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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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품는 호의, 애정, 동경, 질투, 그리고 미워함(미워함은 '싫어함'과는 달리 순수한 증오만을 품을 수 없다)과 같은 마음은 순수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호기심은 아슬아슬한 선 위를 걷는, 그럼에도 마음대로 걸음을 멈출 수 없는 마음이다. 이는 상대로 하여금 경계 혹은 약간의 두려움을 품게 하거나, 상대가 마찬가지로 애정을 되돌려 줄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김화진 작가의 <나주에 대하여>는(비록 2022년에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이슈가 소재로 종종 등장하지만) 표지의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단정한 뒷모습을 마주하는 것처럼 같은 반 친구의 뒷모습을 몇 초간 바라볼 때의 마음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조금은 모났기에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새 이야기>는 빈티지 옷가게에서 열린 상영회를 통해 만난 '천희'에게 '나'가 호감을 갖게 되고, 그 마음을 정리하고, 이윽고 천희를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다. 힙한 가게와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직장인들 간의 대화가 교차되어 이어지는 반면, '파'는 나에게 말을 걸고 천희는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친구들을 위해 도움을 준다.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라는 말과 같이, '나'는 천희와 웹툰을 향한 짝사랑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등장인물과의 '작별'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중간에 멈춰버린 시리즈처럼.

조용하고 독특한 천희의 천성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럼에도 '나'는 천희에게 성큼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천희와의 관계를, 즉 천희에게 대책없이 빠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의 소망은 결국 반 년만에 끝을 맺는다. 천희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느닷없이 '어디론가' 떠나간다. 자신을 닮은, 묵묵한 청자인 '파 화분'을 두고서.

'나'는 청자에게 털어놓는다. 사실 천희의 '떠나감'은 자신을 안도하게끔 만들었다고. 이미 끝난 마음은 언제든 꺼내보고 다시 접어 마음 한 켠에 넣어둘 수 있다. 하지만 천희에 대한 그리움과 '파'를 넣은 매운 음식을 매일 밤 먹은 '나'는 크게 탈이 나고, 웹툰 연재도, 매운 야식도, 그리고 마음을 펼쳐둔 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것도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신 '나'는 천희를 떠나보낸다. 기쁨을 채 숨기지 못한 얼굴을 그리면서.

표제작인 <나주에 대하여>는 출판사 마케팅부 후배인 '나주'를 관찰한 이야기이다. 거래처 상대의 구시대적인 말을 웃어넘기는 대신 '외모 지적'이라고 대꾸하면서도 '성희롱'이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하나 여전히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듯한 나주의 입체적인 면모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낸다. 점심 시간에 수영을 시작한 나주의 면모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말하는 '갓생'을 살고자 하는(김화진 작가가 편집자로 근무하는 민음사 유튜브 채널에는 '갓생살기 프로젝트'라는 컨텐츠가 있다)현대인의 성실함과 고단함이 뒤섞여 있다.

이때 나주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은 변함이 없으나, 나주가 '나'의 애인의 전 여자친구였음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애인인 '규희'가 사망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나주의 sns를 몰래 들여다보면서, 규희의 흔적을 찾으면서 '나'는 나주에게 끝내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나주와는 달리 한 걸음 떨어져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고자 한 '나'는 결국 나주에 대한 복잡한 마음, 그리고 규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직면하기로 결심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나'의 '다가감'이 두 사람 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고는 아무도 확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갈 용기를 얻었고, 이를 행하였다. 조금은 이기적이게도.

<꿈과 요리>는 '스물 아홉'이라는 나이에('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에서는 스물 아홉은 꿈만 꾸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정의했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언과 솔지가 등장한다. 수언과 솔지는 영화를 사랑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하고 애정 어리다고 말하기 힘들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언은 솔지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수언은 솔지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를 '드러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솔지 앞에서 수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고 느낀다. 반면 솔지는 자신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수언에게 호감과 '벅차오름'을 느끼지만, 항상 영화와 수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거절당한다고 느낀다.

