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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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다. 죽음조차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제목과 푸른 색 표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계산했던 날이 생각난다. 이 도서는 선명한 파랑과 그 속의 균열처럼 모던하면서도 강렬한 몰입감을 자랑하는, 어찌 보면 괴상한 책이다. 장담하건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끝을 맺을 때까지 손을 떼거나 눈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을 위한 상담소에서 일하는 대학원생 강민주는 남성을 혐오한다. 여성 혐오의 미러링 같은 게 아니다. 그는 남성을 정말 벌레 보듯이 대한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가장 유명한 영화배우이자 만인의 이상형인 배우 백승하를 납치해, 남성이 가진 본성이 얼마나 추악한지 폭로하고자 한다. 강민주가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동안, 강민주의 곁을 지켜 온 황남기는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강민주의 손 안에서 진행되던 납치극과 이야기는 점차 예측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시원시원하고 파격적인 전개는 어떤 면에서는 부조리함을 다룬 연극을 떠올리게끔 한다(특히나 마지막 장면에 가까워질수록 말이다). 강민주의 가차없는 시선과 빈틈없는 일처리는 카레이싱만큼이나 급박한 긴장감과 속도감을 선사한다. 그와 황남기가 납치를 실행하는 과정은 어떠한 트릭보다도(나는 코난도, 김전일도, 셜록 홈즈 시리즈도(영화든 드라마든) 정말 좋아한다!) 철두철미하며, 강민주는 그 과정에서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손님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친절한 사람'으로 포장한다. 안전과 생존을 위한 백승하의 대응도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특히 파국 직전 백승하의 소원이었던 연극을 준비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 이상 납치범과 피해자만으로 규정지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은, 특히 (의도적으로 바깥과의 연락을 끊어 낸)강민주의 집 안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언론과 경찰마저도 체스의 '폰'처럼 강민주의 의도에 맞게 움직이고, 세 등장인물인 민주, 승하, 남기만이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불청객이 들이닥치고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동떨어진 세계의 암묵적인 평화는 파괴되고 만다.

