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쫓아오는 밤 (반양장) - 제3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4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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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스위치에서 진행하는 소설y클럽은 소설y시리즈의 책이 정식 출간되기 전 대본집 형태로 된 가제본을 미리 받아보고 여러 미션을 수행하는 이벤트이다. 그 중 소셜y클럽 5기는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을 수상한 최정원의 장편소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맞서 싸우며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카피와 #크리처물#성장#회복 이라는 키워드가 sf 장르의 팬이자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대본집'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책을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한없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의 주인공 '이서'는 누구보다 동생 '이지'를 아끼는,어쩌면 굉장히 모범적인 언니다. 어쩌면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서의 끝없는 사랑 중 일부가 일종의 부채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고, 이지의 존재는 가끔은 독이 되어 이서가 평범하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청소년이자 어린아이로 머물지 못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이전까지 이서는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아빠의 생존을 얘기하며 이지를 안심시키고,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선두에 선다. 작가가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모든 사태는 이서에게는 아직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다.

교과서에서 끊임없이 주입시킨 '정상 가족'에 속하지 않은 주인공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일은 나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나 또한 정상 가족 출신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가정에서 자라온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고 많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이 가진 차별점은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형태의 가족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감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아빠는 천식이 심한데도 무리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이서는 아빠와 엄마를 위해,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지를 위해 홀로 상처와 죄책감을 감춘 채 웃고 달린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참고 넘어가기엔, 상처와 혼란스러움을 떨쳐내기엔 아직 이서는 청소년일 뿐이다. 이서의 부족한 부분을 작가는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이서가 '성장하고 벗어날 수 있는' 어린 존재임을 최정원 작가는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수하의 성장 또한 그러하다. 자신이 좋아하던 축구는 어느새 자신을 옭아매는 밧줄이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돌아가는 길은 두렵고 버겁게만 느껴진다. 특히 수하의 고민은 청소년이 아닌 20대 독자도 충분히 공감하고 경험할 법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우리 또한 한 번 쯤은 원하던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여건상 돌아서야만 했던, 혹은 원치 않는 길에 끌려가야만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수하는 이서의 달리기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물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비록 수하에게는 그 감정이 축구를 향한 열망이었고, 이서에게는 죄책감을 떨쳐내려는 몸부림이라는 점이 상충되지만 말이다. 두 청소년은 각자의 문제로 끝없이 고민에 빠져들고 헤어나오지 못한다. '괴물'에 의한 모험을 겪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 소설은 청소년 성장 소설인 동시에 sf물과 크리처물의 발자취 또한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다. 다만 괴물의 존재는 명확히 등장하지 않는다. '악'의 존재 또한 정의된 바가 없다. 이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하다. 이서와 수하는 괴물의 존재를 파헤치는 연구원이 아니고, 다만 '괴물', 혹은 '그것'으로 형상화된 자신의 과거와 도망치거나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서는 끝내 자신을 희생해서, 즉 '속죄'를 통해 아빠를 되찾고 이지를 구해내려 한다. 그 순간 이서의 속마음은 소리친다. 자신도 살고 싶다고. 이서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쳐 달려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 이서의 엄청난 성장만큼, 수하 역시 훌쩍 자라났다. 그는 더 이상 축구와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축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최정원 작가의 말처럼, "긴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성장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크리처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는 두 청소년의 삶과 꿈에 대한 사랑을 경쾌하고 빠른 속도로 펼쳐나간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처럼 발랄한 이 소설은 '영어덜트' 장르에 속한 만큼분명 청소년에게 가장 적합하겠지만, 다른 층의 독자분들 역시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없는 성장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달라진 두 인물은 어떠한 방향으로 성장해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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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더스트 패밀리 안전가옥 오리지널 21
안세화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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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은 보통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미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사람은 각오를 단단히 해햐 한다. 불 같은 화와 부당한 원성을 견딜 줄 알아야 하고, 간절한 호소와 간곡한 부탁도 뿌리칠 줄 알아야 한다.

"원래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친 줄 몰라요. 여러분이 소동에 이용한 환자들은 모두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었잖아요. 사실은 여러분도 그들과 같아요."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조예은 작가가 쓴 <칵테일, 러브, 좀비>로 가장 잘 알려졌을 안전가옥은 우울하고도 희망적인, 환상이 펼쳐지는 세계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불쑥 튀어나오는, 기묘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선사한다. 나 역시 안전가옥의 오랜 팬인데, 운이 좋게도 <스타더스트 패밀리>의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었다. 안전가옥의 책을 접하고 싶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는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는 <칵테일, 러브, 좀비>와 <좀비즈 어웨이>를 가장 추천한다(지금은 <푸르게 빛나는>과 <영매 소녀>,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읽으려 한다).

