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미술관 관장 최완수 씨는 매체에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합니다. 한국의 역사나 유적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풀어놓는 그의 솜씨엔 누구나 실력을 인정해 주고 있지요.그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를 보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그는 정선, 김정희를 연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들은 모두 노론과 관련이 있습니다.정선은 노론의 후원을 많이 받았고, 김정희 역시 노론 집안 출신입니다. 또 그의 글을 보면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노론은 수구 세력이고 노론에 저항한 당파는 진보세력이라는 도식을 수용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진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이 크다 보니, 모두가 다 혁명이니 진보니 하는 수식어를 좋아합니다.대체로 깊이 있는 지식에 기반하지 않고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신봉하는 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노론=나쁜 놈 이라고 해버립니다.그런데 최완수가 노론계 인물들을 높이 평가한다 하니 최완수도 수구반동인가보다 하고 아주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리지요.물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의 역사적 공과를 따지는 거야 얼마든지 백가쟁명식으로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의 경솔한 판단은 곤란하지 않을까요.
이덕일 씨의 '노론=나쁜 놈' 이라는 도식은 '정조 및 남인=좋은 사람' 이라는 도식으로 연결됩니다.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조선의 마지막 희망은 사라졌다는 결론이지요.이덕일 씨야 조선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춘 전문가( 물론 이덕일 씨의 사료해석이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평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기에 그 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지만 , 일반대중들에겐 정조 이후인 순조 철종 시대는 지식의 공백지대입니다.그만큼 그 시대에 무관심하다는 것이지요.그러다가 대원군과 고종시대로 바로 넘어갑니다.
고종을 띄우는 데 동분서주하는 학자로는 이태진 씨가 있습나다.이덕일 씨가 제도권 학자가 아닌 데 비해 이태진 씨는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9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씨가 고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종을 폄하하는 시각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유산'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단순명쾌함이 이덕일을 연상시킵니다.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노론에 대한 시각이지요.이태진 씨는 강연에서 꼭 강조하는 것이 "<매천야록>에 속지 말자"입니다.매천야록은 구한말 지식인인 황현의 책으로 구한말 역사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특히 민비와 고종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고종 띄우기에 열심인 이 씨로서는 명망있는 애국자(황현은 경술국치를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음)인 황현이 고종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걸렸던 모양입니다.그래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론계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황현은 소론계이니 고종시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소박한 민족주체성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겐 정조와 고종 모두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비운의 군주입니다.한때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부정적 평가를 받은 고종도 이태진 씨 같은 학자들의 노력 덕분인지 요즘은 계몽군주로 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하지만 정조와 남인을 정의의 사도로 여긴 이들은 이태진 씨가 매천야록을 평하는 데에 이르러선 꽤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대부분이 정조 이후 시대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가 고종의 지지세력들이 노론계가 많았다는 데 대해서 뭔가 개운치가 않은 것입니다.노론은 정조를 독살했다는데...하면서 말이지요.
깊이 있는 독서를 하지 않으면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물론 이덕일 씨나 이태진 씨나 입장은 다르지만 정조와 고종을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정조와 고종을 폄하하면 식민사관이라는 식의 단순한 결론을 수용한 이들은 한번만이라도 정조와 고종을 지지하던 세력이 전혀 달랐음을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여러가지 장점이 있는 저술을 많이 한 이덕일, 이태진 양 씨도 '내 학설에 반대하면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이다'는 식의 주장은 이제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누구의 학설이든 그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내 학설을 비판하면 친일이다,식민사관주의자다 운운 해버리면 제대로 된 학술논쟁이 될 수 없지요.인신공격만 난무하게 됩니다.
이덕일 씨는 정조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태진 씨는 고종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학자들입니다.그러니 한번 쯤은 독서대중들이 이들의 주장에 다소간 프로파간다가 섞여 있지 않나 의심도 해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노론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진 두 사람이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이들을 친일이니 식민주의자니 하고 내치는 것은 묘하게도 비슷하니 이 또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이 글을 읽고 이 두 사람의 책을 좀더 차분히 읽어봐야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또한 이 글을 쓴 보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