이 소설을 읽고 통쾌함을 느끼신 분들도 분명 있으실 것이다. 전화기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내담자들은 결국에는 생존과 돈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때로는 남아있는 애정 때문에 남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강민주에게 집착하고 스토킹하는 남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슬프게도, 여전히 크고 작은 혐오와 폭력은 실재하고,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폭력을 강민주라는 캐릭터는 가차없이 비난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응을 정확히 예측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머리 꼭대기에서 누구보다 영향력이 큰 백승하와 강한 무력을 지닌 황남기를 포함해 모두를 조종하는 것처럼 굴던 강민주의 세계와 '오만'은 '고작' 남성의 손에 의해 와해되고 만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현실이 갑자기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속도감이 빠르고 흡입력이 좋은 소설을 찾으시는 분,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 아플 정도로 통찰력이 깊은 문장을 좋아하시는 분, 그리고 한국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50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속도감과 몰입감, 그리고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종종 등장하는 강민주의 노트는 아름답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가득하고, 가차없을 정도로 단호한 강민주의 말투는 어떤 면에서는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누군가의 팬이시라면 '백승하' 역이 누구일지 상상해 보시면서 읽어봐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개인적으로 하오체를 매우 선호하는지라 백승하의 대사를 읽을 때면 늘 즐거웠다). 이 글이 부디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란다. 플롯부터 예측 불허인 이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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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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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 챌린지 앱 <독파>를 알게 된 계기가 된 책은 바로 그렉 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였다. '김초엽 작가님과 테드 창에게 영향을 끼친 마스터피스'라니! 띠지만을 읽고 단박에 책을 선택한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이상하게 외국 sf를 읽을 때면 하루 이상이 걸릴 정도로 독서 속도가 느려진다고 느끼곤 했는데, 챌린지 앱 <독파>가 완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읽는 게 다른 책만큼 편안하진 않았지만(페이지 수만 약 500페이지가 넘는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대단한 책이었다. 이 책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등장하는데, 그 중 <적절한 사랑>, <내가 행복한 이유>,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바람에 날리는 겨>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적절한 사랑>은 사랑하는 남편이 사고를 당해 전신이 망가졌을 때, '나'가 경제적인 이유로 남편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을 할 수 있고 이후 남편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더 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 이미 '나'의 선택권이 없는 희생과 이를 강요당하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위한 신체적 희생은 대리모 등을 통해 실제로도 이루어지고, 그 대가는 알려진 것 이상이라고 전해진다. 뱃속의 무언가가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이 아닌 '남편'이라는 괴리감, 그리고 심각할 정도의 신체적인 고통은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더이상 남편을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뇌에 종양이 자라나면서 그 부작용으로 항상 '기분이 좋은 상태'에 처한 주인공의 성장기를 그린다. 종양과 함께 자라온 소년은 암을 치료하고 종양을 제거받아 새로운 삶이 자신에게 주어졌는데도, 더 이상 기뻐하지 못한다. 자신과 함께하였던 '기쁨', 즉 '부작용'이 암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은 소년은 오히려 무기력함과 절망을 느낀다. 소년은 자라나 남자가 되고, 남자는 자신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실험에 참가한다. 남자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얻었지만, '기쁨'에 의존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기분 장애(우울증, 무기력증, 조울증 등) 역시 현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인데, 이를 극대화시켜 한 인간의 성장담을 써 낸 작가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그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기쁨의 순간과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고, 견뎌낸 후 다음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성장해 나간다. '독특한 소재를 통한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sf가 가진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는 사실 누구나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너무 현실적으로 '나쁜 놈(주인공은 종교의 이름을 빌린 극심한 호모포비아이다)'이기 때문이다. (snl에서 이를 풍자한 적이 있는데, 빌런 모임에서 히어로에게 해로운 어떤 광선을 만드는 건 정상으로 취급받지만, 현실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빌런은 철저히 배척당하고 경멸당하는 내용이다)누구나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결말을 아는 장르에서 늘 그렇듯이, '어떻게'가 '엔딩'보다 더욱 중요한 법이다. 주인공 '쇼크로스'는 에이즈가 더 이상 동성애와 간통하는 자들을 '벌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 분노해서 단 한 사람의 이성과만 관계를 맺을 경우에만 목숨이 보장되는(즉, 동성애와 간통을 극단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신의 뜻일까? 신은 어째서 에이즈를 '사람을 죽이지 않는' 병으로 만들었을까. 쇼크로스는 단 하나의 변수를 깨닫고 마음을 돌린다.

그 어떤 두려움도 굶주림을 이길 수는 없다. 그 어떤 인내도 굶주림을 불식할 수 는 없다. 굶주림이 있는 곳에서 역겨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신이나 신념, 그리고 당신들이 아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조차도, 바람에 날리는 겨보다도 못하다.

진실과의 대면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바람에 날리는 겨>는 이 책에서 문장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파트이다. '나'는 '엘니도'라는 곳에 망명한 기예르모 라르고라는 생화학자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나'는 유행하는 마약이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찾아 나서며 그의 뒤를 밟고, 생태계를 변화시킬 만큼 독특한 숲으로 이루어진 '엘니도'를 찾아 떠난다. 이때 '나'는 유전학자들이 마약 카르텔들과 결별한 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였으며 그 영역을 점차 넓혀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라르고가 망명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나'는 라르고를 만날 수 있을까? 이 단편소설은 아름다운 문장들과는 달리 냉소로 가득하다. 단순하고 명쾌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은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냉랭하게 가로막아 버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지, 나다움은 무엇인지, 내가 되고 싶은 존재인 '나'는 누구인지.

