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영문해석 학습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모옴의 글. 그만큼 그의 영어는 표준형이고 명료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지금의 60대 정도 되는 이들 중 고급영어를 맛보기 위해 모옴의 회고록 격인 <서밍업>을 여러번 원어로 반복해 읽었다는 전설 같은 경험담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사실은 이 책이 꽤 어렵습니다.초보자용 교재도 읽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이 덤벼들 책은 아니죠.아무래도 작가의 회고록인지라 그가 알고 있는 동시대의 여러 작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문예사조도 언급되는 등 고급스런 교양정보가 가득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영어도 영어거니와 이런 내용 자체가 어렵지요.
<서밍업>에는 조금 수용하기 힘든 견해도 있습니다.예를 들어 모옴은 토마스 하디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시대를 초월해서 이름을 남길 만한 작가는 아니라는 것이지요.하지만 영문학사에서 하디는 <테스>라는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입니다.빅토리아 왕조 시대 때의 작가 중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기 때문에 모옴의 이런 평가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우리나라는 영국 작가들이 그다지 인기가 없는 편인데도 <테스>는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오죽하면 채정안(지금은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가수였음)의 댄스곡 중에 '테스'라는 노래까지 있겠습니까.
모옴은 <서밍업>에서도 그렇고 <세계 10대 소설과 작가>에서도 작가가 소설 속에서 누군가를 안 좋게 묘사하면 그것이 특정인 누구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투로 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하지만 인간은 비록 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통해 자기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당장 일주일 분량의 신문 중 칼럼들만 골라 읽어보십시오.실생활에서 만난 누군가를 비난하는 내용이 반드시 몇 편 들어있습니다.요즘은 1인 매체 시대라서 블로그에서 그런 식의 복수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모옴의 소설 중 우리나라 독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역시 <달과 6펜스>입니다.<인간의 굴레>에 비해 분량도 짧은 데다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게다가 배은망덕한 짓까지 저지르는 사디스트 같은 주인공 이야기가 대단히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주인공인 저 멀리 타히티로 간 사나이 이야기를 읽으면 이는 화가 폴 고갱을 소재로 했구나 하고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면도날>(한동안 안 나오다가 최근에 새 번역본이 나왔음)엔 어설프게 유럽의 교양을 흉내내는 미국인이 나오는데 이 미국인은 영국에 귀화한 미국작가 헨리 제임스를 모델로 했습니다.헨리 제임스 자신이 미국문화와 유럽문화의 충돌을 즐겨 다룬 작가이기도 합니다.영국은 물론 프랑스 문화에도 조예가 깊은 모옴으로서는 저 대서양 너머 벼락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온 작가가 유서깊은 유럽의 교양을 흉내내려다 어설프게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겠지요.
자...다시 하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모옴은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는 작가이지만 한때 그의 전집이 나온 시절에 비하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번역작품이 꽤 많이 줄었습니다.하디를 모델로 한 <과자와 맥주>의 번역본도 이젠 구할 수 없지요.이 소설은 모옴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이제 인터넷에 쳐봐도 그냥 먹는 과자와 마시는 맥주 이야기만 뜨고 <과자와 맥주>의 서평은 올라오지 않습니다.나는 대단히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중인물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하고 짐작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우리나라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짐작을 해보는 것은 짭잘한 재미를 줍니다.모옴의 <서밍업>이나 <세계 10대 소설과 작가>를 읽으면 이러한 독서태도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나 있어 독자의 흥미를 끕니다."혹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읽은 <과자와 맥주>는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것으로 세로줄에다 글씨가 작습니다.번역자는 장왕록 씨(그의 딸은 최근 작고한 장영희 씨). <달과 6펜스>, 조셉 콘라드<암흑의 오지>(번역본에 따라서는 <어둠의 핵심>등, 여러 제목으로 나왔음)와 함께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