가제본 서평단의 가장 큰 장점은 '완벽하게 탈고되기 이전 상태의 원고'를 접할 수 있다는 짜릿함일 것이다. 나는 아직 정식으로 출간된 책을 접하지 못한 <스타더스트 패밀리>의 경우, 가제본 속에 아주 약간의 여백이 남아 있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고 원본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주었다. 또한, 일부러 수정될 필요가 있는 문장을 제시하고 이를 고치는 형식으로 주요한 문구를 소개한 앞표지는 편집자를 꿈꾸는 나를 적잖이 설레게 만들었다. 특히, 인용문의 '미친 사람은 보통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문구는 사랑해 마지않는 소설인 조지프 헬러의 <캐치-22>를 떠올리게 한다(지금은 hulu에서 드라마로도 접할 수 있다!).

하늬를 포함한 배 씨 가족은 '국정원 스파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다는 이유로 몇 년 째 특수하게 설계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다. 하늬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성격을 가진 가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담과 무료함을 견뎌내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이 얻게 된(혹은 얻게 되었다고 믿은) 능력 역시 가족들의 성격을 빼닮았고, 그만큼 다양하다. 우연히 얻은 초능력을 들키게 된 배 씨 가족은 국정원에 의해 국가를 위해 능력을 사용할 것을 강요당하고, (이때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의 특징인 환상 속 지극히 현실적인 면모가 불쑥 튀어나온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어엿한 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국정원의 대우에 익숙해진 그들은 함정일지도 모르는 호의적인 태도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부서에게 배신당하고 능력을 잃어버린 채 망상증 환자로 오도되어 정신병원에서 눈을 뜬다. 정신병원 안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무렵의)랫치드 수간호사가 운영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평화롭고, 단조롭고, 기묘하다.

'우울한 남자'가 탈출의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배 씨 가족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파랑새를 그린 사람을 찾아나서면서, 하준이 자살 소동을 가짜로 벌여 기회를 잡으려 하면서, 원기가 격리 병동에 억울하게 갇혔다가 단서를 얻으면서, 그리고 실패를 여러 차례 거듭하면서 배 씨 가족은 퍼즐을 하나씩 짜맞추기 시작한다. 이때 슬그머니 '이안'이 끼어들어 탈출을 함께 계획하기 시작하고, 배 씨 가족이 국정원 요원으로 활동했을 무렵 부서를 맡았던 '한위'는 갑작스럽게 등장해 '착오가 있었다'며 배 씨 가족을 퇴원시키고자 한다. 과연 이안의 정체와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한위는 왜 이제서야 나타났을까? 배 씨 가족의 정신병원 탈출은 성공할 수 있을까?(장르소설의 특징상 최대한 스포일러를 방지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유쾌하고도 예측 불허인 배 씨 가족과 꼭 닮은 여러 차례의 반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배 씨 가족은 서로의 장단점을 합해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혹은 '괴물'을 닮았다. 하늬의 가족 구성원은 우리의 공감을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어떠한 면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다(괴물에서는 입양한 딸 '현서'의 실종으로 인해 가족이 결집하기 시작하고, 기생충에서는 어머니인 정숙의 물리적인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며 문광의 가족과 같이 다양한 형태가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가족'하면 0.1초 이내에 떠올릴 수 있는 권위적인 할아버지, 가정을 아끼는 아버지, 수다스러운 어머니, 골칫덩어리 남자 형제, 그리고 실질적으로 집을 이끌어나가는 여자 형제 같이 말이다. 

