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지요.고미카와 준페이는 전후 일본인들이 전쟁의 지긋지긋함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시절,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를 거의 폭격하다시피한 강렬한 반 군국주의 소설인 <인간의 조건>과 <전쟁과 인간>으로 초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사나이입니다.인간의 조건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1956)이 영화 또한 원작소설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그랬는지 엄청난 길이입니다.일본영화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반드시 봐야하는 영화라고 하네요.
<인간의 조건>하면 우선은 앙드레 말로의 소설을 먼저 연상합니다만 한국에서는 그 유명세와는 달리 실제 읽은 이는 거의 없는 것 같고, 이 소설을 읽은 이들도 이 소설의 배경이 4,12 쿠데타인지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그냥 지적인 허영에서 음....나도 앙드레 말로 소설을 읽었단 말이야....하는 과시용으로 이용되는 소설이라고나 할까요.저 역시 그런 대열에 끼어들어 읽는 흉내를 냈습니다만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는 역사소설(문예사조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건 실존주의 소설이야...하고 점잖을 빼겠지만)에 무슨 맛을 느끼겠습니까.그 뒤 중국의 국공내전을 꽤 읽고 나서 다시 읽으니 그때서야 혁명을 둘러싼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논쟁도 눈에 들어오고 그 악명높은 중국의 홍방,청방들이 저지르는 대학살도 알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앙드레 말로는 가슴에 와닿지가 않습니다.차라리 그 시절 상해를 알고 싶은 분에겐 조나선 스펜서<현대중국을 찾아서>를 더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고미카와의 <인간의 조건>이 훨씬 재미있었습니다.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 만주에서 소련군과 직접 전투를 경험했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운좋은 사나이 중 한명이었습다.그가 그 후 첫 문명을 알린 <인간의 조건> 역시 태평양 전쟁 말기의 만주가 배경입니다.고미카와는 읽는 재미를 주는 소설가입니다.<인간의 조건>은 우선 재미가 있습니다.그의 소설 중 가장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어떤 이는 추위 속에 죽어가는 그의 몸위로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만 제가 가장 기억하는 장면은 전쟁을 반대하는 문장 중 압권인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번역문에 제가 비속어로 살짝 양념 좀 넣었습니다.
"도대체 전쟁이란 게 얼마나 웃기고 되어 먹지 않은 짓거리냐 말야.맨날 나를 괴롭히면서 내무반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 저 후레자식 고참 놈이 단지 같은 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전우가 되고,나와는 아무 감정도 없는 사내,누군가의 착한 아들이요,다정한 남편일 수도 있는 자를 단지 적국의 병사라는 이유만으로 쏘아죽여야 하니...그래서 많이 죽일수록 훈장을 받고...이거 무슨 되어먹지 않은 미친 놀음이냐 말이야..."
반전평화 운동가들의 책도 몇 권 읽었고 좀 어려운 사상가들의 주장도 읽어봤습니다만 이렇게 쉽고도 직설적으로 전쟁의 부조리를 맹타한 구절은 처음이었습니다.이젠 세월이 지나 고미카와도 저 세상사람이 되었고.일본소설이 인기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그의 소설은 잘 읽히지 않습니다.<인간의 조건>도 꽤 번역본이 두툼합니다만 그보다 더 두툼한 <전쟁과 인간>(장작림 폭살사건에서 과달카날 전투까지 다룬 대하역사소설)은 이제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저도 <전쟁과 인간>은 해적판만 있습니다.곽학송(이제는 잊혀진 작가대열에 합류했네요)씨 번역이라는 점만 원판과 동일할 뿐, 그 방대한 각주는 번호만 달려 있고 정작 역자해설은 다 빼먹은 해적판.하지만 재작년에는 헌책방에서 <인간의 조건 속편>을 발견하여 오...이런 것도 있었군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앙드레 말로의 유명세에 혹하여 <인간조건>을 무미건조하게 읽었다면 고미카와의 <인간의 조건>을 추천합니다.그렇다고 제가 앙드레 말로의 명성을 깎아 내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니 현대 프랑스 문학 애호가들의 오해는 없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