이 책은 진입장벽이 조금 높아보일지는 몰라도,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통찰과 sf의 매력을 안겨 준다. sf 특유의 신비로움과 독특함, 그리고 삶과 인간에 대한 철학이 적절하게 배합된 이 책은 sf의 팬이시라면 '반드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sf 입문자시라면 조금은 어렵게 느끼실지도 모르겠다...)! 두께가 제법 있는데도, 남은 책장이 줄어든다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sf 장르의 팬이 되면서 허블 출판사의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는데, 이번에도 너무 멋진 책을 내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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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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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샤이닝>, <미저리>, <그것it>, 그리고 <피가 흐르는 곳에> 등을 정말 좋아할 정도로 스티븐 킹의 오랜 팬인데, 운좋게도 황금가지 출판사의 스티븐 킹 <나중에> 서평단에 당첨되었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너무 기쁘다!)! 스티븐 킹은 주로 공포와 스릴러를 다루는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유년기를 서정적으로 다룬 성장 소설을 누구보다도 잘 써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의 <나중에>는 기존작들과 유사하게도 한 소년의 성장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봐 왔던 소년들 중에서 주인공 '제이미'는 <스탠 바이 미>의 '고디'와 <해리건 씨의 전화기>의 '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단단한 성장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또한, <나중에>의 제이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샤이닝>의 '대니'와 유사하나, 둘의 자라난 모습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나중에>는 한 소년의 성장기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과 지극히 현실적인)공포가 잘 어우러진, 스티븐 킹의 두 가지 장점이 완벽하게 나타난 소설이다.

제이미는 내가 스티븐 킹의 수많은 소설을 보면서 가장 많이 응원한 주인공 중 한 명이다(나머지 한 명은 <스탠 바이 미>의 '고디'이다!). 유령을 보는 능력을 타고난 제이미는 그 능력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가 처한 재정 혹은 연애 문제 때문에 평탄하지만은 않은 유년기를 보낸다. 제이미의 능력은 때로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반면, 어머니 '티아'와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리즈', 그리고 스스로의 기사회생을 위한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 이때 아직 어린 제이미의 의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오히려 수많은 압박이 제이미에게 강제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도, 제이미는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제이미의 어머니인 티아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이다. 그는 기존의 헌신적인 어머니상과는 달리, 자신의 커리어와 돈을 위해서는 다정함을 기꺼이 내려놓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사업과 돈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가사에 소홀해지고, 욕과 와인을 달고 사는 모습은 오히려 한부모 가정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여상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제이미에 대한 애정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티아의 입체적인 면모는 소설의 몰입감을 높여주고, 제이미가 겪는 갈등을 부각시키거나 해소시킨다.

제이미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능력(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은 제이미의 이웃이자 조언자인 '버켓 교수님'이 등장하면서(이 부분에서 <해리건 씨의 전화기(넷플릭스로도 나왔다고 한다!)>와 <샤이닝>을 연상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라 확신한다)제이미가 '주도권을 잡고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버켓 교수님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버켓 교수님은 그토록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신 문물인 아이패드를 사랑하고 끝없이 제이미의 능력과 그를 도울 방법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진다(<샤이닝>의 '핼로런'은 아직 어린 '대니'에 대한 노파심 때문에 그를 돕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 다르다).

이 소설의 특이점은, 제이미는 오히려 '스티븐 킹 유니버스'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치사로 문장을 끝내지 말라는 스티븐 킹의 조언으로부터 출발하는 도입부를 보자마자 우리는 이를 눈치챌 수 있다. <쇼생크 탈출>은 다른 작품에서는 그 배경이 되는 감옥이 실제 지명으로 나타나는 반면, <나중에> 속에서는 하나의 작품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진정 우리를 옥죄어 오는 공포는 오히려 유령으로부터가 아닌 현실으로부터 찾아온다(고백하건대, 나는 통상적인 의미의 '호러물'이나 '스릴러물'에 매우 강한 편이니, 혹시 이런 소재에 취약하신 분들은 조심하시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러한 것들에 가닿아 있으며 영영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다른 의미의 공포를 선사한다. 사기로 인한 사업과 엄마의 재정적인 위기, 위태로운 연애에로부터 발생한 폭력적인 사태, 끊어내지 못하는 악연, 총기와 마약 문제, 그라고,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까지(나는 정말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제이미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제이미는 대부분의 사건을 그대로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항상 나중이라는 게 있다. 이제는 나도 안다. 적어도 우리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항상 나중이 있다. 마침내 죽고 나서야 모두 이전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탠 바이 미>의 고디가 단단하게 자랐을 무렵, 그는 이미 가정을 아룬 남편이자 아버지였다.)제이미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엄마의 강요로 인해 능력을 이용해야 했을 때에도, 제이미는 오히려 엄마의 성취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축하한다. 리즈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에도 제이미는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는 '쿠드 의식'을 행할 때의 제이미는 상대로부터 느낀 공포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주도권을 뺏고 상대를 조롱한다. 마지막 파트에서 제이미는 자신의 상대를 오히려 이용하여 상황을 바꿔나가고, 그와의 공존을 받아들인다. 이는 제이미가 유난히 담대하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제이미는 오히려 자신의 두려움을 독자에게, 엄마와 버켓 교수님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종종 드러내곤 한다(두려움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꿀 수 없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걱정하거나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한 스물 두 살의 제이미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다.

