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막심 고리키 지음, 최윤락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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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관한 서평을 쓸 때, 처음 희곡을 접하시는 분들께 <밑바닥에서>를 권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 극은 지극히 (이 말로는 조금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비극적이고, 암울하다. 살을 에는 바람과 눈폭풍 속에 잠시 존재했던 옅은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오히려 그 온기를 원망하게 되듯이, 이 극은 감정적으로 매우 잔인하다. 그래서 이 극을 나는 지독히 사랑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과 마찬가지로 나는 <밑바닥에서>를 뮤지컬로 처음 접했다. 아직도 ‘배우’를 맡으신 박민성 배우님의 넘버에 압도되어(정말이지, 뮤지컬을 볼 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건 그 때가 유일했다)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 여기서 벗어날 거야… 껍데기를 깨고,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나고 말 거야…”

“자유를 원하지만, 제기랄!

쇠사슬이 끊어지지 않네.”

<밑바닥에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전부(정확히 말하면, 단 한 사람만 빼고)하층민이자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간혹 과거의 영광을 되뇌일 뿐(그 대표적인 인물은 배우와 사틴이다), 지독한 무력함에 빠져 이에서 빠져나올 희망조차 품지 못한다. 그들은 오히려 탈출을 갈망하는 스스로의 욕망을 부정함으로써, 또는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긋지긋한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 같은 여인숙에서 동고동락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폭언을 퍼붓고, 악착같이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한다. 여인숙에 거주하는 모든 인물은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그리고 이를 잊기 위해 들이킨 알코올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다. 이 극에서 가장 밝은 성격을 가진 페펠(개인적으로는 아직도 페페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 또한 그렇다. 시계의 값을 계산할 때, 바실리사와의 결별을 얘기할 때, 양심의 무의미함을 얘기할 때 페펠은 쾌활한 청년에서 거칠고 날이 선 말투를 가진 냉소적인 하층민으로 그 위치가 뒤바뀐다.

"우리들은 모두 이 지구의 순례자라고 할 수 있지... 들은 적도 있는데, 우리의 지구도 넓은 하늘로 보면 순례자라고들 하잖소."

이때 갑작스럽게도 단조로운 하층민들의 삶을 뒤흔들고, 희망을 품게 만들고 혼란에 빠트릴 인물, 즉 '루카'라는 이름의 노인이 등장한다. 루카는 언제나 가난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했던 안나의 삶을 위로하고 그가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루카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배우에게 중독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병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절제를 통해 새로운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이때 이 극에서 탈출이라는 희망을 꿈꾸나 절망으로 추락하는, 다시 밑바닥 인생으로 회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두 명이다. 페펠은 바실리사의 정부 역할을 그만하고 나타샤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기를 원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배우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해주는 병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술을 끊어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억지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어, 자비를 구걸하는 것도, 내 성격에 맞지 않아… 진실을 말해줘서 고맙군…”

“우리들은 짐승이지… 우리들은 서로 길들여야 해… 그런데 당신은 내게 뭘 가르쳤지?”

“그리고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바스, 당신이 아니고… 내 희망을, 그 희망을 당신 속에서 사랑하고 있었는지 몰라… 이해하겠어? 나는 기다리고 있어, 당신이 나를 끌어내줄 것을…”

먼저 페펠의 경우, 그는 애정이 없었던 바실리사와의 관계를 종결짓고 사랑하는 나스탸와 맺어지기를 꿈꾼다. 루카 또한 페펠의 선택을 옳다고 말하며, 아주 멀리 떠나가라고 충고한다. 루카는 또한 나타샤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르친다. 그러나 바실리사는 페펠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심지어 바실리사는 페펠보다 그 마음을 먼저 알아챈다) 나타샤를 학대한다. 페펠은 (바실리사의 정부가 되면서 페펠은 바실리사의 남편 때문에 감옥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나타샤와 어디로든 떠나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나 결코 바실리사가 자신을 안전하게 보내주리라고 믿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페펠이 나타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두 사람이 맺어져 떠나기로 결심한 그 순간, 바실리사가 등장하고, 난투극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페펠의 실수로 바실리사의 남편이 사망하고 만다. 이때 페펠을 나락으로 끌고 간 것은 한때 사랑하는 이를 경찰에 넘기려 한 바실리사가 아니다. 나타샤에 의해, 페펠의 순수했던 사랑과 희망은 바실리사의 남편을 죽이기 위한 공모로 전락한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넌 모를 거야,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이고, 노래를 망쳤어… 그 바, 바보 놈이!”