'정신병원'이라는 오도되기 쉬운 소재와는 달리, '정신병'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은 이 책 속에서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배 씨 가족과 공존하는 주변인들의 병은 오히려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과 단서를 전달해준다(비록 모든 것에 투덜대는 할아버지 '원기'가 한 환자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말이다 - 사람들 간의 트러블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정신병'과 '정신병원'이라는 소재를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특수하게 만들어 현실의 환자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원숙'의 말처럼 배 씨 가족은 끝까지 현실에 충실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믿으면서 스스로와 책의 유쾌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지켜나간다. '국정원'과 '초능력자 가족', 그리고 '정신병원'이라는 미스테리한 소재가 뜻밖의 발랄한 분위기로 펼쳐지는 <스타더스트 패밀리>는 초겨울의 추운 바람과 차가운 풀숲을 떠올리게끔 한다. 출판사 안전가옥에서 펴낸 작품 중 '초겨울'과 '유쾌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 소설을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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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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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을 묶어서 서평을 쓸까, 아니면 각각 써야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두 권은 결국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에(한 권을 읽으면 다른 책을 떠올렸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에르노의 <그들의 말 혹은 침묵>, 그리고 <얼어붙은 여자>를 한 글에서 동시에 다루게 되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책은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있다. 그 중 (<레벤느망>이라는 영화로도 접했으며) 이미 읽어 본 <사건>을 제외하고, 나는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기준을 정해 책을 고르고 구입했다. 아니 에르노의 저서 중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은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카뮈의 소설에 열광하며 동경하던 소녀. 그 소설들과 소녀가 매일 마주하는 끔찍한 일상의 접점은 영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 와 "빈 종이 앞에서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출신과 고등교육 사이의 거대한 간극, 자신의 성을 이유로 한 차별과 모순과 한계 뿐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소녀가 느낀 부조리의 감각. "이라는 알라딘 소설MD 권벼리 님의 소개글을 보고 고르게 되었다. <얼어붙은 여자>는 "실제로 그는 『얼어붙은 여자』 이후 출간된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고백과 함께, 소설적 장치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라는 책소개를 보고 구매했다. 이때 아니 에르노가 작품에서 주로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과 감정'이 여성 서사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조금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여성이 썼으며, 여성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이야기가 여성 서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보다 다양한 유형의 여성 캐릭터와 여성 저자가 필요하다. 나는 반드시 작품 속에서 성장을 이뤄내고 성공을 쟁취하는 여성 캐릭터뿐만 아니라 좌절과 실패를 겪는 여성 캐릭터 또한 우리에게는 지극히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2022년 가을, 아직도 우리에게는 많고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더욱 여성에게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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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민음사에서 펴낸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을 보면, 작품 속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사춘기 청소년 특유의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다는 유사점이 있으나, 그 기저에 깔린 원인은 전혀 다르다. 홀든은 낙제와 퇴학이 가져오는 권태와 좌절 속에서 고민한다면, 이 소설의 '나'는 자신이 사회와 부모님으로부터 기대받는, 그리고 자신이 성취해 낸 '고등학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정작 자신에게서 영영 떼어놓을 수 없는 '노동자 계층'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속의 '나', 즉 안은 부모님이 원하던 지위를 쟁취해도, 아무리 카뮈를 많이 읽어도, 부조리함을 느끼더라도 구조적안 문제 속에서, 그 견고함에서 헤어나오는 데 실패하고 만다(결국 '나'는 에세이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그들의 말 그리고 침묵에 나오는 '나' 의 말은 소설의 정돈된 문체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청소년 특유의 신랄하고 '날것'에 가까운 말투. 그 덕분에 우리는 '나'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간극과 자괴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수많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사춘기 소녀로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성경험을 해야 한다는 나이와 또래 집단이 주는 압박, 더 많은 성취를 원하고, 재정적인 부담을 여실히 드러내고, 남자를 만날까봐 전전긍긍하여 옷차림을 하나하나 신경쓰는 부모님의 압박, 그리고 자신이 태생적으로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압박. '나'가 겪는 압박감과 답답함, 조급함은 청소년기를 겪고 있고, 이를 지나온 여성이라면 모두가 겪었을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 역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나'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단숨에 읽어내리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뒤바뀌는 멋진 경험을 하게 되어도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는 그대로다. 우리는 이 구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간극과 절망을 느낀다. 나 역시 책을 읽고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고, 이후에는 인과관계가 뒤바뀌어 오히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부모의 요동치는 기대치(돈을 벌기를 원하다가 갑자기 성적이 이게 뭐냐고 화를 낸다)와 집요한 감시('나'에게는 원피스를 마음대로 고르거나 입을 자유조차 없다 - '나'는 소년이 아닌 소녀이므로)에 '나'는 점차 지쳐 간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속한 세계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점차 확장되면서, 그리고 소설가라는 꿈을 본격적으로 간직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이를 안정시켜 줄 집이라는 안전한 환경은 없다.

