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무렵부터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이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고물상이나 헌 책방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던 그 수많은 이른바 이념서적들.덕분에 광주에서는 1000원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었던 그 책들.주머니 사정 안 좋은 이들에겐 반가울 수도 있었지만 꽤 알려진 명저들도 그런 싸구려 신세를 못면한 데다가 이 많은 출판사에서 일하던 이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노파심까지....그 중에는 불과 몇년만 있다가 사라진 출판사도 많았다.
전진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다.정통!에 대한 굳은 신념을 자랑하는 이 출판사는 동구나 일본,미국의 맑시즘 책들은 믿을 것이 못되고 러시아 및 소련 저작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뭉쳐 있었다.소련 쪽에서 나온 책들! 물론 영어로 된 책을 번역했으니 중역이겠지만 스탈린 선집도 내고 레닌 전집까지 기획하여 내고 있었다. 결국 미완성.그리고 또 하나의 거창한 기획은 소련 과학 아카데미판 세계노동운동사였다.하지만 이 출판사 등록 년도가 1988년.너무 늦게 이 분야에 뛰어든 건 아니었는지.이듬해 동독이 없어지고 1991년에는 그들이 그토록 정통이라고 믿었던 소련까지 해체된다.
1998년.소련이 무너진지도 한참되고 엘친은 무능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시절.광주 시내 어느 점포가 정리한 뒤 인문사회과학 재고품을 값싸게 팔고 있었다.전진에서 나온 레닌전집이 있고 세계 노동운동사가 있고 스탈린 선집이 있었다.모두 두툼했다.한권에 무조건 1000원.주섬주섬 맘에 드는 책을 고르던 중 제일 좋았던 책이 엥겔스 전기였다.우리나라엔 마르크스 전기도 있고 캠코프의 마르크스 엥겔스 공동전기도 있었지만 엥겔스 전기는 없던 것이 늘 유감이었다.서방진영에 널리 알려진 구스타프 메이어가 쓴 것인가 봤더니 그건 아니다.소련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나온 것.그래도 여기에서 나온 책이면 믿을 만하겠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상 하 합쳐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왜 사람들은 엥겔스를 소홀히 할까.평소 늘 궁금했다.2인자의 설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 마음이 갔다.그리고 마르크스의 대중화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지 않았나.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마르크스주의를 배우려던 이들은 모두 엥겔스의 <사회주의,공상에서 과학으로>로 시작했다.나 역시 이 책을 틈틈이 읽었다.경제사와 사상사,특히 종교사까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니 얼마나 좋던가.안티듀링의 대중판이었는데 안티듀링이 너무 벅차니 이런 요약판이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그런 엥겔스의 생애를 이토록 자세히 다룬 책이니 내용의 풍부함은 물론이고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1848년 혁명에 관해서도 자세했다.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민족운동까지.헝가리,발칸 등...
그런데 이 책의 번역년도는 1991년 1월이다.그 해에 소련이 무너졌는데 이 책을 쓰던 맑스연구가들은 밥이나 먹고 다니는지 염려도 되었고 번역자들도 지금은 뭐하는지 궁금했다.이 책 뒤엔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가진 이들의 원고를 기다린다고 광고도 해놓았다.소련해체 후엔 이 출판사가 얼마나 더 버텼을까.1990년대 중반부터 광주시내 헌책방에 부쩍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1990년대 초에 거의 다 문을 닫지 않았을까.텁수룩한 수염이 난 엥겔스 사진이 있는 앞표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