책이 도착했던 당일 저녁, 정말 피곤하기 그지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책이 정말 너무 재밌어서 읽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책표지의 화려한 색채들처럼 다채로운 모험과, 어떻게 보면 수많은 난관이 제이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제이미의 용기와 현재, 그리고 훗날은 무지개처럼 반짝거리며 빛날 것이다. 걱정과 다음에 찾아올 모험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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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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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잘 쓰여졌기 때문에 오히려 서평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책이 있다. 민음사의 한국문학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로도 잘 알려진 박혜진 작가의 <이제 그것을 보았어>가 이에 해당한다. 박혜진 작가의 매끄럽고 허심탄회한, 너무나도 매력적인 문체는 작품의 엔딩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과 맞물려 독자로 하여금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에 계속해서 휩싸이게 되었다. “어? 이 책 나도 좋아하는데!”, “어? 이 책을 나는 아직도 못 읽었던 말야?”

왜 이렇게 끝을 보고 싶어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제때 끝내지 못해 평생을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거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때 서둘러 끝내버리는 바람에 끝이라면 괴롭고 아쉬운 기억이 대부분이다. 유종의 미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내 앞에는 이토록 나타나지 않는 걸까.

책 중에서 인문이나 문학(주로 서양 고전소설)에 푹 빠져 사는 나 또한 그러하듯이, 하나의 완결은 주인공의 행복이나 생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게는 충만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나는 특히 더없이 사랑하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을 읽었을 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등장인물이 마지막에 느꼈을 고통과는 관계없이(이 글에서는 등장하는 작품들의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고 있다 -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 인물(프랑켄슈타인 박사와 피조물)은 자신의 서사를 완전히 끝마치고 막 뒤에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다. 보통 현실의 끝은 중간에서 그 서사가 ‘잘려나가거나’ 점점 늘어지고 지치다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보통 나는 강의의 끝무렵에는 항상 마음껏 더 열심히 해 보고 더 용기를 낼 걸, 하는 아쉬움을 절감하고는 한다. 출판학교가 마무리되었을 때에도, 토플 한 달 치 강의를 완강한 지금도 나는 저자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평론가로서 작품을 마주할 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조를 살피고 그 구조가 의도하는 메세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편집자로서 작품을 볼 때는 좀 다르다. 답을 만들어내기보다 다양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저자의 직업이 ‘편집자’이자 ‘평론가’라는 점은 민음사티비(애청자이다! 너무나도!)를 통해 박혜진 편집자에 관한 콘텐츠를 감상하며 알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존경스러운 마음과 함께 유사해 보일지라도 어쩌면 대척점에 서 있는 직업을 동시에 선택한다는 건 어떠한 느낌일지 늘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책의 엔딩이 대한 감상 뿐만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혹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이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실려 있었다. 단단한 저자의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갖는다는 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또한 민음사티비의 애청자이자,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은 나에게는 저자의 이야기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는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나, 나를 붙잡는 것도 나, 나를 죽이는 것도 나.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과 그에 대한 평론을 몇 편 언급해보려 한다. 먼저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이 있다. 노문학(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처럼 ‘늪과 같은’ 한 나라의 문학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 특유의 황량함과 온 몸을 에는 것만 같은 추위, 그리고 인간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통찰력에 빠져들고 만다. 특히 러시아 문학의 장벽이라 여겨지는 ‘벽돌책’에 버금가는 분량은(또 하나의 장벽은 분명 다채로운 애칭일 것이다) 오히려 더 전개될 사건과 작가의 성찰에 대한 기대감이 되어 다가온다. 안톤 체호프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만큼 엄청난 분량을 써 내는 작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세심한 인물의 심리와 이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여파를 날카롭게 궤뚫고 있다. 이 책의 엔딩이 누군가에게는 황당하고(아마 와야마 야마의 <여학교의 별>을 떠올리는 독자 또한 많을 것이다 - 이 만화책 역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비현실적이라 여겨질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노문학에서 자주 쓰이는 인간의 본성과 ‘절망’이라는 소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오로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것만을 말하는 자가 실존의 영웅, 거짓에 저항한 뫼르소는 그가 속한 세상에서 이방인이니 틀림없지만 자기 삶에서는 끝내 이방인이 아니었다.