두 번째로 배우의 경우, 그는 친구 사틴에게 언제나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지, 자신이 배우로서의 자신감과 재능을 타고났으며 얼마나 큰 환호성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얘기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름조차 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는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과거를 언급하는 인물들 중 가장 이전의 삶에 애착이 강한 인물이다. 그 애착은 '중독은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고 새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루카의 말에 의해 일깨워진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심지어 술을 완전히 끊고 포즈를 취한 채 독백을 해 낸 채로 자신의 예명을 알려준 뒤(나는 처음 이 극을 접했을 때부터 아직도 이 이름을 외우고 있다. 그만큼 그 넘버는 강력했다.) 미련없이 여인숙을 떠나 도시로 향하려 한다. 하지만 배우의 마지막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고 있다는 근황이 아니다. 배우는 4막에서 여전히 여인숙에 머무르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마지막으로 청한 뒤 공터에서 목을 멘 모습이 발견된 채로 극은 막을 내린다.

"나는 거짓말을 알아! 또 정신력이 약한 자... 남의 노력과 희생으로 살아가는 자, 그런 놈들에게도 거짓말은 필요해... 거짓말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 자도 있고, 그와는 달리, 거짓말을 방패로 삼는 자도 있기 마련이야... 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인 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남을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는 자에게는 거짓말이 무용지물이야!"

"사기꾼이라고 해서 좋은 말 못하란 법 있어? 정직한 사람도... 가끔은 사기꾼이 하는 말을 하기도 해! 음... 지금은 많이 잊었지만 아직 아는 건 많아! 그 할배? 지혜로운 사람이었어!...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 녹슨 동전이 산을 만난 것처럼..."

비극적이고 황량한 결말에 대한 복선은 사실 3막 중간에 등장한다. 루카는 진실의 땅을 찾지 못한 유형수가 결국 목을 메어 죽었다고 페펠과 나스탸에게 말한다. 나스탸의 말대로, "속았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카는 극 중간에 돌연히 우크라이나에서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해 퇴장하려 한다. 아니, 퇴장해 버리려 한다. 페페르가 홀로 도주한 4막이 시작되자, 루카의 존재, 즉 희망과 이에 대한 갈증 또한 사라진다. 남겨진 사람들은 루카가 쥐어준 뒤 다시 '빼앗아 간' 삶에 대하여 반추하나(이 시점에 다다른 뒤에야 그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에게는 "밤새 노래를 불러" 자신들의 운명을 애도하고 슬퍼할 자유만이 허용된다. 물론 이조차도 배우의 죽음으로 종결되지 못한 채 극은 막을 내린다.

희곡 <밑바닥에서>는 절망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노래한다. 여인숙에 머무르는 하층민들은 현재의 삶에 좌절하기도 하나(이 극의 결말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결국 사틴과 같이 삶을 돌아보고, 이를 이해하려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은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딛고 '나아가고자' 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그들은 새로운 삶과 희망을 꿈꾼다. <밑바닥에서>는 '파멸'이라는 소재를 사랑하는 나에게도 칼바람에 심장이 베이듯 고통스러운,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었다. 이 극을 읽을 때마다, 나 역시 한 발짝 더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곤 한다. 지금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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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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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하나뿐이 아닌 한아뿐. 소설의 제목은 이야기가 얼마나 대책없이 로맨틱하고 많은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여상히 드러내고 있다. 정세랑 월드의 팬이면서, <보건교사 안은영>을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전부 접하고 <아라의 소설>까지 완독했으면서, 이제야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계기는 <아라의 소설>을 읽고 정세랑 월드에 본격적으로 빠져봐야겠다는 결심과, <독파>라는 완독챌린지 앱이다. <독파>에서는 무료로 진행되는 챌린지도 있고, 첫 챌린지의 참가 비용은 무료이며 정말 좋은 책들을 중심으로 챌린지가 진행 중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운받아서 한번 도전해 보시는 것을 권해드린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은영과 <지구에서 한아뿐>의 한아는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수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해자', '동반자'이자 함께 미션을 클리어하는 동료를 얻는다. 무엇보다도 둘은 자신만의 힘으로 선한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간다.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은영은 학생들과 학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반면, 한아는 환경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지구 밖의 존재를 위해 묵묵히 일한다는 점이다.