'나'는 또한 소녀에서 '여자'가 되고자 한다. '나'는 원피스를 입고 여러 포즈를 취해 보거나, 어느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매우 뿌듯해한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시도하고(자신은 그다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고를 자격이 없다고 말하거나, 미숙하기 때문에 싫다는 의사를 제대로 내비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정을 잃기도 한다. 자신의 미숙함과 어설픔을 그대로 드러낸 '나', 혹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은 그 누구의 것보다 대담하고 용기있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 바로 그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소설은 끝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사실 수많은 소설은 문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채로 결말이 나곤 한다. 이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절망적인 메세지를 닻처럼 날카롭고도 무겁게 던져주지 않던가? 부조리극처럼 현실 속에서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기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보다 우리 개인은 압도적으로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면에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과 같다고 여긴다. '나'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던져주는 무력감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입고, 자괴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가 주는 청소년 특유의 '날것'의 에너지와 말투는, 분명 이와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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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레모에서 펴낸 <얼어붙은 여자>는 아니 에르노에 의해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를 논픽션, 자전적 이야기로 분류한다. 이는 "오직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 세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저자가 느낀 성별 간의 간격과 페미니즘적 인식은 서문에서부터 뚜렷히 나타난다. 여성들도 남성과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인 2022년,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차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남녀 차별은 사라졌다, 여성이 더 존중받는 시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괴감을 느낀다. 단적인 예시로 사범대학에서는 "임용고시에서 남자는 무조건 유리하다"는 발언이 강의 내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들려온다. 그 강의에서 우리는 남학생이 성적 측면에서 더 뛰어나다는 통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피임은 수많은 여성을 해방시켰지만, 여전히 임신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여성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가게 운영을 담당하고 아버지가 가사일을 담당하면, 어쩌면 '독특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나'는 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머니는 아름답고, 활기차고, 두려움이 없으며 많은 독서를 하고 상상력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나'와 꼭 맞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자라나면서 다른 집의 완벽한 어머니들과 자신의 어머니 사이의 간극을 느낀다, 아니 느껴야만 했다. 어머니는 친구의 시선에서 '정상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친구 브리지트의 경우, '나'의 집에 쌓인 먼지를 보고 경악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여성지에 실린 살림의 비결을 '여성을 속박하는 굴레'로 칭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그 성공이 나에게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에게는 어떤 인물이 된다는 것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성장 환경은 '남녀는 평등하다', '남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외부 세계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가만히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어머니의 일', 즉 가사 활동을 '희생'으로 규정하고, 소녀들 또한 그러한 능력을 습득할 것을 권한다. 브리지트는 퓌레를 만드는 아버지에게 "그걸 아버지가 만드세요?"라는 가시 돋친 질문을 하여 '나'로 하여금 경악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와 대비되는 브리지트는 그 시대에 걸맞는 '모범적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녀로, 자신 또한 어머니를 도와 가사에 매우 익숙한 소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 소녀에게도 브리지트처럼, 어쩌면 브리지트의 어머니처럼 완벽한 가사 수행 능력을 바라고 요구한다.

"우리 집이나 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런 성공은 오히려 결점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성가신 애가 하나 또 있다면서 경계하고, 책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며, 주눅이 들어, 완벽한 여자아이 만세! 거리낌 없이 외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에서와 같이 '나' 역시 어린 소녀에서 여자로 탈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친구들끼리 성적인 얘기를 하고 키득거리거나, 몰래 친구로부터 받은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남자로부터 선택받은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게도 '자신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직관이 있는 여자아이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용기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들에 의해 말은 싹둑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또한 '똑똑한 여자'는 오히려 남녀관계에서 '결점'이 된다(오늘날에서도 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에도 연애 관계와 하등 상관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똑똑한 여자를 깎아내리려 애쓰고 맨스플레인을 하던 수많은 학우들이 있었다.(물론 그 설명의 내용은 전부 틀렸다). "어쪄면 똑똑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진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는 얼마나 멋진 일인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주는 불확실성 앞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적 배경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무슨 직업을 골라야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보다 어떠한 학업 과정을 태할 것인지를 태평하게 고르는 학생들이 가득하다. 나 역시 단순히 '"주변 학교 교복이 못생겨서" 공부를 시작해 외고에 갔고 대학에 왔다'는 어느 선배의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학비를 생각하지 않고 교복 때문에(다른 이유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특목고를 간다고? 나는 특목고를 갈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중학생 때 공부를 놓아버린 경험이 있다(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시작했고 어쩌면 그 때문에 배로 고생했다). 대학에서도 응급실에 간 날 내일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입원해서 검사하자는 권유를 거절해 본 경험이 있고(강박적으로 책임감이 강해서이기도 했다), 압박감 때문에 보통 정량의 4-6배 정도의 편두통약을 매일 먹었다(다행히도 지금은 완쾌했다.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인지!). 나 역시 '나'처럼 대학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선생은 '여자에게' 정말 멋진 직업이다, 열여덟 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좋은 많은 방학, 꿈, 요컨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 직업,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돈을 번다,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엄마로 남는다, 그러니 누가 이 직업에 대해 불평하겠는가. "

