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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나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늘 책을 읽는 버릇이 있는데, 유독 힘든 시험을 견뎌냈을 때는(요즘은) 항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다.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출판사별로 비교해가면서 읽고 있다(나는 민음사 버전을 가지고 있고, 책등이 채 바이올렛으로 통일되기 이전의 것을 갖고 있다 - 오히려 구분이 쉬워 편리하다). 나는 모교의 중앙도서관에서 주로 책을 빌리는데,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의 책들(한 권으로 끝나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은 꼭 상, 중, 하 중 한 권이 대출 중이라 바짝 약이 오른 채로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수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책들은 난이도가 높고 그 분량이 방대하다고 알려져 있어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만큼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는 ‘하나의 장르’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종이에 글씨를 긁어 새기면 글이 되고, 모양을 긁어놓으면 그림이 된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마음을 긁어놓은 그림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도스토옙스키를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격동기였던 당대의 러시아와 도스토옙스키의 생애, 종교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아마 그가 빅토르 위고처럼 사설을 자신의 문학에 포함시켰더라면, 그 분량은 세 권에서 열 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당대 러시아는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성과 속이 복합된 사회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이라는 직관적인 이미지와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취향과 그의 가치관을 섬세하게 서술한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은 나처럼 도스토옙스키를 대부분, 혹은 전부 읽은 그 장르의 팬에게도, 혹은 러시아 문학과 도스토옙스키를 접하고 싶으나 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완벽하게 적합한 책이다. 소제목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이 책은 꽃잎처럼 보드라운 문체와 표현으로 영감을 준 그림을 묘사하고 해석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내면을 면밀히 파악하여 소개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아이들이 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주인공 알료샤가 작품 속에서 ‘그리스도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장면도 있는데, 여기서 신의 왕국이란 인류가 어린아이같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세계를 뜻한다.
이 책에서 맨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다. 그의 소설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묘사되는 인물은 순진하고 앳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성스러운 존재임을 묘사하기 위해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종종 사용된다(대표적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와는 알료샤가 그러한 인간상에 속한다). 저자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아이였을 적 가졌던 무언가 소중한 가치를 잃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고결함과 순수함을 망각하지 않고 자라난 도스토옙스키의 캐릭터들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고통은 도스토옙스키의 최대 관심사다. 그의 문학은 고통을 관리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고통, 분노, 슬픔과 같은 것은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뭉치로 따라다닌다.
"고통을 거치지 않고는 행복을 알 수 없다. 황금이 불로 정제되는 것처럼 이상도 고통을 거침으로써 순화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어둠은 인간의 고통을 상징하고, 빛은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온갖 종류의 고통받는 인물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다. '아름다운 색은 빛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고통(고난)없이는 구원도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 중 내가 가장 사랑한 작품은 예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연약한 모습을 그린 것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와 <세 개의 십자가>가 그러하다. 작품에서 인류를 위한 예수의 고통은 프레스코화를 통해, 혹은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를 통해 가감없이 드러난다. 저자의 말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최대의 관심사는 고통이다. 그 예시로,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는 도덕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의 우월성과 신념을 믿고 살인을 저지른 후 죄책감과 고통에 휩싸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신념과 소냐의 굳은 신앙과 사랑을 비교하며 라스콜니코프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통과의례'를 완전히 거치고 구원을 얻게 된다. 어쩌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또한 소년 일류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인류에 대한 알료샤의 사랑을 부각시키면서 끝을 맺는다.
회개를 뜻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으로는 '니캄(뉘우치다)'와 '슈브(돌아서다)'가 있고, 신약성경 표현으로는 '메타노이아(마음의 변화)'와 '에피스트로페(행동의 변화)'가 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게, 절대로 두려워 말게, 괴로워하지도 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기독교적 요소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202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할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거쳐 온 일종의 '구원'이었던 성경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가 소설에서 왜 그토록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등장하였는지(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가장 위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색채를 제외하더라도, 속죄와 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마치 조시마 장로의 조언처럼 말이다.
<공전>이 묘사한 장면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이라고 띄워주면서, 그에게 올가미에 씌우려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공전>이 묘사한 <마가복음> 12장 17절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와 함께,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돈'이 끊임없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 '생계형 작가'였다. 그 예시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등장인물들은 3천 루블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사건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장남 드미트리는 삼천 루블을 결과적으로 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인 표도르로부터 삼천 루블을 받아낼 생각이 있었다는 점과 자신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는 점 때문에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이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러시아인을 이해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도 러시아 국민을 잘 모르는데, 남들이 러시아인을 안다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면 난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왔다."