한아에게는 '경민'이라는, 어쩌면 그 자유로움이 매력적이고 동시에 대책없이 무책임하게만 느껴지는 남자친구가 있다. 옷과 추억을 보존하여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한아의 일상에서, 갑자기 경민의 태도가 헌신적으로 뒤바뀌고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소설의 설정을 그다지 '멋지고 로맨틱하다'고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다른 세상을 향해 '말없이' 떠나버린 진짜 경민(X라고 칭함)은 물론이고, 첫 눈에 반해 타인의 모습을 빌려 다가와 마음을 쏟아내는 신원 미상의 존재라니. 나라면 호기심을 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상황을 한아만큼 잘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한아는 훨씬 아량이 깊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소설에서는 한아를 사랑하는 경민의 마음만큼이나 지구를 사랑하는 한아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여상히 드러난다. 한아는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옷들과 추억을을 패스트 패션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되새기고 되살리는 일을 한다. 한아와 유리는 비건 레스토랑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한아와 경민은 우주인들을 돕기 위해 기이하고 짧은 모험을 하고, 둘의 결혼식에는 자투리천을 이용한 드레스와 비닐을 쓰지 않은 꽃다발이 쓰였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지구에 대한 사랑이 담긴 한아의 여정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폴로'에 대한 주영의 마음과 아폴로의 꿈을 향한 도전 또한 사랑스럽고 멋지다. 아무리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쏟는다고 비난을 듣는다고 해도,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한 진심은 반짝이며 빛나기 마련이다. 아폴로를 처음 만났을 때 주영이 토해내는 말은 날것이면서도 때묻지 않은 사랑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이런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팬이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뜨고, 자신의 마음에 기대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다시, 다시 태어나줘.

소설 속의 평화는 '진짜 경민(x라고 칭한다)'의 등장으로 인해 순간 뒤바뀐다. 혹은 뒤바뀌지 않는다. 사랑에 빠져든 채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던 인물들에게 x의 존재는 경민과 한아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한 장애물조차 되지 못한다. 그는 고작 '아폴로'와 그를 쫓아 우주로 떠난 주영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매개체로 전락했을 뿐이다. x와 경민은 끊임없이 대비된다. 죽어서 한아를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영 떠나게 된 x와 돌아온 이후 평생 곁을 지킨 채 한아에게 한번 더 함께할 것을 청하는 경민. 에필로그에서 경민의 다음 생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나는 이 소설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한다. 경민은 끝없이 한아를 속인다. 처음 다른 이의 몸으로 한아를 마주해 연인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계약서 이야기를 할 때까지. 어떻게 보면 무서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끝없이 두려움에 시달리고 이기심에 휘둘리고 마는 경민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지극히 날것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내뱉고 마는 모습은 강한 마력이 있다. 경민도, 주영도.