솔지의 '요리'를 먹으면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은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수언은 솔지의 꿈을 '허세'라 칭하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불쾌하게 여긴다. 이는 어쩌면 현실을 지키는 데 급급한 게 한없이 부끄러운 수언의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스물 아홉의 끝자락, 막상 영화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건 수언이었다. 이 순간, 솔지는 자신의 오만함을 수언에게 들키고 말고, 이는 수언의 자격지심을 터뜨리는 계기가 된다. 스물 넷이 되어서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스물 아홉까지 서로의 속마음조차 알지 못했던 둘은 그제서야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두 사람이 싸우는 날에는 크림파스타와 감바스를 먹고, 화해하는 날에는 연어덮밥을 먹는다. 화려하지만 속내를 감춘 요리와 보다 소박하지만 가장 자신이 있는 요리. 솔지는 꿈을 내려놓고, 수언은 꿈과 이에 대한 애정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침묵의 사자>는 이별에 서툰 '나'가 갑작스럽게, 그리고 비밀스럽게 찾아온 사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타인에 대한 시선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려낸 단편이기도 하다. 친구 '지은'의 이혼으로 인한 상처보다 친구의 이민으로 느낄 자신의 외로움이 우선이었던, 남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입장이었던 '나'는 오히려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는(이해해주는 상대가 부재하는) 입장에 처한다. '나'는 문학상을 수상해 소설가가 되지만, 책에는 이상한 내용의 악플이 드문드문 달리기 시작한다. 손에 식은땀이 날 만큼 초조한 마음으로 마주한 악플을 단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머무르는 사람이고, (당연하게도)김이 빠질 만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이때 '나'는 마주하기 전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타인을 마주한 이후 지은과 사자를 찾는다. 지은은 함께 웃어 주고, 사자는 영국에 머무르는 지은 대신 '나'의 등을 쓸어 준다. 신경안정제나 항불안제, 항우울제와 같은 약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것도 2022년에 다다른 우리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압박감은 방울토마토에서 복숭아만한 크기로, 다시 복숭아에서 방울토마토 정도로 커졌다 작아지며 '나'는 성장한다.

나 역시 인터넷에서 무척 멋진 글을 쓰시던 분의 sns를 꾸준히 찾아간 적이 있었고(부끄러워서 팔로우를 하지는 못했지만, 무척 팬이라고 익명으로 팬레터를 몇 번 남길 수는 있었다), 그분께서 좋아하시던 소설과 시를 따라 읽었다. 덕분에 나는 한나 아렌트와 허수경 시인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화진 작가님의 <나주에 대하여>는 타인에 대해 품는 개인의 미시적이고 독특한 감정을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파와 새, 비, 회원권, 음식과 눈물, 입맞춤, 그리고 사자까지. 호기심과 애착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경계선'이 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견고히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감히 다시 한 번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살아간다. 아직 용기가 부족해 못본 척 슬쩍 눈을 돌려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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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7 - 슈만·브람스, 열정 어린 환상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7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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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딜레마를 겪을 것이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클래식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클래식 작곡가 중에서는 차이코프스키를 가장 좋아하고 그가 작곡한 곡을 열 개 정도 말할 수는 있지만(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eugene onegin op.24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웠을 때는 쇼팽의 에튀드는 어렵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웠고(어렸을 때는 그가 작곡한 mazurka bb major op. 7-1를 치는 걸 가장 좋아했다), 이상하게 모차르트보다 바흐의 푸가를 잘 쳤던 기억이 난다.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특히 낭만주의 시대를 살아간 음악가인 슈만과 브람스를 다룬 7권은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를 사랑하는 나에게 클래식을 알아갈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선사해주었다.

