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드라마는 의사들이 연애하고...기업 드라마는 재벌과 여직원이 연애하고...경찰 드라마도 연애 이야기...".우리나라 드라마가 전문직종을 다루는 방식을 두고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요즘은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도 이런 경향이 남아 있지요.그래서 <하얀 거탑>이 독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병원에서 의사들이 연애하는 이야기를 뛰어넘어 훨씬 박진감 있는 병원 내의 파벌 싸움, 의료인의 윤리 문제를 깊이 파헤쳤으니까요. 원작자인 야마사키 도요코 여사의 실력이 대단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얀 거탑>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장년 및 노년 세대에게 야마사키 씨는 <불모지대>로 이미 70년대부터 친숙한 작가입니다.일본의 종합상사가 어떻게 경제를 일으켰는지 보여주는 이 대하소설은 특히 이병철 씨가 생전에 삼성 사원들에게 읽으라고 독려해서 유명해졌지요.<불모지대>의 모델이 그 유명한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 씨인데, 이 세지마 씨와 이병철 씨가 친구이기도 했습니다.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지요.

 

   야마사키 씨의 대하소설 3부작 하면 이외에 금융계를 그린 <화려한 일족>이 있습니다.이 모든 소설들은 자신이 소재로 삼은 전문직종을 철저히 조사한 바탕 위에 집필을 하기 때문에 자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마치 발자크 소설이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를, 에밀 졸라의 소설이 제3공화정을 충실히 재현한 것처럼 야마사키 씨의 소설은 20세기 일본의 세밀화라고 할 만합니다.게다가 대중 소설적인 재미까지 갖추었으니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흔히 여성작가들의 소설은 섬세하지만 스케일이 작다고 하는데 야마사키 씨는 그런 통념이 통하지 않습니다.모두 선 굵은 소재를 솜씨있고 웅장하게 버무립니다.그래서 <불모지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70년대 후반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 중에서는 남성작가가 쓴 것 아니냐 하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야마사키 씨는 여든을 넘겨서도 미일 안보조약과 오키나와 문제를 소재로 한 <운명의 인간>이란 소설을 완성해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과연 이 여인의 작가적 역량은 어디까지일까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마지막 소설이었군요.혹시 아직 국내 미번역된 소설을 그 뒤에 또 집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비단 작가가 아닌 사람도 야마사키 씨가 소설을 집필하기 전 엄청난 공부를 하며 사전조사하는 철저한 직업정신은 본받을 만합니다.어떤 직업이든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니까요.뒤늦게 그녀의 별세 소식을 듣고 <불모지대>에 푹 빠졌던 경험을 다시 회고해 봅니다.

 

 ***야마사키 도요코 씨는 9월 30일 별세. 향년 8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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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10-2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년 88세셨군요. 아버지 책장에 꽂힌 불모지대부터 참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들 뿐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3-10-20 14:10   좋아요 0 | URL
예.지금 40대의 부모세대들부터 많이 읽혔지요.

뷰리풀말미잘 2013-10-28 10:52   좋아요 0 | URL
깜놀.. 노자님이 향년 88세라는 줄 알고..

노이에자이트 2013-10-28 16:34   좋아요 0 | URL
윽...88세!

페크pek0501 2013-10-20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저는 같은 여자로서 여성 작가에게 관심이 가서 찾아 읽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을 구입할 생각이에요.
여성만이 지닌 역량을 감상하는 건 흥미롭고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님이 말씀하신 분의 작품도 관심이 가는군요.
좋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

(잘 지내시죠? )

노이에자이트 2013-10-20 14:13   좋아요 0 | URL
앨리스 먼로는 이번의 수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작가죠.

저야 잘 지냅니다.힘도 더 세지고요.

transient-guest 2013-10-22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 거탑의 원작자였군요. 이분의 작품들이 궁금해집니다. 특히 하얀 거탑 보다도 불모지대는 정말 궁금하네요. 대형조직에서의 경험이 전무해서 그런지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10-23 18:02   좋아요 0 | URL
불모지대 초반부에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 묘사가 자세합니다.여자는 군대나 전쟁 묘사에 약하다는 중론을 깨버리는 작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