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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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 라고 하려니 작년은 빼먹는 꼴이 되는군... 이건 서양식 달력이 문제라고 본다. 애꿎은 겨울은 매번 중간에 걸쳐진다. - 이번 겨울은 유독 눈이 잦았다. 눈이 오기 전 어느 날 시집을 사 두었다가 눈이 오는 날 읽었다. 첫눈은 아니었고, 폭신하고 하얗게 땅이 덮이던 날. 대개 첫눈보다는 한겨울에 내리는 눈이 예쁘다. 언제나 시작은 어설픈 법이니까.

⊙ 가끔 베스트셀러나 인기 신간 목록을 보면서 다소 삐딱하게 '제목빨이네' 중얼거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계절을 노린 단어선정, 공격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의문형, 리본 묶어 선물하기 딱 좋을 듯한 파스텔 블루 표지까지. 예뻤다는 말이다.

⊙ 뭐 배운 것도 없으면서 미술이고 음악이고 문학이고 건드리고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답답한 건 뭐가 왜 좋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고흐의 해바라기보다는 난이 좋아요. 쇼팽은 Kate Liu의 연주가 가장 훌륭했어요. 이규리 시인은 시를 참 잘 써요. 왜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아, 네...

⊙ 첫눈이었든 첫눈이 아니었든 그 눈은 오래 전 물이 되어 흘러서 사라져서 다시 비와 눈이 되었을 테니 첫눈을 맞던 나도 그렇게 완전히 녹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 여전히 근심도 고민도 남아있고 답 없는 질문을 하는 나도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궁금하고. 다음날 보도에 남은 찌꺼기는 질척하고, 도로변에 남은 얼음눈은 건드리면 바스락 부서진다.

⊙ 이 시집을 선물용으로 구매하지는 않을 거다. 선물용 시집이라 함은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적당히 새초롬하고 몽근해야 하는데, 「첫눈」은 좀 추워서. 겨울날 핫초코가 아니라 아이스 돌체 콜드 브루 - 맛있습니다. - 를 내미는 꼴이 될 거라서. 무엇보다, 이 책을 반길 사람이라면 이미 한 권 갖고 있겠지.


+

...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中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 떠올라서 좋았다.

Nature’s first green is gold,
자연의 첫 초록은 금빛
Her hardest hue to hold.
잡아두기 어려운 빛
Her early leaf’s a flower,
이른 잎새는 꽃처럼 피어나
But only so an hour.
순식간에 사라져요.
Then leaf subsides to leaf.
잎은 잎에 자리를 내어주니
So Eden sank to grief,
낙원은 슬픔에 침잠하고
So dawn goes down to day.
새벽은 내려와 아침이 되니
Nothing gold can stay.
금빛은 머무르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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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한글 만들기 1 : 원리를 아니까 재밌게 하니까 - 기본 글자 아하 한글 시리즈
최영환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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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귀엽고 내지 구성이 재밌어요. 자꾸 넘기다 보면 빨리 닳을 것 같긴 한데 그게 교재의 목적이니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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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리커버 한정판)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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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연애를 한 적이 없다. 사귈래요? 그래요. 했다가 헤어질래요? 그러죠. 하며 갈라졌던 만남을 연애라 부르기는 힘든데, 그게 전부였으므로. 한때는 그 사실이 짜증이 났다가, 그 다음에는 부끄러웠다가,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정말로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연애를 주제로 삼는 글은 좋아한다. 까탈스럽게도 이건 동정이고 이건 착각이고 이건 기만이군, 하며 소설 속 연애를 헤집어 분석한다. 연애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소설 속 연애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꼴은 우습다만, 그렇게 따지자면 대부분의 독자는 대부분의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으리.

<너무 한낮의 연애>에 등장하는 연애란 (연애와 무관한 글이 더 많지만) 진짜더라. 그래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1.
제목 선정이 탁월하다. 수록된 글 하나 하나가 한낮처럼 눈부시다.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대단하다는 비유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잠깐씩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분명하고 올곧다. 내 안의 초라함까지 다 까발려질까 무서운데 그게 또 싫지는 않다.

강한 빛에 희게 바랜 오래된 유적지를 거닐면 이럴까. 가식의 꺼풀이 모두 벗겨진 세상. 필용과 양희도, 조중균씨도 세실리아도 그리고 모두가 진심으로 각자의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다.


3.
나른하다. 햇볕을 온몸으로 쬔 듯하다. 여름같은 책이니 겨울에 딱이다. 생경하고 차가웠던 올해에 안녕을 고하며 읽었다.

오늘이 불안했듯 내일도 불안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햇빛 속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 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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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1-0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삐냥님, 또 새해가..... 이제 새해라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일만 있으시면 좋겠다는 건 확실하네요. ^-^

0, 1, 다음에 바로 3이네요. 숨어있는 2가 궁금하다...

빠삐냥 2021-01-01 14:51   좋아요 0 | URL
날카로우신 syo님! 2는 올리기 직전에 다시 읽으니 아무래도 tmi인가 싶어서 지웠답니다... 리뷰라는 게 책 이야기를 하는 자린데 자꾸 개인사가 튀어나와서요ㅎㅎ (저는 부끄럼이 많습니다!) 난 자리를 알아주시니 머쓱하면서도 기쁘네요.