우리는 아마 슈만의 음악은 트로이메라이traumerei를 통해 접해봤을 것이다. 브람스의 경우,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s no.5 in g minor 혹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로 알려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통해서(실제로 그 작품이 쓰여졌을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두 사람은 슈만과 브람스, 그리고 슈만의 아내이자 또 다른 음악가였던 클라라를 둘러싼 우정과 사랑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인터뷰 형식을 빌려온 이 책으로 이해하기 쉽게 초보자에게 선사되며, 음악을 감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큐알코드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두 사람의 생애와 성향, 음악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기에 이 책은 더없이 친절하고 좋다. 이 시리즈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클래식을 처음 접하거나 본격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하기 위한 초보자를 위한 배려심이 담뿍 묻어나온다. 두꺼운 페이지가 자칫 독자를 주춤거리게 만들지는 몰라도, 텍스트 크기가 크고 사진자료와 편지, 그리고 일러스트와 큐알코드 등 다채로운 자료가 담겨있기 때문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책은 낭만주의 음악 외에도 배경 지식이 될 수 있는 '낭만주의'를 친절한 시각으로 다루고 소개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줄거리와 제목의 해석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우리가 이미 알 법한 그림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등을 제시하면서 낭만주의의 명암과 모순을 설명한다. 또한, 낭만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를 소개하기 앞서 한 명의 음악가를 더 소개한다. 바로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는 '낭만주의를 연 음악가' 로 책에 소개된다(슈베르트의 마왕erlkonig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책에서는 슈베르트가 쓴 가곡을 설명하면서 '장3도' '단3도'와 같은 개념과 괴테와 하이네와 같은 서정시인도 함께 소개한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대화가 발랄하고도 아름다운 언어로(때로는 지은이인 민은기 교수의 말로, 때로는 가사나 음악가가 남긴 말로)펼쳐진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본격적으로 슈만의 얘기로 들어서면서 책은 슈만의 일생을 자세히 다루면서, 그가 가진 음악의 열정 및 괴로움, 그리고 우울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이 책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는, 코드를 이용한 말장난을 자세히 상술하기도 한다. 뒤이어 슈만과 클라라의 낭만적이고, 어찌 보면 애타는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고(예스러운 말씨는 왜 그토록 간절하고 아름다운지!), 슈만의 슬픔과 괴로움이 뒤따른다. 이 무렵, 막 청년이 된 브람스가 무대 위로 등장하게 된다.

한 명의 청년이 존경하던 음악가를 만나 극찬을 받는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벅차오르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브람스는 슈만의 인정을 받고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반면, 슈만은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몸이 쇠약해진 슈만을 대신해 브람스는 가정을 지키고 레슨을 시작한 클라라를 돌보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브람스는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다(저자는 브람스가 클라라를 향한 마음을 '이상'으로 남겨두었다고 말한다). 클라라는 연주자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나 여러 고민에 부딪치게 되고, 브람스는 클라라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이때, 브람스는 성공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이끌어 줄 슈만이 부재하게 된 상황에서 고민하던 그는 바흐를 롤모델로 삼아 음악만을 바라보며 고독하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슈만 사후 브람스는 클라라를 떠나 바흐와 같이 대위법을 공부하고 캐논, 푸가와 같은 바로크 양식의 곡을 쓰기 시작하고, 베토벤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한다.

브람스는 이후에도 독특한 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으로부터 멀어진 '실내악'이라는 장르에 도전하고, 심지어 전통적인 실내악인 '현악 4중주'가 아닌 피아노, 혹은 호른을 포함한 다른 구성으로 곡을 쓴다. 브람스는 곧이어 성공을 거둬 수많은 합창곡을 써 내기도 하고, <교향곡 1번> op.68과 <교향곡 2번> op.73은 그에게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 책은 브람스의 상반된 두 곡인 <대학 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에 대해 서술하면서 현대 음악사에서 뺄 수 없는 두 지휘자인 번스타인과 카라얀을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말년의 브람스를 설명하면서 이 책은 브람스의 특징을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라 말한다. 브람스는 과거의 양식을 빌려와 오히려 파격을 선사하는 작곡가이다. 브람스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에 매료되어 은퇴를 번복하는 등 '파격'을 사랑하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슈만과 브람스를 각각 '문학적인 음악가'와 '보수적인 개척자'라 칭했다. 두 사람의 인생과 인연과 곡은 낭만과 슬픔으로 얽혀 있는 듯 하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음악가를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안는다. 이 책은 낭만주의의 아름다움과 그 뒤에 얽힌 슬픔, 그리고 작곡가들이 부딪친 삶을 세세히 그려내면서도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핵심 독자층을 위한 배려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악보와 코드, 그리고 악기가 소리를 내는 구조까지 섬세히 그려내는 이 책을 보면 누구라도 클라라를 포함한 세 음악가에게(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멘델스존, 슈베르트와 같은 조연들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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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닛
매기 오패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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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닛은 열한 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닛'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햄닛의 죽음을 맞이한 4년 후, 셰익스피어는 죽은 아들의 이름을 빌려온 연극 <햄릿>을 발표한다. 이 먹먹한 소설은 한 아이가 겪은 죽음으로부터의 사투가 어떻게 한 가족의 삶을 뒤흔드는지, 그리고 각자 이를 어떻게 애도하고 '뚫고 나가고자' 하는지를 담담하게, 마치 울음을 꾹 눌러 참는 것 같은 문체로 서술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젊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아버지(그의 이름 역시 햄릿이다)의 혼령을 발견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반면 매기 오패럴의 <햄닛>은 아그네스와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닛'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삶의 주도권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화자이자 햄닛의 어머니 아그네스에게 햄닛은 뜻밖의 존재가 된다. 아그네스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생'을 선택하여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첫 아이인 수재나의 출산을 집 밖에서 홀로 견뎌낸 아그네스는 쌍둥이를 집 안에서 낳아야만 했고, 쌍둥이 누나인 주디스의 출산을 마무리했다고 여겼을 때 햄닛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두꺼비를 질색하던 아그네스는 햄닛의 생존을 위해 모든 민간요법에 매달린다. 그리고 역병이 돌아 죽어가는 주디스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 아그네스는 쌍둥이 누나와 함께 누워 병이 옮아버린 햄닛은 미처 살려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된다.