여전히 대학에서도 남녀차별은 만연하다. 학부생 때 미투 운동으로 학교 전체가 매우 큰 충격을 받기도 했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범대생이라면 당연히 남자가 유리하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다(정작 여학생들은 임금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임용고시를 본다). 심지어 여성 교수님에게도. 나는 키가 작아서 굽이 높은 힐을 신을 것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또한, 취업사진을 찍을 때면(나는 그 당시 단발이었다) 머리를 어떻게든 올백으로 넘기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속눈썹을 붙인 채로(전부 처음 해 봤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블라우스와 자켓을 입고 포토샵으로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 사진을 받기 위해 우리는 7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한다(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때, 면접이 있으면 새벽에 나와서 이와 똑같은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대여를 받을 것을 업체에서 종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 비용을 대체 어떻게 지불하란 말인가?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는 추세지만, 여성에게는 안경을 끼는 것도 '단정하지 못하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지양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있다. 그럴수록 나는 꿋꿋하게 내 안경을 쓰고 다녔다. 교대의 경우도 그렇다. 학생들을 상담하거나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뵐 때면, 충분히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집안 때문에 선택권이 없어서 별 수 없이 교대에 진학해야 하는 경우를 수도없이 본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지호는 집 근처 교대에 등록하는 대신 아버지 몰래 서울대에 등록하고 야반도주를 하는 것을 선택한다.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눈치챌 것이다. '얼어붙은 여자'의 이름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얼어붙은 여자가 될 수 있고,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모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에르노는 1960-7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나는 2010년대 중반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기존의 제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나, 그 누구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분노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할 의무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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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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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을 묶어서 서평을 쓸까, 아니면 각각 써야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두 권은 결국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에(한 권을 읽으면 다른 책을 떠올렸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에르노의 <그들의 말 혹은 침묵>, 그리고 <얼어붙은 여자>를 한 글에서 동시에 다루게 되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책은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있다. 그 중 (<레벤느망>이라는 영화로도 접했으며) 이미 읽어 본 <사건>을 제외하고, 나는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기준을 정해 책을 고르고 구입했다. 아니 에르노의 저서 중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은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카뮈의 소설에 열광하며 동경하던 소녀. 그 소설들과 소녀가 매일 마주하는 끔찍한 일상의 접점은 영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 와 "빈 종이 앞에서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출신과 고등교육 사이의 거대한 간극, 자신의 성을 이유로 한 차별과 모순과 한계 뿐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소녀가 느낀 부조리의 감각. "이라는 알라딘 소설MD 권벼리 님의 소개글을 보고 고르게 되었다. <얼어붙은 여자>는 "실제로 그는 『얼어붙은 여자』 이후 출간된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고백과 함께, 소설적 장치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라는 책소개를 보고 구매했다. 이때 아니 에르노가 작품에서 주로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과 감정'이 여성 서사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조금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여성이 썼으며, 여성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이야기가 여성 서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보다 다양한 유형의 여성 캐릭터와 여성 저자가 필요하다. 나는 반드시 작품 속에서 성장을 이뤄내고 성공을 쟁취하는 여성 캐릭터뿐만 아니라 좌절과 실패를 겪는 여성 캐릭터 또한 우리에게는 지극히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2022년 가을, 아직도 우리에게는 많고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더욱 여성에게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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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민음사에서 펴낸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을 보면, 작품 속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사춘기 청소년 특유의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다는 유사점이 있으나, 그 기저에 깔린 원인은 전혀 다르다. 홀든은 낙제와 퇴학이 가져오는 권태와 좌절 속에서 고민한다면, 이 소설의 '나'는 자신이 사회와 부모님으로부터 기대받는, 그리고 자신이 성취해 낸 '고등학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정작 자신에게서 영영 떼어놓을 수 없는 '노동자 계층'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속의 '나', 즉 안은 부모님이 원하던 지위를 쟁취해도, 아무리 카뮈를 많이 읽어도, 부조리함을 느끼더라도 구조적안 문제 속에서, 그 견고함에서 헤어나오는 데 실패하고 만다(결국 '나'는 에세이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그들의 말 그리고 침묵에 나오는 '나' 의 말은 소설의 정돈된 문체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청소년 특유의 신랄하고 '날것'에 가까운 말투. 그 덕분에 우리는 '나'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간극과 자괴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수많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사춘기 소녀로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성경험을 해야 한다는 나이와 또래 집단이 주는 압박, 더 많은 성취를 원하고, 재정적인 부담을 여실히 드러내고, 남자를 만날까봐 전전긍긍하여 옷차림을 하나하나 신경쓰는 부모님의 압박, 그리고 자신이 태생적으로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압박. '나'가 겪는 압박감과 답답함, 조급함은 청소년기를 겪고 있고, 이를 지나온 여성이라면 모두가 겪었을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 역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나'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단숨에 읽어내리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뒤바뀌는 멋진 경험을 하게 되어도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는 그대로다. 우리는 이 구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간극과 절망을 느낀다. 나 역시 책을 읽고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고, 이후에는 인과관계가 뒤바뀌어 오히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부모의 요동치는 기대치(돈을 벌기를 원하다가 갑자기 성적이 이게 뭐냐고 화를 낸다)와 집요한 감시('나'에게는 원피스를 마음대로 고르거나 입을 자유조차 없다 - '나'는 소년이 아닌 소녀이므로)에 '나'는 점차 지쳐 간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속한 세계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점차 확장되면서, 그리고 소설가라는 꿈을 본격적으로 간직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이를 안정시켜 줄 집이라는 안전한 환경은 없다.

