 노력하는 인간 외에 꿈꾸는 인간이 살고 있었다. - P51
사람의 어느 부위에서 나오는 것일까만, 쉬지 않고 우울과 슬픔 같은 것이 함께 사라져 갔고, 또다시 다음번을 위해 충분한 양으로 생겨났다. 고독도 그렇게 많이 흘러갔건만 결코 끝이 없었다. - P81
위대하고 힘든 것이 사랑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도가 지나치면 끔찍하고 부담스러워진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으로 죽을 수 있고, 고뇌를 통해 사랑의 원대함을 측정할 수 있다면.
(측정이 불가능한 사랑은 언제나 위험힌다) - P103
사랑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소유하는 것으로 족했고, 그것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자, 우리는 공동의 세계를 위해 물건들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우리의 소유가 더 많아지도록 앞으로 실천에 옮길 계획들을 짰다. - P109
우리 사이에는 틈 같은 게 생겼고, 아무것도 그걸 원상으로 돌려놓을 수가 없었소. 당신이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해도 그 틈은 사라지지 않았소. 당신은 누워 있어도 잠이 들지 않았고, 나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소. 아마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오. - P116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이다. - P117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대단하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 P118
놀랍게도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와 신혼 시절에 대해서도 거의 회상하지 않는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의 역에서 보낸 조용하고 변화 없는 시절이다. - P120
우리는 그처럼 서로 잘 지내 왔는데, 이제 이렇게 아득히 멀어져 있소. 사람들은 어찌 이처럼 서로 소외되는 것인가!
(그렇게 좋았던 감정은 왜 그렇게 변하는 걸까) - P125
여전히 두 개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어. 하나는 더 높은 세계이며, 그곳에는 신사들이 있지. 다른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저급한 세계야. 마침내 우리는 신사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으나, 그 순간 또다시 더 고상한 식탁에 앉는 더 높은 신사들이 우리 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지. 우리는 다시 작고 평범한 인간이자 뛰어날 수 없는 팔자가 되는 거야. 부질없는 공명심, 그것은 패배, 즉 돌이킬 수 없는 궁극적인 패배인 거야. - P133
더 이상 과대망상은 없었고, 단지 씁쓸하고 냉소적인 좌절감을 내비치려 했지. 가끔 분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사라졌고, 그 후론 시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시라는 것을 경멸하고 미워하기까지 했지. 성숙하고,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남자들에게 시란 뭔가 고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 P141
세상이란 보다 강하고 용감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나는 패배자였다. 그것이 평범한 인생의 완성인 셈이었어. 나의 패배를 바라보는 것말이야. 그 패배를 경험하기 위해선 조금은 위로 올라가야 했지. - P147
그러니까 우리에게 세 번째 인물이 있는 거군. 첫 번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내 속에 있는 다양한 자아들) - P159
철도가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 약간은 이국적인 정취와 먼 곳에 대한 동경, 매일같이 도착하고 출발하는 모험을 수용하는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철도에는 뭔가 내게 걸맞은 것이 있었고, 철도는 나의 끊임없는 몽상에 어울리는 테두리였다. - P178
전체적으로 보아, 이 세 개의 삶은 서로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평범한 자아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고, 억척스러운 자아는 그 일을 상품화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주었으며,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 - P202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운명들이 이 가능한, 태어나지 않은 형제들의 집합이 아닐까? 그건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총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인가! - P223
이들이 전부이고 모두 죽었는가? 아니, 아직 거지가 남아있다. 그자는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그는 죽지 않았고, 아마 불멸의 존재일 거다. 그는 늘 모든 것이 끝나는 곳에 있었다. 또한 모든 것이 끝날 때마다 나타나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 P236
그래, 하지만 운명들이 그렇게 많으면, 그처럼 많은 가능성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떻게 모두의 손을 잡고 이끌 수 있는가? 영원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방향을 바꿔 가야 하는가? - P237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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