'아그네스'와 '그(셰익스피어라 칭하겠다)'는 애도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할 의무가 있으나, 아그네스는 집에 머물러 아이들과 남은 햄닛의 흔적을 돌보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가정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와 극단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가야만 한다. 아니, 떠나가기를 선택한다. 대문호가 된 셰익스피어는 성공을 거두고 집에 부를 가져다주나, 아그네스는 아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셰익스피어를 원망하고, 그의 '런던으로의 도피'를 아그네스는 경멸한다. 단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가족은 그의 성공으로 커다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나, 오히려 아그네스가 '숨을 쉴 수 있는 장소'는 집 안이 아닌 뒷마당이다. 소설의 화자인 아그네스에게 이와 같은 태도는 '외면'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나를 잊지 마.

하지만, 맨 마지막 챕터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관람하는 아그네스는 셰익스피어의 애도를 홀로 '알아차리게' 된다. 주인공인 왕자 '햄릿'은 '햄닛'의 버릇(아직 어린아이의 햄닛의 버릇은 가족이 아니면 그토록 자세히 알 수 없을 것이다)과 외양을 꼭 빼닮은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에서 '햄닛'은 자라서 어엿한 청년이 된다. 반면, '햄닛'의 아버지인 선대 왕, 즉 셰익스피어를 투영한 '유령'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존재가 된다. <햄닛>에서 셰익스피어는 한순간이나마 유령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어린 아들을 되살리고자 간절히 소망한다. 아그네스는 그 장면을 목격한 뒤에서야 셰익스피어의 애도를 목격하고 이해하게 된다. 유령은 '햄닛'을 대신해 청한다. '자신과 자신의 죽음을 잊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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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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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늘 책을 읽는 버릇이 있는데, 유독 힘든 시험을 견뎌냈을 때는(요즘은) 항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다.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출판사별로 비교해가면서 읽고 있다(나는 민음사 버전을 가지고 있고, 책등이 채 바이올렛으로 통일되기 이전의 것을 갖고 있다 - 오히려 구분이 쉬워 편리하다). 나는 모교의 중앙도서관에서 주로 책을 빌리는데,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의 책들(한 권으로 끝나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은 꼭 상, 중, 하 중 한 권이 대출 중이라 바짝 약이 오른 채로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수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책들은 난이도가 높고 그 분량이 방대하다고 알려져 있어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만큼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는 ‘하나의 장르’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종이에 글씨를 긁어 새기면 글이 되고, 모양을 긁어놓으면 그림이 된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마음을 긁어놓은 그림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도스토옙스키를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격동기였던 당대의 러시아와 도스토옙스키의 생애, 종교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아마 그가 빅토르 위고처럼 사설을 자신의 문학에 포함시켰더라면, 그 분량은 세 권에서 열 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당대 러시아는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성과 속이 복합된 사회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이라는 직관적인 이미지와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취향과 그의 가치관을 섬세하게 서술한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은 나처럼 도스토옙스키를 대부분, 혹은 전부 읽은 그 장르의 팬에게도, 혹은 러시아 문학과 도스토옙스키를 접하고 싶으나 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완벽하게 적합한 책이다. 소제목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이 책은 꽃잎처럼 보드라운 문체와 표현으로 영감을 준 그림을 묘사하고 해석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내면을 면밀히 파악하여 소개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아이들이 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주인공 알료샤가 작품 속에서 ‘그리스도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장면도 있는데, 여기서 신의 왕국이란 인류가 어린아이같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세계를 뜻한다.

