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찾고 싶은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전혀 생각도 않은 책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접신의 경지에 이르면 책방문을 드르륵 여는 순간 갑자기 책의 기운이 좌르르 느껴지면서 나를 부르는 느낌이 전신에 퍼진다는데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다.헌책방에서 주로 책을 구하다 보니 60년대 70년대 책도 꽤 산 편인데 디자인도 촌스럽고 국한문 혼용에다 종이도 누리끼리해서 깔끔하단 느낌은 안 들지만 요런 책들이 주는 그 특유의 정감도 있다.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이들,또는 지금은 원로인 이들의 혈기방장한 시절의 글을 읽으며,태어날 때부터 어른이나 부모인 사람은 없다는 평범한,그러나 잊기 쉬운 진리를 깨달을 때가 있다.
이런 책에 익숙하다 보니 내 나이 또래가 모르는 인물은 물론이며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도 가물가물한 인물들에 대해서까지 좍~꿰고 있을 때가 있다.지난 주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말봉(1901~1961)<찔레꽃>대일출판사1981과 같은 책은 내 또래는 거의 모르는 작가요,작품이다.일제시대 때 대중소설로 지금도 남은 것은 박계주<순애보>정도? 이 소설은 세로줄로 나오다가 가로줄로 바뀐 삼중당 문고에서 지금도 나오던데,그 외에 70년대엔 꽤 나오던 방인근,김래성 등의 작품은 이젠 가끔 운좋게 헌책방에서나 볼 수 있다.이 곳 광주 광역시엔 4~5년 전까지 드문드문 나오던 김래성 추리전집10권은 요즘은 통 구할 수가 없다.그때 사놓을 걸...후회는 하지만 언제 살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고.그런데 전혀 생각도 않은 찔레꽃이 나오다니 반갑기 한량없다.오...이제 나도 이걸 읽어볼 수 있겠구나...1981년이면 가로줄이 꽤 나오던 시절인데 세로줄에다가 제목 찔레꽃은 북한 카드섹션에서 나오는 글씨체요,종이도 누르스름하다.나는 그래서 더 좋지만...
내게 있는 정한출판사 한국단편문학전집(한때 꽤 팔린 전집이다.가끔 유명작가들의 서재가 나오는 사진을 보면 갖춰놓은 이들이 꽤 있다)엔 강경애와 김말봉 작품이 있는데 김말봉은 신문 연재에 장기를 보인 여성이다.여러 작품을 썼지만 대중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역시 찔레꽃.이 소설은 1937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어찌나 인기가 좋던지 이 소설을 읽으려고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구독을 바꾸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소설 하나 인기 좋으면 신문 구독에까지 영향을 주던 일은 70년대까지도 있었지만 일제시대 땐 그 열풍은 가히 광풍이랄 수 있었다.물론 이 소설은 전형적인 대중 연애 소설이었다.일제시대에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일어나는 일이 있었고 당대의 인기작가 김말봉이 독자들의 가슴을 애태우는 장면에서 딱 끊어놓고 내일은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궁금증을 자아내게 해놓으니 다음 호를 안 읽고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라이벌 관계는 단순히 신문간의 경쟁만은 아니었다.한국 신문사에서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는 독립운동의 노선 투쟁이 얽힌 시대였다.좌우합작 운동인 신간회를 지지한 신문은 조선일보였다.동아일보는 쉽게 말하면 식민지 내의 자치운동에 기울어져 있어서 사설에서 대놓고 신간회운동을 비난하기도 했다.지금의 조선일보를 생각하면 당시의 조선일보가 보여준 유연한 이념관이 이색적인데 심지어 카프 진영의 문인들은 동아일보엔 글을 싣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일종의 안티 동아 운동의 일제판이라고나 할까... 신문부수 느는 재미에 표정관리하느라 바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드디어 한 판 했다.당시 노산 이은상은 조선일보에, 수주 변영로가 동아일보에 있었는데 찔레꽃 이야기를 하다가 이은상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자 신문부수가 줄어 신경이 날카로와진 변영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둘은 언성을 높이면서 대판 싸웠다고 한다(원래 김말봉의 첫 출세 장편은 동아일보 연재소설이었다).
김말봉의 사생활은 순탄치 못했다.두번의 결혼에다가 친아들은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특이한 것은 세모시 옥색치마,,,로 시작되는 <그네>의 작곡가 금수현 씨가 그녀의 사위라는 것.그리고 그의 장편 중에 훗날 최인호의 작품과 제목이 똑같은 것이 있다.별들의 고향! 최인호 씨가 김말봉의 이 작품을 알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그러고 보니 요즘은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와 같은 70년대 물들은 독서시장에서 사라져 버렸나보다.찔레꽃을 연재할 때 삽화를 그린 이가 한말숙이다.한 씨는 김말봉을 언니라 부르면서 따랐는데 그림솜씨가 뛰어난 재원이었다.한말숙 한무숙은 나중에 자매 소설가로서 우리의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말년에 김말봉은 어느 인사로부터 박마리아(이기붕 씨의 부인)의 전기를 쓸 수 있느냐는 압력성 청탁을 받았다.망설인 끝에 그녀는 거절했는데 이기붕 일가는 다 알다시피 4,19 때 아들인 이강석 씨의 총격으로 가족이 모두 비명에 가는 불운을 맞게 된다.훗날 시인 박목월이 육영수 여사를 찬양한 전기를 써서 구설수에 오른 걸 보면 김말봉의 거절은 개인의 명예를 위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박목월의 육영수 여사 전기는 가끔 헌책방에서 나오길래 나도 한 권 구해놨는데 몇년전 박근혜 열풍을 타고 새롭게 단장하여 선을 보였으나 그다지 반향은 없는 듯하다.
찔레꽃을 구했으니 예전에 못 구한 김래성이나 방인근 소설이 있는지 헌책방 순례에 나설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