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이타마 현에는 격투기 전용 경기장이 있습니다.우리나라 같은 나라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요즘 일본의 격투기 단체들이 어렵다고 하지만 일본의 격투기 경기엔 아직도 손님이 꽉꽉 찹니다.프로복싱의 인기도 여전하구요.프로복싱이건,다른 격투기건 침체에 빠져 경기장에 빈자리만 많은 우리나라와는 확실히 문화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그 사이타마 경기장에 2009년 마지막 대형 격투기 경기가 마련되었습니다.
20개 가까운 경기가 마련된 이번 시합에 유독 제 눈을 사로잡은 경기는 그날 출전선수중 가장 나이 많은 게리 굿리지라는 선수가 나오는 경기였습니다.이 선수는 공식기록으로는 1966년생입니다만 1964년생이라는 설도 있고,여하튼 노장선수임엔 틀림없습니다.헤비급의 강타자로 190센티미터에 110킬로의 거한입니다.전성기 때는 강펀치에 물불 안가리는 공격성으로 인기가 있었지요.2005년이 그의 전성기였습니다.격투기의 강자들과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이기든 지든 화끈했습니다.얻어맞아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패해도 장렬히 산화하는구나 하는 느낌!
그의 이런 모습때문에 격투기 단체에선 그를 링에 올리려고 하지요.하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나이도 있고 해서인지 계속 패하는 경기가 많고 2007년부턴 이긴 경기가 있는지도 가물가물하군요.물론 맞고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감함은 여전하지만 격투기 선수가 마흔이 넘어서 자기보다 훨씬 젊은 선수에게 맞고 기절하는 광경은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감정이 들 수 밖에요.
게다가 그는 몇년 전 이혼했고 어린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계속 글러브를 껴야 했습니다.늘 패하기만 하니 최근에는 그를 불러주는 횟수도 좀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이번에도 좀 오랜만에 링에 나타났지요.게다가 상대방은 12연승에 11케이오 승을 거두고 있는 강타자 게가드 무사시(네덜란드)! 체격에서는 굿리지가 더 큽니다만 계속 10전 가까이 지기만 하는 선수와 연전연승의 선수를 맞붙여 놓았으니 누가 이길지는 다 예상할 수 있었을 겁니다.특히 이번엔 게가드 무사시의 상대가 갑자기 시합에 못나오게 되었다고 통보했기 때문에 주최측에선 급하게 굿리지에게 연락했나 봅니다.
이런 불리한 시합...게가드 무사시는 이쪽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해 주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하지만 굿리지는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경황이 없었을 겁니다.그는 격투기 외에는 배운 게 없고, 이혼 후 자식 부양을 위해 무조건 시합을 해야 했으니까요.그래서 2009년 마지막날 그는 링에 올랐습니다.겉모습으로 본 그의 몸상태는 40대 중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했고 연습을 평소에도 꾸준히 해왔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시합은 처음부터 일방적이었습니다.굿리지는 워낙 물러서는 것을 모르는 선수라 용감하다는 느낌은 주었지만,무사시의 그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펀치는 얄밉게도 잘 적중했습니다.사람 심리라는 게 묘해서 그래도 굿리지가 버텨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일방적인 시합이라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켜 버리고 맙니다.그때 굿리지는 눈을 부릅뜨며 '나는 더 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항의하듯이 심판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하지만 그 상태에서 더 시합을 끌어봤자 경기 결과는 뻔하고 선수보호 차원에서도 그 경기는 거기서 중단되는 게 여러모로 좋았습니다.
양 선수의 나이차는 거의 20살 가까왔습니다.누구도 굿리지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굿리지도 자기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이런 무리한 시합을 한 것이지요.그는 최근 너무 많이 두들겨 맞는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저래 가지고 더 늙으면 몸이 망가지지나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왕년의 강타자...예전에 어떤 전성기 지난 배우가 그랬습니다.세상에서 제일 슬픈 단어는 왕년의 무엇무엇하는 것이라고...굿리지는 집에 계속 날아드는 공과금 고지서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이번 시합을 수락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무수한 주먹을 맞고 패배를 선언당하면서도 계속 싸울 수 있다고 심판에게 항의하는 그 모습은 선수로서의 자존심이었을까요.이제 그가 왕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제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저는 그를 좋아하는 팬으로써 그가 이제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좋아하는 선수가 자기 조카나 아들뻘 되는 선수에게 맞으면서 링바닥에 눕는 광경을 보는 것은 서글픕니다.
이 경기 외에 그날 수많은 경기가 있었습니다.더 흥미진진한 경기도 있었구요.하지만 싱겁다면 싱겁게 끝나버린 그 경기...시합중단을 선언하는 심판에게, 나는 더 싸울 수 있는데 왜 중단시키는냐는 듯 눈을 부릅뜬 굿리지의 그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