많은 이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 2022년, 나 역시 에코백과 텀블러를 사용하고(지나친 구입은 물론 지양하려 한다)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키링을 가방에 달거나 일주일에 한 번은 채식을 하고 있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재출간된 소설이라 하더라도 이 시점에 읽기에 너무나 좋은 소설이다(특히, 경민과 한아의 결혼식은 11월이다). 부디 애정으로 가득 담긴 이 소설을 통해 환경과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더욱 키워나가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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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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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이냐 없음이냐(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 <햄릿>을 선택할 것이고, 셰익스피어가 쓴 대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꼽을 것이다(아마 "오, 로미오! 당신은 어째서 로미오인가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책을 고를 때 뒷표지를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앞표지와 내용을 훑어본 뒤 구입하는 편인데, 이 책의 뒷표지에 쓰여 있는 "있음이냐, 없음이냐"라는 번역을 보고 호기심과 궁금증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책의 본문에는 "삶과 죽음" 대신 "있음과 없음"을 택한 이유가 매우 상세한 해설과 함께 쓰여 있다. 그 부분을 보고, 나는 <햄릿>이라는 극작품과 함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섬세함에 한번 더 반하게 되었다. (만일 내게 감히 번역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택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 bbc에서 2012년에 방영된 <할로우 크라운>이라는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한 시리즈를 몇 번이나 돌려 봤을 정도로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나는 희극보다 비극을, 그리고 시대극을 좋아하고, 4대 비극 중에서는 햄릿을 가장 사랑하고, 희극 중에는 십이야를 좋아하고, 시대극 중에서는 헨리 5세를 가장 좋아하고...).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매우 영광스럽고 두려운 일이다(쓰면서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햄릿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현재 왕의 자리를 차지한 숙부와, 그와 결혼한 어머니를 보며 괴로움을 느낀다. 햄릿은 어느 날 밤 아버지의 혼령을 만나 자신을 죽인 범인은 숙부라는 말을 듣고 복수심에 휩싸여 이에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 햄릿은 숙부가 정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살해 방법과 같은 내용의 연극을 상연하게끔 만든다. 이때 햄릿은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왕으로 착각해 죽이고 말고, 그 결과(중간에 햄릿은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오필리아에게 폭언을 퍼붓기도 한다) 오필리아는 실성해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왕은 햄릿을 영국에 보내 사형시키고자 하나 햄릿은 살아돌아오는 데 성공하고,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와 검술 시합을 벌이게 된다. 이때 레어티즈는 햄릿을 죽이기 위해 독을 바른 칼로 시합을 하는데, 중간에 칼이 바뀌어 햄릿도 레어티즈도 상처를 입어 죽게 된다. 햄릿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알릴 것을 부탁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꽤 오랜만에 접한 햄릿은, 복수에 온 운명을 내던지기에는 혈기왕성하고 치기어린, 사랑에 설레하는 어린 청년이었다 - 이 점이 햄릿이라는 극의 비극성을 더 부각한다고 느꼈다. (여담이지만 극 중에서 그토록 어려 보였던 햄릿이 '수염이 있다'는 묘사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내가 찾아 본 영국 배우들은 다 햄릿 역을 맡을 때 어리고 수염이 없던데.....) 햄릿이 죄의식과 분노, 고뇌에 휩싸여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할 때, 햄릿이 아끼고 사랑하던 인물들은 - 햄릿 자신을 포함해서 - 각자의 이유로(혹은 햄릿의 손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져내리고 만다. 뒤를 돌아볼 기회는 몰락 이후에야 햄릿에게 주어진다.

"오 하느님, 난 호도알 속에 갇혀 있다 해도, 내 자신을 무한 공간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다네 - 내가 악몽을 꾸지만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햄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이 구절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생각 혹은 마음에 따라 달려 있다는 진리를 그 누가 이토록 낭만적이고 비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햄릿에게 삶과 왕국이 악몽과 같은 존재인 것은 햄릿이 이들을 '복수', 혹은 '아버지의 죽음'을 연관지어 떠올리기 때문이다. 유령의 존재로부터 눈을 감고 귀를 닫는 대신 햄릿은 복수를 택한다. 결국 햄릿은 영영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그가 칼에 찔려 죽음을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다양한 버전과 해석이 존재하는 극이기 때문에 햄릿은 더욱 매력적이다. 민음사에서 택한 <아든>버전 외에도 <뉴 케임브리지>와 <리버사이드>판의 햄릿 역시 접하고 싶고, 다양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햄릿을 더 많이 감상하고 싶다(현재 스카이씨어터에서 연극 햄릿이 공연중이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인 영화 <햄릿>과 데이지 리들리가 주연인 영화 <오필리아> 또한 권해드리고 싶다. 책으로, 원서로, 연극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항상 접하고 싶은 만큼 나는 이 극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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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기둥 -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42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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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시인 세 분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고 허수경 시인(아직도 돌아가신 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최승자 시인, 문보영 시인을 고를 것이다. 작년 말 문보영 시인님의 시집을 접한 뒤로 소설에만 푹 빠져 살던 나는 다시금 국내/현대 시집을 사모으기 시작했다(그 이후 시인님께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팬레터를 작성해서 보냈고 답장을 받아 뛸듯이 기뻐하곤 했다. 물론 일기/시 딜리버리도 신청했다. 두려움 없는 기다림이란 얼마나 귀하고 기꺼운 것인지!). 맑은 코랄 빛의 시집은 발랄한 듯 하면서도 농도가 짙고, 어쩌면 그 색채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깊고 곰곰한 사색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문보영 시인님의 시를 꼭 빼닮았다.