진심은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 적은 비용을 외면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방인은 내가 미처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읽었던 소설이자 처음 접한 카뮈의 작품이다(부디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모든 분들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부끄럽지만 맨 처음에는 ‘이방인’이라는 제목을 뫼르소의 고독과 부조리함과 잘 연결짓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뫼르소는 끝내 변화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어쩌면 그 두 가지를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을 종용하는 세상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진실을 택하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이 결심은 그를 행복한 인간으로 만든다. 얼마나 세상이 부조리하든 진실을 택하고 나아가기로 선택하는 뫼르소의 마지막은 애처롭기보단 아름답다.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막기 위해 서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압도적 불안이 소설의 엔딩을 감싼다.

최근에 읽은 작품인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주인공 블로흐가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극도의 경계심과 불안감, 그리고 어긋난 소통에 관한 비극이다. 그가 느끼는 모멸감은 예상 밖의 행동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블로흐에게 안정감을 안겨준다. 자신이 ‘미리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페널티킥 앞’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주인공은 이미 끝없는 불안감에 잠식된 위치에 서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을 그린 이 짧은 소설은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있다.

손들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전부를 걸다니, 너무 숭고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이야기를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낭만적인 풍경은 사라지고 차가운 배경만 남는다. 사랑이 지닌 가장 큰 힘이라면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일 테다.

(이 단락은 부디 스포일러를 주의해주시길 바라며)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한 작품들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소설들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날개>, 그리고 <동백꽃>에 대한 박혜진 작가의 날카로운 평론과 지적은 이 작품을 그저 국어 시간에 스쳐지나간 것들로(현재 이상의 작품은 주로 시를 통해 접하고 있다) 치부하던 나에게 많은 경각심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베르테르에게 ‘주목을 사랑하는 면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나르시시즘적 면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쩌면 ‘베르테르 효과’로 인해 이 소설이 단순한 엔딩으로만 기억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박혜진 작가의 말처럼 단순한 짝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이야기 대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치기어린’ 생각에 빠진 청년의 자각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동백꽃의 경우, 마지막 두 인물이 꽃덤불에 폭 엎어진 장면이 묘하게 간질거리는 기분을 불러일으켰던 이 소설은 권위와 위계질서에 대한 폭력으로 뒤바뀐다. 국어 시간에는,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주로 동백꽃의 ‘나’를 어기숙하기 짝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점순이를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수줍고 치기어린 소녀(그래도 ‘나’에게 너무하긴 했다는 의견이 우리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로 해석하곤 했다. 또한 관계의 주도권이 여성인 ‘점순이’에게 있다는 점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동백꽃이 쓰여졌을 때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내가 사회초년생에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 해석은 필연적으로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박혜진 작가의 말처럼, ‘나’가 느낀 감정과는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점순이로부터 쏟아지는 위계적인 폭력을 막아 낼 방도가 없다. 수능 시험을 보려면 일종의 ‘주류가 되는 해석’을 머릿속에 그대로 ‘주입’시키는 수밖에 없다(물론 과외를 하고 멘토링을 할 때 나는 수도 없이 투덜거리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새로운 해석을 펼쳐나가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어린데도 그렇게 무정하냐.”

