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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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표지는 싱그럽고 고운 튤립 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밑에 호랑이 두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표지와 같이, 안희연 시인님의 작품들은 곱고 부드러운 시어가 쓰이지만 주제의식 또한 그렇지는 않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다(또 다른 시집인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들이 모여 있다). 안희연 시인님의 작품들은 항상 부드럽지만 섬세하게 삶의 본질을 파고들고, 따스한 손으로 위로를 건넨다.

좋아하는 시를 먼저 뽑아보자면, <선잠>, <알라메다>, <빛의 산>, <역광의 세계>, <단란>, <풍선 장수의 노래>,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덧칠> 등이 있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는(특히 이 시집에서는) 부드럽고 따스한 만큼 친절하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는, 특히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시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께서 입문용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시 몇 편의 리뷰를 써 보자면, 먼저 <선잠>에 대해 쓰려 한다. '잠'이라는 말에 위로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종 '영영 떠나가 버린 사람'이라는 말이 한없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마치 운명에 이끌리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길로만 훌훌 떠나가 버린 것 같으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기차역'이라는 말도, 장소도 정말 좋아한다. 그의 소멸은 화자에게는 비극이고 불안의 원인이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안도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말하는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은 간절하고도 아름답다.

<빛의 산>의 경우,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중간해서' 고민하거나 슬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나는 겨우 중간 정도밖에 안 된다거나, 나는 죽을 만큼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응급실에서 우선순위가 한없이 밀리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보는 풍경은 제각기 일상적이고도 평화로워 아름답다. 화자는 실패를 맞닥뜨리고 돌파구를 찾는다. 하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던지! 답을 찾아낼 때는 허망함이나 분함보다 오히려 안도감이 앞선다. 코로나로 위태로운 일상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무엇인지 이 시를 통해 되새길 수 있었다.

<역광의 세계>는 이 시에 나오는 인용구에 반해 단숨에 읽어낸 기억이 난다. 소설이나 논픽션 속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어찌나 허망한지. 레미제라블의 어린 혁명가들은 앙졸라스와 그랑테르, 바오렐과 가브로쉬, 그리고 에포닌을 제외하고는 고작 '죽었다'라는 단 한 줄로만 그 운명이 드러난다. 단조로운 서술은 그들의 죽음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비극을 극대화시킨다(영화 속에서는 혁명가들이 죽어 가며 흘린 피를 부모와 형제들이 직접 닦으며 슬퍼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화자는 그저 멀리서 책 속의 인물들을 관조하기를 택하나, 점차 등장인물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며, 결국에는 책 속에 파묻힌 운명을 받아들인다. 즉,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그들의 생존 혹은 죽음에 연민하고 슬퍼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를 보면, 안희연 시인은 슬픔을 천둥과 같이 날카롭고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 속에 묵묵히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슬픔의 본질은 참혹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차마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것, 혹은 흘린 눈물조차 전부 잊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는 '너'와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슬픔에 주저앉고 환경에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나 슬픔을 겪은 '너'와 '나'의 얼굴은 분명 달라져 있다. '너'와 '나'가 변한다면, 어쩌면 세상 또한 우리가 느낀 슬픔으로 인해 변화하고 울부짖게 될 것이다.

안희연 시인님의 시집은 맑고 청초해 보이는 표지와는 달리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온통 아우르고 있다. 시인은 현실을 직시할 것을 끝없이 강조하나, 그럼에도 따스한 위로와 시선을 건네는 걸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지금 처한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희망을 여전히 노래하는 시집이 곧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2022년 11월, 우리는 지금 수없이 많은 절망과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시집을 읽고 희망을 얻어가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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