이 책에서 맨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다. 그의 소설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묘사되는 인물은 순진하고 앳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성스러운 존재임을 묘사하기 위해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종종 사용된다(대표적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와는 알료샤가 그러한 인간상에 속한다). 저자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아이였을 적 가졌던 무언가 소중한 가치를 잃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고결함과 순수함을 망각하지 않고 자라난 도스토옙스키의 캐릭터들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고통은 도스토옙스키의 최대 관심사다. 그의 문학은 고통을 관리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고통, 분노, 슬픔과 같은 것은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뭉치로 따라다닌다.

"고통을 거치지 않고는 행복을 알 수 없다. 황금이 불로 정제되는 것처럼 이상도 고통을 거침으로써 순화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어둠은 인간의 고통을 상징하고, 빛은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온갖 종류의 고통받는 인물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다. '아름다운 색은 빛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고통(고난)없이는 구원도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 중 내가 가장 사랑한 작품은 예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연약한 모습을 그린 것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와 <세 개의 십자가>가 그러하다. 작품에서 인류를 위한 예수의 고통은 프레스코화를 통해, 혹은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를 통해 가감없이 드러난다. 저자의 말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최대의 관심사는 고통이다. 그 예시로,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는 도덕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의 우월성과 신념을 믿고 살인을 저지른 후 죄책감과 고통에 휩싸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신념과 소냐의 굳은 신앙과 사랑을 비교하며 라스콜니코프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통과의례'를 완전히 거치고 구원을 얻게 된다. 어쩌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또한 소년 일류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인류에 대한 알료샤의 사랑을 부각시키면서 끝을 맺는다.

회개를 뜻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으로는 '니캄(뉘우치다)'와 '슈브(돌아서다)'가 있고, 신약성경 표현으로는 '메타노이아(마음의 변화)'와 '에피스트로페(행동의 변화)'가 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게, 절대로 두려워 말게, 괴로워하지도 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기독교적 요소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202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할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거쳐 온 일종의 '구원'이었던 성경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가 소설에서 왜 그토록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등장하였는지(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가장 위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색채를 제외하더라도, 속죄와 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마치 조시마 장로의 조언처럼 말이다.

<공전>이 묘사한 장면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이라고 띄워주면서, 그에게 올가미에 씌우려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공전>이 묘사한 <마가복음> 12장 17절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와 함께,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돈'이 끊임없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 '생계형 작가'였다. 그 예시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등장인물들은 3천 루블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사건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장남 드미트리는 삼천 루블을 결과적으로 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인 표도르로부터 삼천 루블을 받아낼 생각이 있었다는 점과 자신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는 점 때문에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이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러시아인을 이해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도 러시아 국민을 잘 모르는데, 남들이 러시아인을 안다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면 난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왔다."

심지어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당대 러시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도스통옙스키가 써 나간 문학작품 속에서 슬쩍 엿볼 기회를 얻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는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을 그림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인 페로프가 그려낸 도스토옙스키는 다소 신경질적이고 홀로 고뇌에 빠진, 즉 그의 영혼을 가감없이 드러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때 페로프라는 작가는 '어린아이'와 '고통'이라는 소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와 그 결이 같으며, <트로이카>라는 작품에서는 심지어 어린아이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그려냈으면서도 마치 도스토옙스키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다.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아름다움은 성과 속으로 구분된다. 그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각각 논하면서, 결국에는 후자가 전자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소유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는 영적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화려한 미인이나, 강력한 권력을 소유했거나 머리가 뛰어난 사람보다 고결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을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이상향으로 삼았다.

1867년 8월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와 함께 바젤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시인 카람진의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를 통해 이 그림을 알고 있었다. 참혹한 고통을 당한 뒤 썩도록 방치된 예수그리스도의 시신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그에 비해 라틴어로 점을 이해하는 푼크툼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함을 의미하는 미세한 상처의 찌르기이다. 사진의 세부적인 구성 요소 등을 통해 감상자의 뇌리에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 바로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푼크툼은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을 도리어 전복하면서 감상자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가 있다.