“이렇게 어린데도, 전하, 진실하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특히 나처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모으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와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2012년도에 방영된 텅 빈 왕관Hollow Crown을 보고 셰익스피어를 미친듯이 읽기 시작했다. 나는 희극보다 비극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고, 4대 비극 중 햄릿을 가장 사랑함에도 불구하고(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말이지 - 이 문장을 보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어요ㅠㅠ)리어 왕에 대한 박혜진 작가의 평론은 정말 재밌었다. 나 또한 설명충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이다(무표정한 인상 덕에 오해를 많이 사기도 하고, 일종의 선생님 기질일 수도 있겠다). 대체로 우리는 에드거의 말과 달리 느끼는 걸 말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해야 할 말을 하려 애를 쓴다. ‘대체로 우리는 계산하다 망한다’는 문장에서는 웃음과 자괴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우리는 진실을 말하면서 살아갈 의무가 있다. 하지만, the 1975의 노래처럼, 진실됨은 어려운 법sincerity is scary이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마지막이라는 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박혜진 작가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보통 첫 문장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책을 고르지만(이미지라도 유명한 첫 문장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끝을 봐야 하는’ 성향을 가진 나는 박혜진 작가의 이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다. 또한, 편집자로서, 평론가로서, 그리고 작가이자 독자로써 박혜진 작가가 표현한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한하고 애틋하다. 이 책을 통해 출판편집자와 책에 대한 일이 얼마나 멋진지, 그리고 내가 책을 얼마나 사랑해왔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독서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고 웃음짓게 할 만큼, 이 책은 너무나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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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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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서정적인 마음을 그려낸 <독일인의 사랑>은 개인적으로 정말 아끼는 작품이다(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책을 두고두고 펼쳐 보곤 했다 - 나에게는 주기적으로 펼쳐 보게 되는 책이 늘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이 끝나면 무조건 해리 포터를 마법사의 돌에서 죽음의 성물까지 - 이가 출간되기 전에는 가장 최근에 발간된 파트까지 - 전부 읽곤 했다). 책을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풀꽃과 잔디, 그리고 초여름의 푸릇한 나뭇가지와 바람 향기가 '나'의 마음과 함께 아스라이 쏟아져나오는 것만 같다. <독일인의 사랑>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부터 시와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묘사와 설명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은 독자의 시선을 흩뜨리는 대신 오히려 '사랑'이라는 책의 메세지를 강조한다. 이 책에 담긴 '나'와 '마리아'의 마음은 결국 주체하지 못한 채 다양한 은유들과 함께 '쏟아지고 흘러나오게' 된다. 마음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토해내는' 두 인물의 상황은 오히려 그 동경과 사랑의 애절함과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어찌하여 이 같은 무의식과 지순의 현존이 종식을 고할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완전하고 편재하는 행복감에서 몰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느닷없이 어두운 생의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서게 하는가?

"대체 낯선 타인이라는 게 뭔데요? 그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들을 좋아할 수는 있단다. 그렇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가요? 왜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보이면 안 되는 거지요?"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은 마리아에 대한 '나'의 애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겪고 깨닫는 마리아에 대한 동경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를 통해 깨닫는 삶에 대한 고찰이자 예찬이기도 하다. 어린아이 시절의 '나'가 애정을 느끼는 존재에게 어째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건지 질문하는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의식은 잘 드러난다. 독일인인 '나'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삶을 경험하고, 서서히 삶과 타인에 대한 애정과 아이러니를 느낀다. 결국, '독일인'인 '나'가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은 마리아 단 한 사람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된다.

그래서 나는 곧잘 생각에 잠겨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여자도 낯선 타인에 속할까?' 하고 자문해보곤 했다. 그럴 때 그녀는 종종 내 머리에 손을 얹곤 했다. 그러면 마치 무엇인가 내 온몸을 통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도망칠 수도, 뭐라고 입을 뗄 수도 없이 꼼짝없이 사로잡혀 그녀의 그윽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를 하나씩 가져왔어. 지금은 이것을 너희들 집게손가락에 끼워두렴. 그리고 너희들이 자라면 그 반지를 차례로 옮겨 끼는 거야. 나중에는 새끼손가락밖에는 맞지 않게 되겠지만...... 그렇지만 평생 동안 이 반지를 끼는 거야, 응?"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자라난 '나'는 애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배우고, 성에 살고 신분이 높으나 몸이 매우 약한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나'는 마리아를 만나고 그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마리아에게 사로잡힌 채 서로가 같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마리아가 마치 유품처럼 남기고자 한 마지막 반지를 받기를 거부하고, 이를 마리아에게 돌려준다. '나'는 마리아의 희생을 거부하고, 삶에 대한 의지이자 사랑을 마리아에게 돌려준다.