'나'는 또한 소녀에서 '여자'가 되고자 한다. '나'는 원피스를 입고 여러 포즈를 취해 보거나, 어느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매우 뿌듯해한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시도하고(자신은 그다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고를 자격이 없다고 말하거나, 미숙하기 때문에 싫다는 의사를 제대로 내비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정을 잃기도 한다. 자신의 미숙함과 어설픔을 그대로 드러낸 '나', 혹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은 그 누구의 것보다 대담하고 용기있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 바로 그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소설은 끝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사실 수많은 소설은 문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채로 결말이 나곤 한다. 이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절망적인 메세지를 닻처럼 날카롭고도 무겁게 던져주지 않던가? 부조리극처럼 현실 속에서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기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보다 우리 개인은 압도적으로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면에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과 같다고 여긴다. '나'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던져주는 무력감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입고, 자괴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가 주는 청소년 특유의 '날것'의 에너지와 말투는, 분명 이와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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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레모에서 펴낸 <얼어붙은 여자>는 아니 에르노에 의해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를 논픽션, 자전적 이야기로 분류한다. 이는 "오직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 세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저자가 느낀 성별 간의 간격과 페미니즘적 인식은 서문에서부터 뚜렷히 나타난다. 여성들도 남성과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인 2022년,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차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남녀 차별은 사라졌다, 여성이 더 존중받는 시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괴감을 느낀다. 단적인 예시로 사범대학에서는 "임용고시에서 남자는 무조건 유리하다"는 발언이 강의 내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들려온다. 그 강의에서 우리는 남학생이 성적 측면에서 더 뛰어나다는 통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피임은 수많은 여성을 해방시켰지만, 여전히 임신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여성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가게 운영을 담당하고 아버지가 가사일을 담당하면, 어쩌면 '독특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나'는 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머니는 아름답고, 활기차고, 두려움이 없으며 많은 독서를 하고 상상력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나'와 꼭 맞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자라나면서 다른 집의 완벽한 어머니들과 자신의 어머니 사이의 간극을 느낀다, 아니 느껴야만 했다. 어머니는 친구의 시선에서 '정상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친구 브리지트의 경우, '나'의 집에 쌓인 먼지를 보고 경악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여성지에 실린 살림의 비결을 '여성을 속박하는 굴레'로 칭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그 성공이 나에게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에게는 어떤 인물이 된다는 것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성장 환경은 '남녀는 평등하다', '남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외부 세계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가만히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어머니의 일', 즉 가사 활동을 '희생'으로 규정하고, 소녀들 또한 그러한 능력을 습득할 것을 권한다. 브리지트는 퓌레를 만드는 아버지에게 "그걸 아버지가 만드세요?"라는 가시 돋친 질문을 하여 '나'로 하여금 경악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와 대비되는 브리지트는 그 시대에 걸맞는 '모범적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녀로, 자신 또한 어머니를 도와 가사에 매우 익숙한 소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 소녀에게도 브리지트처럼, 어쩌면 브리지트의 어머니처럼 완벽한 가사 수행 능력을 바라고 요구한다.

"우리 집이나 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런 성공은 오히려 결점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성가신 애가 하나 또 있다면서 경계하고, 책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며, 주눅이 들어, 완벽한 여자아이 만세! 거리낌 없이 외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에서와 같이 '나' 역시 어린 소녀에서 여자로 탈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친구들끼리 성적인 얘기를 하고 키득거리거나, 몰래 친구로부터 받은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남자로부터 선택받은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게도 '자신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직관이 있는 여자아이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용기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들에 의해 말은 싹둑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또한 '똑똑한 여자'는 오히려 남녀관계에서 '결점'이 된다(오늘날에서도 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에도 연애 관계와 하등 상관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똑똑한 여자를 깎아내리려 애쓰고 맨스플레인을 하던 수많은 학우들이 있었다.(물론 그 설명의 내용은 전부 틀렸다). "어쪄면 똑똑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진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는 얼마나 멋진 일인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주는 불확실성 앞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적 배경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무슨 직업을 골라야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보다 어떠한 학업 과정을 태할 것인지를 태평하게 고르는 학생들이 가득하다. 나 역시 단순히 '"주변 학교 교복이 못생겨서" 공부를 시작해 외고에 갔고 대학에 왔다'는 어느 선배의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학비를 생각하지 않고 교복 때문에(다른 이유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특목고를 간다고? 나는 특목고를 갈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중학생 때 공부를 놓아버린 경험이 있다(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시작했고 어쩌면 그 때문에 배로 고생했다). 대학에서도 응급실에 간 날 내일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입원해서 검사하자는 권유를 거절해 본 경험이 있고(강박적으로 책임감이 강해서이기도 했다), 압박감 때문에 보통 정량의 4-6배 정도의 편두통약을 매일 먹었다(다행히도 지금은 완쾌했다.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인지!). 나 역시 '나'처럼 대학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선생은 '여자에게' 정말 멋진 직업이다, 열여덟 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좋은 많은 방학, 꿈, 요컨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 직업,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돈을 번다,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엄마로 남는다, 그러니 누가 이 직업에 대해 불평하겠는가. "