심지어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당대 러시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도스통옙스키가 써 나간 문학작품 속에서 슬쩍 엿볼 기회를 얻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는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을 그림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인 페로프가 그려낸 도스토옙스키는 다소 신경질적이고 홀로 고뇌에 빠진, 즉 그의 영혼을 가감없이 드러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때 페로프라는 작가는 '어린아이'와 '고통'이라는 소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와 그 결이 같으며, <트로이카>라는 작품에서는 심지어 어린아이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그려냈으면서도 마치 도스토옙스키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다.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아름다움은 성과 속으로 구분된다. 그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각각 논하면서, 결국에는 후자가 전자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소유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는 영적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화려한 미인이나, 강력한 권력을 소유했거나 머리가 뛰어난 사람보다 고결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을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이상향으로 삼았다.
1867년 8월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와 함께 바젤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시인 카람진의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를 통해 이 그림을 알고 있었다. 참혹한 고통을 당한 뒤 썩도록 방치된 예수그리스도의 시신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그에 비해 라틴어로 점을 이해하는 푼크툼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함을 의미하는 미세한 상처의 찌르기이다. 사진의 세부적인 구성 요소 등을 통해 감상자의 뇌리에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 바로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푼크툼은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을 도리어 전복하면서 감상자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가 있다.
나 또한 이 그림을 사랑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푼크툼'을 느낀 이 그림에서는 일반적으로 엄숙하고 성숙하게 그려진 죽음 이후의 예수의 모습과는 달리,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에서는 비참하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이 잔뜩 눌린 채 관 속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수가 참혹한 몰골로 등장한 이유를 저자는 예수는 인간의 죄를 떠안고 죽어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죄인인 인간의 모습은 엄숙하거나 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예수는 구원자가 아닌 무력하기 짝이 없는 희생자이자 인간으로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인물의 외모나 등장하는 그림은 미적인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등장인물의 운명이나 사상, 심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심미안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미술 작품과 문학작품을 밀접하게 연관지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 아닐까?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1분 1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분 1초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1860년대를 풍미한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무신론적 유물론, 허무주의 등은 사람들의 영혼을 혼미하게 하여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방황하도록 만드는 이념의 악령에 불과하며, 이 악령에서 벗어나야 러시아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소설의 메세지다.
아직 언급되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두 작품 <백치>와 <악령>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백치>에 대해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죽음의 목전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는 작가다. 이는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실제 경험담을 서술하면서 상세히 드러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그에게 되돌아온다. 인간은 결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에 대해 얘기하자면,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고 남성들의 이상향이 되는, 그야말로 '태양'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가 휩싸여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닌 환영, 즉 꿈이었음이 드러난다. 끔찍한 범죄로 뒤엉킨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그는 파멸하여 자신의 죄를 읊게 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황금시대, 즉 유토피아의 허망함을 폭로한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들고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시었다. 지금까지 내 발에 그것이 있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인간에게 유형이란 구속은 지옥이지만, 해방과 함께 자유의 가치를 일깨우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비평가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그림은 화가 야코비의 <죄수들의 휴식>일 것이다. 자신 또한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간 적이 있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의 현실성을 극찬하나 자신의 경험에 그림을 빗대어 잘못 고증된 부분을 짚어내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야코비의 그림은 '예술성이 부재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예술가에게는 사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드러낼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베리아 유형에 대한 경험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등장하는 드미트리의 운명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표도르를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받아들인다.
도스토옙스키가 미술평론가로서 쓴 글들은 <작가 일기>에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아쉽게도 아직 접해본 적은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작품의 현실성을 추구할 것과 동시에 대상이 함축적으로 가지는 의미를 드러낼 것을, 즉 '고차원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의 관점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림을 볼 때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장 중요시했다. 서평단에 당첨되어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하였던 그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섬세히 해설해주시고 그림과 연관지어 설명해주신 러시아문학자 조주관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팬이시라면 이 책을 반드시 권해 드리고 싶을 만큼 페이지를 넘기는 모든 순간이 즐겁고 유익했다. 도스토옙스키에 도전할 생각이 있으신 분들, 그리고 세계문학전집(어느 출판사의 것이든!)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도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분량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 책의 좋은 점을 전부 적지 못했다는 점이 마냥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