어느덧 소년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마리아를 수호천사로 여겨 왔으며,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고 독자에게 고백한다. '나'는 마리아를 절대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아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해 왔다. 즉, '나'가 마리아에게 품는 감정은 단순한 애정이나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동경이자 플라토닉한 사랑에 가깝다. 마리아는 'Du'(가까운 사람을 부르는 2인칭 단수)라고 '나'를 칭하며 반겨주고,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영혼의 충만함을 느낀다. 마리아 또한 '나'가 돌려준 반지를 아직까지도 새끼손가락에 낀 채로 간직하고 있다. - 다음 장에서 마리아는 "내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견신례날 이 반지를 당신에게 드렸을 때, 이미 곧 세상을 하직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토록 여러 해를 살아오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누리다니요"라 고백한다. - 그러나 마리아는 '나'가 손에 키스를 하는 것을 신분의 차이와 자신의 병세 때문에 허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한아름 꺾어 모은 꽃을 서슴없이 잔디 위에 다시 던지는 어린애처럼, 자신이 수집한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기탄없이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에게 그런 점을 솔직히 털어놓고,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간절한 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실 그대로 구현할 말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만해하고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나'와 마리아는 초상화와 시, 그리고 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누면서 견고한 우정을 쌓아 간다(이는 '죽음'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의 환경에서 기인하지만, '나'는 이를 방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나'는 마리아처럼 자신의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고백하지 못하는데, 이는 '나'가 진정으로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 점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친구로 남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던 '나'에게도 고난이 찾아온다. 마리아의 주치의 선생님은 마리아의 건강을 위해 '나'가 그를 떠나 여행을 갈 것을 권한다. '나'는 별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마리아였으므로) 여행을 떠나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다. 그 깨달음이란, 자신은 '도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왔으며, 최대한 빨리, 그리고 오래 마리아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데 성공한다. 성공하나 후회한다. 괴로워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나는 당신에게 다정하고 솔직하게 대했지요. 왜냐하면 당신을 그토록 오래 알고 지냈고, 또 당신 곁에 있으면 아주 편안했으니까요. 왜 이런 말까지 내가 모조리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으니까요.

결국 마지막 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나'의 마음은 흘러넘쳐 터져나오고야 만다. '나'를 향한 마리아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마리아는 결국 자신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야 만다 - 이를 어째서 말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나'의 억눌러 온 마음은 마리아를 향한 절절한 고백이자 약속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신분제나 필멸과 같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나, 이는 결국 사랑과 두 사람의 의지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결정의 순간을 마냥 미루려는 듯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많은 독자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이 대사 덕분에 이 책을 읽었고, 결국에는 사랑하게 되었다. 플라토닉하고 순수한 사랑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결국 소리높여 터져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나'는 마리아에게 고난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마리아는 결국 '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튿날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남긴 채 사망하고 만다. 여기서 주치의 선생님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는 마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의 안녕을 위해 후작과 어머니가 결혼하게끔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하지만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를 출산하다 사망하고야 말았다. 주치의 선생님의 삶에 대한 사랑은 곧 마리아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이후에도 '나'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 곧 삶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를 비통하게 여기는 대신, 오히려 이를 통해 위로를 받고 아직까지도 세상을 둘러싼 사랑을 느낀다. 마리아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는 결코 비극적인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단순한 러브스토리보다는 '나'의 성장을 그린 이야기에 가깝다.

싱그럽고 풋풋한 풀밭을 밟아 가며 철학과 시를 노래하는 이 책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마리아와의 사랑을 얘기하는 부분 외에서도 깨닫게끔 돕는다. <독일인의 사랑>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지금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우리 고양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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