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으로 살아가기가 가능한 두 여인 클레어와 아이린. 패싱으로 만인 앞에 당당한 클레어지만 가장 가까운 존재라할 수 있는 남편은 극단적 흑인 혐오주의자여서 위태로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흑인이지만 의사인 남편 덕에 뉴욕의 중산층 삶을 누리며 가끔 소극적인 패싱도 해 가며 화려한 도시생활을 누리고 싶은 아이린, 그에 반해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이 싫어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남미로 이주하고자하는 남편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는 아이린 부부. 화자가 아이린이고 줄곧 클레어를 묘사하고 있는데 클레어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가 아이린의 시선에 의한 것임에도 독자는 클레어의 자라온 환경이나 그녀의 팜므파탈적 요소등으로 인해 사기성 짙고 친구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아이린의 극도의 불안과 신경증적 발언으로 추측되는 결말은 충격적이다. 아이린은 평범하고 선량한듯 그려져 있지만 그런 행복하고 선량한 중산층을 연기하는 또 다른 패싱을 했다고 생각하면 결국 두 여인 다 패싱으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며 행복하길 바랬지만 동시에 위태로움의 측면을 가진 패싱의 뒷면이 드러나며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변인과 읽는 독자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악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심리묘사가 뛰어난 스릴러이며 그걸 즐길 수 있는 오락성을 가진 소설이라 생각한다. 그냥 오락으로 즐기고 끝나야할까. 악마같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그 악에 맞선 이들을 통한 인류애나 주변인 사회가 해야할 역할이나 교훈을 주는 일 따위는 없이 냉혹한 현실에 무력한 피해자만 난무하는 결론이 처절하다. 독서모임에서 선정했지만 딱히 함께 나눌 이야기가 없다. 현실세계에서 지유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우린 그런 사람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할까. 교화도 타협도 불가한 이런 끔찍한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학대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지유가 원하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 그런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이 소설이 나에겐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그녀의 글은 늘 뾰족하고 선득한 느낌이 있었다. 덤덤하고 건조하게 씌어진 글을 읽을 때면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내가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그랬고 이 에세이도 그렇다. 작가 특유의 느낌이 있어 역시!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언젠가 작가 사진으로 본 모습에서 왜소하다 생각했는데 실제 몸이 약한 분이다. 본인의 얘기 속에서 어린 시절 받은 상처와 약한 신체로 인해 겪은 불의와 예민한 감각들이 지금의 작가 황정은을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회적 약자로 여러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강한 연민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얼마전 읽었던 필립 로스의 울분의 나온 인물처럼 황정은 작가에게 울분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이들의 삶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삶을 사는 많은 무심한 이들에게 따끔하게 찔러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글을 써 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대표적 작품인 햄릿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 널리 알려진 것들도 생각해 보면 아동용으로 편집된 책이었거나 극이나 짧게 소개된 글로만 접했던 것 같다. 이렇게 원문을 읽은 것이 처음이라 생소하면서 진짜 고문을 읽는 듯한 느낌도 가지면서 운문스럽고도 소리내어 발음을 하면 착착 입에 붙는 것 같은 글이 매력적이었다. 사실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 배우들의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지고 여러 판본이 전해진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렇기에 더 많은 해석들이 나오고 그만큼 햄릿의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역자의 해설이나 각주를 보긴했으나 내 생각이 그에 다 동의되지는 않았다.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해석한 투비 올 낫투비도 썩 내키지 않는 번역 같았다. 이 말 뒤로 죽음에 대한 햄릿의 복잡한 심경이 아주 길게 자세하게 나열되기때문에 죽느냐 사느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책 읽기 이전에 익히 들어 온 우유부단의 대명사로서의 햄릿과는 내가 보기엔 많이 달랐다. 그는 오히려 주도면밀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부친 유령으로 부터 죽음의 진상을 알고 나서도 삼촌이 자신의 악행을 연기한 극 앞에서 반응을 보고서야 확신을 갖고 자신의 계획을 철저히 관리하고 실행하는 모습에서 영리하고 용기있는 인물로 보이기까지 했다. 상대인 삼촌인 왕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냉철하게 판단하고 허투루 자신의 악행이 드러나지 않게 하며 주변인들에게 인심을 얻는 좋은 군주의 행색을 하는 최고의 모사꾼이라 작가의 능력을 가늠케 한다. 안타까운 점은 오필리아나 왕비가 당시 시대의 여성상이 반영된 것이겠으나 애처로울 정도로 의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녀들의 말을 보면 멍청한 여자가 분명 아님에도 자신생각과 의지의 피력을 해 보지도 못하고 오빠와 아버지, 연인, 남편에 종속되어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그 남자들로인해 실성하는 모습에서 다시한번 여성의 비참한 삶의 역사성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또한 작품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함축적이고 의미심장한 글들이 많이 보였다. 꼼꼼히 작정하고 보다 보면 엄청난 명언 제조도 가능하리라.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읽은 적이 없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전으로 꼭 읽어보아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