여전히 대학에서도 남녀차별은 만연하다. 학부생 때 미투 운동으로 학교 전체가 매우 큰 충격을 받기도 했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범대생이라면 당연히 남자가 유리하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다(정작 여학생들은 임금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임용고시를 본다). 심지어 여성 교수님에게도. 나는 키가 작아서 굽이 높은 힐을 신을 것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또한, 취업사진을 찍을 때면(나는 그 당시 단발이었다) 머리를 어떻게든 올백으로 넘기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속눈썹을 붙인 채로(전부 처음 해 봤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블라우스와 자켓을 입고 포토샵으로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 사진을 받기 위해 우리는 7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한다(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때, 면접이 있으면 새벽에 나와서 이와 똑같은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대여를 받을 것을 업체에서 종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 비용을 대체 어떻게 지불하란 말인가?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는 추세지만, 여성에게는 안경을 끼는 것도 '단정하지 못하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지양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있다. 그럴수록 나는 꿋꿋하게 내 안경을 쓰고 다녔다. 교대의 경우도 그렇다. 학생들을 상담하거나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뵐 때면, 충분히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집안 때문에 선택권이 없어서 별 수 없이 교대에 진학해야 하는 경우를 수도없이 본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지호는 집 근처 교대에 등록하는 대신 아버지 몰래 서울대에 등록하고 야반도주를 하는 것을 선택한다.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눈치챌 것이다. '얼어붙은 여자'의 이름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얼어붙은 여자가 될 수 있고,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모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에르노는 1960-7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나는 2010년대 중반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기존의 제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나, 그 누구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분노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할 의무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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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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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한 색채로 부르짖고 있지만(이 작품의 배경은 스페인 시골 마을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여성이다(이름으로만 언급되는 인물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설정은 지극히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여성은, 대표적으로 다섯 딸의 어머니이자 집의 수장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동시에 ‘가부장제로부터 지독히 억압받는 존재’ 이자 ‘가부장제의 수호자’로 둔갑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를 받은 여성이 가부장제를 수호하지 않으면, 자신이 받은 억압과 트라우마로부터 ‘탈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8년 상을 지낼 동안 이 집 안으로 거리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문이며 창문들이 벽돌로 봉했다는 걸 알아 둬. 우리 아버지, 할머니 집에서도 이렇게 했어.”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남편이자 맏딸 ‘앙구스티아스’를 제외한 네 자매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막이 오른다. 앙구스티아스는 지참금을 노린 젊은 남자 ‘페페 엘 로마노’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으나, 나머지 네 명의 자매들은 8년 동안 집에 영영 갇힌 채 상복을 입고 수를 놓으며 결혼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야만 한다. 누군가가 정면으로 대항하기에는 어머니 베르나르다 알바의 권위는, 이 집안의 전통은, 그리고 스페인의 뿌리깊은 가부장제는 지나칠 정도로 강력하다.

이 극의 갈등은 두 가지 구조로 전개된다. 첫 번째는 가부장제와 억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베르나르다 알바와 이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아델라(‘아델라’라는 이름에는 ‘나아간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사이의 갈등이다. 두 번째는 페페 엘 로마노를 둘러싼 것인데, 단순히 지참금을 가져서 그와 결혼하게 된 앙구스티아스는 의외로 갈등에서 제외된다. 갈등은 페페 엘 로마노를 사랑하는 두 여자인 넷째 ‘마르티리오’와 다섯째 아델라 사이에서 전개된다. 두 개의 갈등은 서로 맞물려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그놈의 저주받을 여자! 여자! 여자!”

자매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베르나르다 알바의 억압에 대항한다. 이 말을 한 인물은 가부장제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아델라’가 아닌, 언니 ‘앙구스티아스’의 지참금에 의한 결혼을 긍정하는 ‘마그달레나’이다.(마그델레나는 상대인 ‘페페 엘 로마노’가 단순히 돈 때문에 앙구스티아스와 결혼하고자 한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첫째 ‘앙구스티아스’ 는 사망한 아버지는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화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극 중에서 가부장제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앞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마음껏 부르짖는 존재는 가부장제로부터의 탈피와 성적인 자유를 부르짖는 막내딸 ‘아델라’가 아니다. 그 존재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어머니이자 나이가 너무 많아 ‘노망이 난’ ‘마리아 호세파’이다. 아델라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페페와의 밀회를 가지지만, 반드시 어머니의 눈을 피해야만 한다. 아델라가 적극적으로 가부장제로부터의 탈피를 부르짖을 수 있는 곳은 언니들의 앞이지, 어머니의 앞이 아니다. ‘마리아 호세파’가 상복을 입는 대신 장신구를 꺼내 들고, 머리와 가슴을 꽃으로 장식하고, 결혼하여 바다로 나갈 자유를 울부짖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이미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결국 ‘미친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영원히 가부장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너무나!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피를 천천히 천천히 마시고 있는 것 같아.”