나 또한 이 그림을 사랑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푼크툼'을 느낀 이 그림에서는 일반적으로 엄숙하고 성숙하게 그려진 죽음 이후의 예수의 모습과는 달리,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에서는 비참하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이 잔뜩 눌린 채 관 속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수가 참혹한 몰골로 등장한 이유를 저자는 예수는 인간의 죄를 떠안고 죽어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죄인인 인간의 모습은 엄숙하거나 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예수는 구원자가 아닌 무력하기 짝이 없는 희생자이자 인간으로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인물의 외모나 등장하는 그림은 미적인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등장인물의 운명이나 사상, 심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심미안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미술 작품과 문학작품을 밀접하게 연관지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 아닐까?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1분 1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분 1초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1860년대를 풍미한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무신론적 유물론, 허무주의 등은 사람들의 영혼을 혼미하게 하여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방황하도록 만드는 이념의 악령에 불과하며, 이 악령에서 벗어나야 러시아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소설의 메세지다.

아직 언급되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두 작품 <백치>와 <악령>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백치>에 대해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죽음의 목전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는 작가다. 이는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실제 경험담을 서술하면서 상세히 드러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그에게 되돌아온다. 인간은 결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에 대해 얘기하자면,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고 남성들의 이상향이 되는, 그야말로 '태양'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가 휩싸여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닌 환영, 즉 꿈이었음이 드러난다. 끔찍한 범죄로 뒤엉킨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그는 파멸하여 자신의 죄를 읊게 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황금시대, 즉 유토피아의 허망함을 폭로한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들고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시었다. 지금까지 내 발에 그것이 있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인간에게 유형이란 구속은 지옥이지만, 해방과 함께 자유의 가치를 일깨우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비평가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그림은 화가 야코비의 <죄수들의 휴식>일 것이다. 자신 또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간 적이 있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의 현실성을 극찬하나 자신의 경험에 그림을 빗대어 잘못 고증된 부분을 짚어내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야코비의 그림은 '예술성이 부재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예술가에게는 사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드러낼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베리아 유형에 대한 경험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등장하는 드미트리의 운명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표도르를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받아들인다.

도스토옙스키가 미술평론가로서 쓴 글들은 <작가 일기>에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아쉽게도 아직 접해본 적은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작품의 현실성을 추구할 것과 동시에 대상이 함축적으로 가지는 의미를 드러낼 것을, 즉 '고차원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의 관점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림을 볼 때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장 중요시했다. 서평단에 당첨되어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하였던 그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섬세히 해설해주시고 그림과 연관지어 설명해주신 러시아문학자 조주관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팬이시라면 이 책을 반드시 권해 드리고 싶을 만큼 페이지를 넘기는 모든 순간이 즐겁고 유익했다. 도스토옙스키에 도전할 생각이 있으신 분들, 그리고 세계문학전집(어느 출판사의 것이든!)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도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분량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 책의 좋은 점을 전부 적지 못했다는 점이 마냥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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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의 공식 - 욕하면서 끌리는 마성의 악당 만들기 어차피 작품은 캐릭터다 1
사샤 블랙 지음, 정지현 옮김 / 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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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어딘가 검게 비틀린 구석이 있는 빌런 캐릭터를 어쩌면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슈퍼히어로보다 훨씬 좋아해 왔다. 특히 슈퍼히어로가 넘쳐나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스터즈>의 한스 란다(나치즘은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 되지만 - 나는 당연히 쇼샤나의 편이다 - , 극 중의 모든 인물을 '가지고 노는' 도구로 쓰이는 그의 언어 감각은 정말이지 천재적이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모든 <셜록 홈즈> 시리즈의 모리어티, <어벤져스>의 로키와 같은 매력적인 빌런에 끌리기 마련이다. 빌런과 히어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안타고니스트와 안티히어로에 대한 챕터 또한 존재한다. <처음 만나는 자유>의 수잔나는 이 책에서 안티히어로로 분류된다. 아마도 사랑해 마지않는 <와호장룡>의 소룡은 안타고니스트에 가까울 것이다.

