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폴라니에 대해서 한마디 안하면 뭔가 유식한 사람 취급을 못받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워낙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니까요.그래서 대충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왔다고 봐야겠지요.대부분 그의 시장론에 대해 초점을 두더군요.또 우연인지 <대전환>이 나온 해(1944년)에 폴라니와는 전혀 상반된 시각을 지닌 하이에크가 <노예로 가는 길>을 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비교하기도 하구요.저는 하이에크 것을 먼저 접했습니다.헌책방에서 구한 삼성미술문고 번역본인데 70년대 것이라 국한문 혼용의 세로줄이지요.하지만 폴라니에 대해서는 거의 동시에 소개글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국내에서 폴라니를 소개한 학자들은 경제학자가 아니고 경제인류학자였지요.<대전환>을 처음 번역한 박현수도 경제인류학 전공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시장 경제 비판론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그는 시장의 횡포를 방지할 수 있는 이론과 체제를 구하려고 노력했지요.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가 그랬습니다.특히 그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온갖 고대문명을 탐구했지요.그리스 로마 문명은 물론 아랍이나 소아시아까지 샅샅이 연구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성서고고학에 나오는 민족까지 정통하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이 모든 문명이 노예제에 기반해 있었습니다.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교역하는 체제는 없을까 초조해졌겠지요.
그는 사하라 이남의 흑인 문명까지 연구영역을 확장했습니다,고대흑인 왕국 중에는 찬란한 문화를 누린 곳도 있었지요.하지만 그들 역시 전쟁을 통해 약탈한 노예들을 부려 쌓은 문명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게다가 근세 이후 유럽이 침략해 오면서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지요.여기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못된 백인 노예상인과 불쌍한 흑인노예라는 고정관념이 상당부분 불완전한 지식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당시 노예상인 중에는 흑인들도 있었고 또 흑인부족끼리의 전쟁에 무기를 얻기 위해 백인과 야합하여 타 부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랍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는 사실을 꽤 오래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수단 남쪽의 흑인인 누비아 인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많이 종사했지요.아랍의 노예사냥꾼들은 그 훨씬 아래인 동남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흑인들을 잡아갔습니다.그래서 흑인이 흑인을 잡아 백인에게 팔아치운 이야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원래 처음 알게 될 때 놀라지 두 번 세 번이면 그러려니 하게 되지요.
저는 원래 호기심이 왕성합니다.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 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문화나 지형,생태 특히 종족이나 민족 분쟁,국경 분쟁 등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내전에 외세가 끼어든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은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비단 아프리카 노예사냥 뿐 아니라 북미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합집산에서 인디언 내전이 얽히고 설켜 얼마나 복잡했는가도 대충은 알고 있지요.여기도 아프리카 처럼 인디언 부족들이 싸울 때 상대측을 무찌르기 위해서 백인들을 끌어들인 사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상 사회를 그리면서 그 모범사례를 찾으려고 했던 폴라니에게는 이 모든 사실에 절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근대 유럽이 발명한 시장경제를 치유할 수 있는 모델을 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사례를 엄청나게 수집하여 연구했는데 결국 그런 모델은 없었단 말인가....하는 탄식도 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의 집안 사람 그 누구도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폴라니의 친구인 피터 드러커는 "폴라니 가문은 지적으로 빼어나고 또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결국은 시대에 좌절해 버린 것이 아닌가 ..." 하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지요.저 역시 노예사냥이나 인디언의 내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이 분야는 자세히 알면 알수록 굉장히 불편해진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사람이란 '착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강자의 횡포를 휘두르는 못된 놈'이라는 구도가 맘에 편하지요.하지만 노예사냥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우리가 저 못사는 나라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풍속을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이라고 떠받드는 태도도 어찌 보면 우리가 맘대로 상상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온갖 구질구질한 사실들이 득실거립니다.그런 사실도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또 어두운 면을 알면서도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만 그게 어렵습니다.그래도 폴라니는 어려움에 처한 헝가리 피난민을 위해서 자신의 수입의 상당부분을 내놓기도 했습니다.그냥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사나이가 아니었지요.같은 헝가리 출신인 조지 소로스가 비록 투기자본으로 번 돈일 망정 기부대열에 참여하는 것도 폴라니의 저작은 물론 그의 삶을 긍정적으로 공감하면서 바라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물론 폴라니는 결국 시장경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지는 못한 것으로 봐도 되겠지요.최근 한국에서 부는 폴라니 열풍을 저승에서 바라보는 폴라니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