시에 대한 리뷰를 쓰는 건 참 어렵다고 느끼는 게, 이 부분이 좋다고 올리면 저작권을 침해하게 되고, 이 부분을 올리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만큼 영업이 안 되고...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제목을 적어보자면, <입장모독>, <역사와 신의 손>, <삼각형>, <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 <끝>, <도끼를 든 엉덩이가 미친 사람>, <그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프로타주>, <그녀들> 등이다. 제일 좋아하는 시는 <역사와 신의 손>일 것이다. 아마도...... 이 시집에서 마음에 곧잘 와닿고 환상적인 시는 너무나도 많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있는 이 시집을 처음 펼치시는 경험을 하시는 걸 추천하므로 여기서는 최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위주로 쓰려고 한다.

<입장모독>의 경우, 시 속의 '우리'와 현실의 우리는 동일시되어 여전히 일종의 '구원'을 기다린다. 모티프로 쓰인 '빵'은 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많은 혁명에서 '기본적으로 먹고 살 권리', 즉 '기본권'을 통칭하는 말의 토대로 쓰였다. 빵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가볍고, 절실하며, 직관적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며 반성 중 가장 치명적이라 여기는 부분은 4번, 7번, 9번, 10번, 12번이다. 시에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인간의 덕목과 이에 따른 부작용이 제시된다. 격동기의 지식인이 지독한 회의주의자로 변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그 잘못의 종류와 관계없이, 우리는 영영 구원을 얻지 못하고 기다리는 무력하고 두려움에 처한, 피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역사와 신의 손>의 경우, 시에서는 '역사' 가 매우 단순한, 혹은 단조로운 단어의 나열로 표현된다. 이는 역사의 잔혹성과 반복성을 부각한다. 역사가 남긴 것을 한 단어로 섬찟하고 날카롭게 묘사한 이 시는 모든 이들이 겪는, 혹은 겪어야만 하는 갈망과 절망을 동시에 나타낸다. 시가 진행될수록 흘러가버린 역사와 이미 흘러가버린 피에 대한 무심함 혹은 무신경함은 단순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를 알고 싶어하는 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는 진리와 책, 그리고 신의 존재를 동시에 표현하면서 일상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도서관에 대한 시인의 특유의 사랑 역시 이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나도 도서관에서 이 서평을 작성중이다).

<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은 묘하게 위로를 선사해주는 시이다. 누구나 경험해 봤을 과거 회상과 당시의 어리숙함 혹은 슬픔을 지우고 싶은 마음. '당근'이라는 소재는 문보영 시인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문보영 시인은 종종 상상력이 넘치는 발랄하고 명랑한 소재를 끼워넣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되기 이전이었나?) 지금까지 불면증으로 쭉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잘 자라는 말에는 언제나 위로를 받고, 심지어 반하고 만다. 천사들이 접는 건 미숙했던 과거였을까, 지나간 슬픔이었을까.

<도끼를 든 엉덩이가 미친 사람>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죄와 벌>혹은 영화 <샤이닝>을 연상시킨다. 어찌 보면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이 시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단박에 그 제목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특징을 가진 이 인물은 그렇기에 마음껏 감정과 사상을 토해낼 자유를 갖는다 - 그 부분에서 황폐함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꼈다. 그는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고자, 혹은 안정을 되찾고자 한다. 이 시의 결말은 꼭 황폐한 겨울과 희망을 동시에 다룬 연극 같다.

<그녀들>에는 작가가 아끼는 세 명의 시인이자 시집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인 앙뚜안, 스트라인스, 자말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들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두 부분, 즉 '영혼과 육체'라고 규정되었다는 정의를 자신들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지말의 외침은 자유로운 상태와 매여있는 상태, 스트라인스의 멈춤은 억압당하는 자와 억압하는 자를 상징한다. 즉, 두 사람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에 의해 중간에 '끼여있는', 어떻게 보면 '어느 한 입장에 속할 수 있는' 계층이 된다. 앙뚜안의 대답을 보면, 자신이라 정의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모여 한 사람이 된다. 나는 여기서 앙뚜안의 답이 결이 약간 다르다고 느꼈는데, 앙뚜안의 정의한 사람은 사회적이기보단 상대적으로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끼는 '나'와 타인이 느끼는 '나' 사이에는 별 수 없이 괴리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정의는 '집', 즉 사회의 아픔 앞에서는 슬프고 배부른 걱정일 뿐이다.