작법서인 만큼, 이 책은 빌런 캐릭터를 어떻게 단순한 클리셰(검고 우아한 옷을 입고, 시가를 피면서 고운 털을 가진 페르시아 고양이를 무릎 위에서 쓰다듬는 남성)에서 벗어나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촘촘하게 짜인 스토리에 녹아든 캐릭터로 만들 것인지 유쾌하고 밝은 문체로 - 책의 표지와 강조하는 데 쓰인 초록색 글씨는 꼭 코믹스를 연상시킨다 - , 그러나 세심하고 상세히 조언한다. 또한, 소설을 쓸 때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갈등과 같은 공식이나 트롭trope처럼 알아야 하는 용어를 설명해 주어 초보 창작자인 나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 예시로 나온 빌런과 히어로는 우리가 한 번쯤은 접해봤을 만한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아마 공포영화를 싫어한다면 몇몇 캐릭터는 제외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자면 매트릭스의 네오neo가 있다. 매트릭스 1편은 1999년작이지만, 여전히 네오의 존재감은 작년에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나왔을 정도로(정말, 정말 재밌었다!) 선명하고, 우리는 아직도 장난삼아 허리를 뒤로 젖히는 장난을 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캐릭터로 히어로인 토르와 빌런인 로키 형제가 있을 것이다. 마블 시리즈를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토르 시리즈부터 어벤져스 시리즈를 거쳐 지금의 토르 4까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이 형제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빌런인 로키의 팬인 점도 재미있다). 이 책은 마치 훌륭한 빌런이 나오는 명작만을 추천하는 아카이브 같기도 하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츠만(책에서는 표기가 다른 것으로 기억한다)도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빌런이다 (지금은 특유의 강박적인 모닝 루틴이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 패러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명함 장면'을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저자 사샤 블랙의 조언과 설명은 체계적이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간결하며 쉽다. 사샤 블랙은 심지어 도표를 이용하여 '반영웅'의 범주를 설명하기도 하고, 챕터의 마지막 장마다 자신의 요지를 요약해서 정리해놓을 정도로 빌런 캐릭터를, 그리고 새로운 창작자들을 진심으로 아낀다. '프로타고니스트'이자 '빌런'인, 보다 복잡한 경우를 설명할 경우 저자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를 비교하여 정확히 정의를 내릴 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은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이다(이 작품의 경우, 히어로는 클라리스 스털링 요원이 된다). 또한 빌런은 어쩔 수 없이 현대 사회와 엮여서 설명될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 점을 예리하게 꼬집으며 사회의 기준은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가 그 인물을 결정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저자 사샤 블랙의 빌런과 신인 작가들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남다르다. 그는 포스트잇으로 계속해서 메모를 할 것을 강조하고 끊임없이 주의깊게 책을 읽어내려가도록 우리를 독려하여 창작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는 대표적인 예시로 토르와 로키를 설명하며 두 인물이 왕좌를 원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또한,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개하며 캐퓰릿 가문과 몬태규 가문 사이의 증오 자체를 빌런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빌런은 '무형'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 이 책의 제일 큰 장점은 '정신 질환'을 가진 빌런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신 질환을 가진 빌런을 분류해 소개하되, 작가는 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 다룰 것과 충분한 자료 조사를 거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를 통해 세상을 존중하면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하여 배울 수 있었다.

사샤 블랙은 다양한 엔딩 또한 다루고 있다. 해피엔딩, 열린 결말, 행복하지만은 않은 수많은 결말 등에 관한 것이다. 그는 클리셰에 최대한 빠지지 않는 방법을 찾는 동시에 어째서 예시의 저자가 그러한 결말을 선택했는지를 빌런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의 시각으로 책을 바라볼 수 있다니, 너무나도 흥미롭지 않은가?

이 책을 접할 때 '작법서'라는 장르에 두려워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창작자이든 아니든, 히어로보다 빌런을 좋아하고 유쾌한 문체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권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빌런 캐릭터들과 반갑게 조우하는 자리가 될 테니 말이다. 빌런에 관심이 있다면, 선보다 '악'을 다루는 장르나 관점을 좋아한다면 분명 이 책을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게 서평단에 당첨되어 <빌런의 공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다. 즐겁고 유익한 책을 보내주신 윌북 출판사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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