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나온 이병주 전집목록을 보니 아직 완간되려면 한참 멀었군요.내가 갖고 있는 몇 몇 장편도 아직 갖추지 못했으니까요.이병주가 박정희를 비판한 작품으로는 <그해 5월>이 있는데 한길사에 없는 것으로 <그를 버린 여인>전 3권이 있습니다.박정희가 무도한 독재를 일삼자 그를 버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어느 여인이 나옵니다.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 여인을 등장시켰지요.<그해 5월>에서 작가의 분신인 이사마를 등장시켰듯이.
이병주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인 정치평론이자 현대사 논평이기도 한 <대통령들의 초상>.특히 여기서는 전두환을 비상식적이라고 할 정도로 옹호하여 독자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그런데 이런 해괴한 소신을 가지게 될 뿌리라고 여겨지는 작품이 있으니 <지오콘다의 미소>(1985)라는 장편입니다.당시의 학생운동에 대한 이병주의 부정적 시선을 알 수 있는 작품인데 이병주의 광팬들만이 소장하고 있다는 전설 속의 소설이죠.헌책방을 들를 때마다 눈이 발개져라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대통령들의 초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이병주는 해박한 지식과 멋진 이야기솜씨를 지닌 작가입니다.그런 남자가 전두환과 5공체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몽매한 수준의 글 밖에 쓸 수 없다는 데에 인생사의 또다른 불가사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머리가 좋아도 자기와 친한 사람(전두환)과 너무 얽혀 있으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인지...흔히 말하는 거리조절에 실패한 경우죠.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를 보면 이병주의 광범위한 독서와 감칠맛 나는 문체에 감탄하게 됩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눈치빠른 독자라면 언뜻언뜻 대단히 고루한 감상이 그에게서 툭툭 튀어나옴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악령>에 나오는 스타브로킨을 논평하는 대목에서 그렇습니다.<지오콘다의 미소>에서 학생운동을 못마땅하게 그린 사고방식 역시 그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직접 읽어보기 전에 이런 추측을 해보는데 과연 맞을 것인가 시험해 보고 싶네요.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찾아야지요.
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했던 작가나 학자가 저지른 뜻밖의 과오를 안 뒤에는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그가 쓴 책을 안 읽겠다고도 합니다.하지만 내 성격은 독서에 관한 한 거대한 얼음덩어리 같은가 봅니다.그런 일을 알아도 아주 냉정하며 꿈쩍도 않습니다.그건 그런 일이고 나는 이 작가가 마련해 준 영양분에서 뽑아먹을 것은 다 뽑아먹겠다는 정신으로 왕성하게 우적우적 씹어먹습니다.몇 년 전 읽었던 이병주의 <황혼><비창><여로의 끝>도 다시 읽어볼까 합니다.이 책들도 한길사 목록에는 없군요.
오늘 오후 바람이 불면서 목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길바닥에 떨어진 목련을 밟으며 예쁜 하의실종 옷차림의 소녀가 걸어갑니다.저런 옷차림을 꽤 잘 소화했구나 하고 바라보는데 이병주가 여성편력이 화려했다는 것이 생각납니다.박정희 시대에 볼보를 타고 고급요정에 드나들었다고도 하지요.볼보를 탄 이병주가 혹시 저런 어린 여자 곁을 지나가면서 빵 빵! 경적을 울리며 "어이! 아가씨.타!" 하기도 했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이병주는 저승에서도 글쓰는 틈틈이 여자들을 유혹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