지금까재 각 장에서 한 편의 시를 뽑아 각각 리뷰를 써 보았다. 문보영 시인님의 시는 통통 튀는 소재와 지극히 철학적인 사유를 어우른다. <책기둥>을 읽다 보면 발랄한 문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다가도, 시가 생각거리를 던져줄 때면 몇 번이곤 페이지를 되풀이해서 읽게 된다. 많은 시를 접해보신 분들께서는 다양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이 시집을 분명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밝은 문체를 통해 특유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지실 거라고 생각한다. 문보영 시인님께 다시 한 번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토끼는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 너무 재밌었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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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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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표지는 싱그럽고 고운 튤립 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밑에 호랑이 두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표지와 같이, 안희연 시인님의 작품들은 곱고 부드러운 시어가 쓰이지만 주제의식 또한 그렇지는 않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다(또 다른 시집인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들이 모여 있다). 안희연 시인님의 작품들은 항상 부드럽지만 섬세하게 삶의 본질을 파고들고, 따스한 손으로 위로를 건넨다.

좋아하는 시를 먼저 뽑아보자면, <선잠>, <알라메다>, <빛의 산>, <역광의 세계>, <단란>, <풍선 장수의 노래>,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덧칠> 등이 있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는(특히 이 시집에서는) 부드럽고 따스한 만큼 친절하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는, 특히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시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께서 입문용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시 몇 편의 리뷰를 써 보자면, 먼저 <선잠>에 대해 쓰려 한다. '잠'이라는 말에 위로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종 '영영 떠나가 버린 사람'이라는 말이 한없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마치 운명에 이끌리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길로만 훌훌 떠나가 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기차역'이라는 말도, 장소도 정말 좋아한다. 그의 소멸은 화자에게는 비극이고 불안의 원인이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안도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말하는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은 간절하고도 아름답다.

<빛의 산>의 경우,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중간해서' 고민하거나 슬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나는 겨우 중간 정도밖에 안 된다거나, 나는 죽을 만큼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응급실에서 우선순위가 한없이 밀리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보는 풍경은 제각기 일상적이고도 평화로워 아름답다. 화자는 실패를 맞닥뜨리고 돌파구를 찾는다. 하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던지! 답을 찾아낼 때는 허망함이나 분함보다 오히려 안도감이 앞선다. 코로나로 위태로운 일상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무엇인지 이 시를 통해 되새길 수 있었다.

<역광의 세계>는 이 시에 나오는 인용구에 반해 단숨에 읽어낸 기억이 난다. 소설이나 논픽션 속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어찌나 허망한지. 레미제라블의 어린 혁명가들은 앙졸라스와 그랑테르, 바오렐과 가브로쉬, 그리고 에포닌을 제외하고는 고작 '죽었다'라는 단 한 줄로만 그 운명이 드러난다. 단조로운 서술은 그들의 죽음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비극을 극대화시킨다(영화 속에서는 혁명가들이 죽어 가며 흘린 피를 부모와 형제들이 직접 닦으며 슬퍼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화자는 그저 멀리서 책 속의 인물들을 관조하기를 택하나, 점차 등장인물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며, 결국에는 책 속에 파묻힌 운명을 받아들인다. 즉,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그들의 생존 혹은 죽음에 연민하고 슬퍼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를 보면, 안희연 시인은 슬픔을 천둥과 같이 날카롭고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 속에 묵묵히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슬픔의 본질은 참혹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차마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것, 혹은 흘린 눈물조차 전부 잊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는 '너'와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슬픔에 주저앉고 환경에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나 슬픔을 겪은 '너'와 '나'의 얼굴은 분명 달라져 있다. '너'와 '나'가 변한다면, 어쩌면 세상 또한 우리가 느낀 슬픔으로 인해 변화하고 울부짖게 될 것이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집은 맑고 청초해 보이는 표지와는 달리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온통 아우르고 있다. 시인은 현실을 직시할 것을 끝없이 강조하나, 그럼에도 따스한 위로와 시선을 건네는 걸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지금 처한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희망을 여전히 노래하는 시집이 곧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2022년 11월, 우리는 지금 수없이 많은 절망과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시집을 읽고 희망을 얻어가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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