막내딸이자 극 중에서 베르나르다 알바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인 아델라는 가부장제라는 틀 대신 자신의 마음과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페페 엘 로마노와 밀회를 가진다. 그러나 아델라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라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폰시아의 질책에 눈물을 보이는 등 가부장제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를 이루어내기에는 아직 어리고 연약하다. 이 집의 하녀인 폰시아 또한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인물이며, 앙구스티아스 대신 아델라와 페페를 결혼시킬 것을 은근히 종용하기도 한다.

넷째 딸 마르티리오는 어리고 미인인 아델라와는 달리 등이 굽어 몸이 아픈, 남자로부터 욕망받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마르티리오 또한 페페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품고 있으나, 그에게는 아델라처럼 이를 이뤄 낼 방도가 도무지 없다. 마르티리오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창 밖으로 페페와 아델라를 목격하는 일 뿐이다. 아델라는 마르티리오에게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를 내세우며(어떠한 면에서는, 이는 아델라에게 비수로 돌아오게 된다) 자신을 ‘내버려 둘 것’을 청한다.

“한 여자의 문제는 모든 여자의 문제야.”

폰시아의 폭로로 인해 페페가 새벽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리고 다른 처녀가 미혼인데 아이를 낳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베르나르다 알바는 정반대로 처신한다. 전자의 경우, 그는 이를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부정한다. 후자의 경우 그는 “자기의 정조를 짓밟은 여자는 그 대가를 치러야지.”라고 말하며 채찍과 괭이를 챙긴다. 이를 목격하는 아델라는 마치 자신이 피해를 겪는 것처럼 배를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고 절규한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평판이 조금이라도 흠이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동시에 동네 처녀의 일에 몸소 심판자이자 징벌자가 되어 그 처녀를 벌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아델라는 징벌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 숨김없이 낱낱이 털어놓지. 그래, 사랑해! 내 가슴이 비통으로 터지게 내버려 둬. 그를 사랑해!”

마르티리오의 페페를 향한 가망 없는 사랑은 아델라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욕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르티리오가 느끼는 비통함은 곧 아델라를 향한 열등감과 증오로 뒤바뀐다. 물론, 아델라도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 아델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결국 마르티리오는 그토록 증오하는 ‘가부장제’의 힘을 빌린다. 즉, 마르티리오는 베르나르다 알바에게 아델라의 밀회를 폭로함으로써 승리를 거머쥐고자 했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아델라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페페를 향해 총을 쏘자, 마르티리오는 아델라에게 페페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는 진실을 말하는 대신, “페페 엘 로마노는 끝났어”라고 말하며 그의 거짓된 죽음을 암시한다. 이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마르티리오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델라, 베르나르다 알바의 막내딸은 처녀로 죽었어. 내 말 알아들었어? 조용히,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조용히 해!”

아델라는 페페가 죽었다는 비통함에 빠져 목을 매달아 사망한다. 이때 베르나르다 알바의 대처는 비명을 지르는 즉각적인 반응과는 전혀 다르게 나아간다. 그가 해야 할 의무는 막내딸에 대한 애도가 아니다. 베르나르다 알바, 즉 이 가문의 수장이자 가부장제의 수호자의 의무는 ‘아델라의 밀회를 은폐하고 그를 처녀로 꾸며내어 이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막내딸을 향한 슬픔이 ‘허용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다시 한 번,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그 모습을 탈바꿈한다.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통해 처음 접한 작품이다. 희곡집과 뮤지컬을 접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뮤지컬 또한 영화로 개봉되어 접할 수 있으니, 그리고 정말 좋은 작품이니 많은 분들이 봐 주셨으면 하고 언제나 바라고 있다. ‘상복’으로 연유되는 가부장제와 대비되는 자유, 욕망, 사랑을 향한 갈망이 펼쳐지는 이 작품은(뮤지컬의 경우 붉음과 검정이 대비되고, 플라밍고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한 가족의 운명을 통해 가부장제의 어리석음을 맹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확실한 메세지 뿐만 아니라,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와 대사들 또한 즐거움과 비극성을 강조한다. 희곡집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나는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과 함께 이 작품을 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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