올 한 해 syo님의 서재 덕분에 더 많은 책을 더 즐겁게 읽었어요. syo님도 좋은 일만 가득한 2021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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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삼중으로 추천을 받아 읽었다. 
김하나 작가의 추천사, 모 유투버, 그리고 알라딘 추천마법사.
신간 추천을 받기는 쉬운데 흘려보낸 좋은 책들은 알기 힘들다. 알아도 다는 못 읽지만.

1.
집이란 단어가 좋다.
ㅈ-ㅣ-ㅂ. 웃을 듯 입꼬리를 늘이다 금세 입술을 꾹 다문다. 집.
내가 나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세상을 바깥에 가둘 수 있는 공간이다.
(이사 경험이야 많지만) 다행히도 이제껏 집이 없어 본 적은 없기에 내게 집이란 개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가족이 함께 있으면 그게 집이지~ 라고 말할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자라났다는 말이다. 

2.
집을 주제로 하는 책이라는 걸 알자마자 코로나 때문인가 싶었다. 2020년 일어난 일 중 코로나 때문이 아닌 게 더 적겠지만. 실내생활의 비중이 높을수록 집이란 공간의 의미는 커진다. 단점도 장점도 미처 몰랐던 자질구레한 특징도 더 크게 다가온다. 읽으면서 쭉,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이 집밖에 없다면? 전염병이 도는 이 추운 겨울 몸 둘 곳이 딱 여기뿐이라면?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은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다.

3.
책의 흐름에 따라 작가는 계속 자라나고 이동한다. 성장소설의 템포다.
어린 시절 어디 살아? 묻는 친구에게 집을 자랑하고 싶었던 욕망을 지나,  집을 누구보다 열심히 가꾸면서도 엄마-작가의 외할머니-를 단 두 번 밖에 초대하지 못한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이내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집 다운) 집을 꾸미는 설렘과 기쁨이 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나는 이를 승리의 역사로 읽었다.

읽는 내내 내 집과 내가 살아온 집들이 겹쳐져 보였다. 내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 줄 나도 몰랐는데. 집이 뭐라고, 떠올리니 바로 떠오르는 풍경들이 있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이 사람은 이런 집들에서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나는 다른 집들에서 자라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4.
7장 <서재의 주인>은 따로 떼어 봐도 훌륭하다. 부제 '나의 자리, 엄마의 자리'도 좋다. 서재를 만든다는 것. 그곳의 주인이라는 것! 아, 읽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충만해진다. 

5.
황선재 작가는 친애하는 그의 집, 그의 개인사, 그의 공간에 대해 말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집, 나의 개인사, 나의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진솔한 만큼 나도 솔직해진다. 집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정말 소중하다고 서로 맞장구치며 한참 수다를 떤다.

연말에 내려갈 때 들고 가야겠다. 엄마랑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난을 나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 P58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 P135

가족 각자가 이룬 것은 엄마가 이룬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해내는 것은, 엄마가 씁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때뿐이었다. "나는 평생 이룬 게 하나도 없구나."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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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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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예쁘다고 추천받았다. 추천하는 사람의 유일한 추천 사유가 ‘표지 그림이 예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민음사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예쁘지만, 이번 녹색 표지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책등만 보기 아까워서 전시하듯 꺼내 두고 있다.


내용은 딱히 예쁘지 않다. 보다 정확히는, 아무 내용도 없다. 주인공 경진은 과외선생이고 약국 손님이고 딸인데, 사람들은 경진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제목처럼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주변인이 평소보다 다소 수다스러울 뿐이다. 


제목에서 어쩌면 연상할 수 있을 서사적 장치나 장르와는 달리,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SF도 아니다. (나폴리탄 괴담을 상상해버린 건 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로맨스도 추리극도 없다. 갈등도 없다. 주인공은 대나무숲이다. 어떤 수다에도 댓잎이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만큼만 반응한다.


극히 평범하고 평온한 일화라,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식으로 다시쓰기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재미가 없다.


<안락>도 <미니멀리즘>도 <애주가의 결심>도 잘 읽었었다. 취향인 작가라 생각했기 때문에 당황스럽다. 담담하고 깔끔한 글은, 한끗 차이로 심심한 글이 되어버리네.


이렇게 늘어놓고 말하기 머쓱하지만 무난하게 편안하게 잘 읽었다. 한가한 주말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주인공 경진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듣는 건 힘든 게 아니니까, (뭘 해줄 건 아니지만) 뭐든 말해 보라는 사람이 된다.


아, 설마 그게 목적인가.

"집에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물으면서 실은 알고 싶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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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11-3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모든 작가님 다른 작품 읽었는데 그때 말씀하신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이대로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재미가 없다‘ ㅋㅋㅋㅋ

얼마나 재미가 없었느냐면, 신기할 정도로 제목조차 기억 안날만큼....

빠삐냥 2020-12-01 12:26   좋아요 0 | URL
기억에서 휘발될 정도로 재미없음 vs 기억에 못박힐 정도로 재미없음... 어느 쪽이 더 심한 평가일까요?ㅋㅋㅋ 재미없는 소설은 맛없는 음식이랑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게 먹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