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버나움

감독, 나딘 라바키 / 프랑스 / 2018

- 제 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워상 수상.

- 뉴욕타임즈 올해의 영화 TOP 10 선정.

- 제 76회 골든 글러브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 전세계 영화제에서 관객상 8관왕 수상.

--------------------------------------------------------------------- 이야기.

시작부터 강렬하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합니다"

주인공인 자인의 대사다.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면,

빈민굴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수많은 형제들과 살아가는 자인.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누울 곳조차 없는 그곳이 그(들)의 집이다.

이런 와중에도 부부의 금술은 어찌나 좋은지, 현대판 흥부집이다.

자인은 동생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어여쁜 여동생 사하르가 여인이 되는 성장기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결정과 자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

결국, 자인은 가출을 한다.

떠돌던 자인은 라힐을 만나게 된다.

라힐은 불법체류자에 미혼모다. 그녀는 체류증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면서 판잣집에서 산다.

청소일을 할 때면 아이(요나스)를 화장실 한켠에 놔두고 돌봤지만 이제는 자인에게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간다. 자인은 마치 자신의 동생처럼 자식처럼 아이(요나스)를 돌본다

비록 남이 먹다 버린 케이크를 주워와 생일파티를 하지만, 그들은 잠시 행복함을 맛본다.

하지만 신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인, 라힐, 요나스는 뿔뿔이 흩어지고,

여동생 사하르에게 일어난 불행을 전해들은 자인은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그만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갇힌다. 감옥은 욕설과 구타가 가득한 곳이다.

신은 하나를 앗아가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준다고 한다. 인간이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지만, 자인은 대체 무엇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자인은 부모를 고소하고, 법정에서 부모를 마주한다.

그리고 판사에게 말한다. "부모님을 고소합니다."

---------------------------------------------------------- 나의 평~

- 영화는 던지는 메시지만큼이나 강렬하다. 하지만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다. 감독 나딘 라바키의 이전 작품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감독님은 사이사이 미소를 짓거나 웃을 수 있는 즉 무거운 주제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두신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나딘 라바키 감독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1차 후보에 오른 최초의 아랍 여성감독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자인 역의 자인 알 파리아는 실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던 소년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그가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며 영화관계자들이 그와 그 외 사람들을 계속 돕고 있다는 자막을 보게 된다.

- 영화는 다큐처럼 현실적이면서도 극도로 영화적이다. 지극히 감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극도로 이성적이다. 마치 헤겔의 명제처럼 말이다. 또한 변증법과 함께 관객들은 희망과 절망을 보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를 떠노는 느낌으로.

- 몇 발짝 물러서서 보면,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가 보일 것이고, 천착해서 보면, 인물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엄청난 무게의 주제를 가진 난생 처음보는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문제, 다산과 난산으로 인한 죽음, 빈부격차, 인권 사각지대의 실태, 남자들의 가학적 성욕과 무책임 그리고 이에 동조하거나 방조하도록 길들여진 여성들, 출생과 죽음, 가족의 붕괴와 해체, 인간의 기본 인권의 문제, 이상과 현실, 나약함과 비겁함,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불행,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욕망과 처절한 고통 마저도 삼켜버리는 망각의 늪 등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복잡다단할 뿐 아니라 하나같이 무겁고 난해하다. 하지만 어렵게 꼴을 맞추면 결국 우리 인간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나와 상황과 환경은 다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흐른다.

- 영화는 우리에게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눈 돌릴 것인가? 똑바로 쳐다 볼 것인가? 아이의 절규같은 외침과 부모의 피를 토하는 듯한 항변이 팽팽히 맞서고, 어느 누구도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을 재판이라는설정을 통해 보여주며,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으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묻는다.

이야기는 이런 질문과 함께 확장되어, 출생과 사망(출생신고서와 사망신고서라는 메타포의 대비)의 담론에 도달한 영화는 주인공의 억지(강요) 혹은 자의(자발)가 동시에 읽히는 미소짓는 얼굴로 마무리된다.

- 좋은 영화는 다양하게 읽히며 해석된다. 이 영화 역시 그런 특징이자 장점을 지녔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보려고 하는 만큼 보이고, 읽으려고 하는 만큼 읽힌다고. 보는 이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이 영화의 스펙트럼은 무한히 넓어질 것이다. 끝으로, 길거리 캐스팅의 기적이라 불린 배우들의 연기는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경이롭다. 그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였기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 참고 >

가버나움 Capernaum



‘나훔의 마을’이란 뜻. 갈릴리 호수 북서 해안의 성읍. 신약에만 언급되는 성읍인데, 이곳은 신약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이 있는 큰 성읍이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세리 마태는 이곳 가버나움 세관에서 제자로 부름받았다(마 9:9-13). 예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특히 백부장의 중풍병 걸린 하인(마 8:5-13),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마 8:14-15),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막 2:1-12) 그리고 왕의 신하아들(요 4:46-54) 등을 치유하신 사건이 있었다. 또 이곳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과 관련하여 생명의 떡에 관한 강화와 많은 다른 말씀들을 전해주셨다(막 9:33-50). 하지만 이런 놀라운 기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가버나움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1:21-24; 눅 10:15).

[네이버 지식백과] 가버나움 [Capernaum]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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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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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을 고를 때 드는 생각이 있다. 

현재의 내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책 예를 들어 수험서나 자격증 취득서 혹은 음식, 취미 생활 등 읽고 나서 바로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책들 그리고 그 반대개념으로 현실에서 즉각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나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미래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으로 보면, 후자에 속한다.  사실,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이니 하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즉 다시 말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지구 환경과는 정말 무관한 사실들이다. 내 기대 수명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우리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와는 1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홀>이란 책을 구입했고, 읽게 되었고, 빠져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이다. 그의 전작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를 읽고 무척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하루하루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에 뭔가 한줄기 빛처럼 그 책 하나가 나의 삶을 밝혔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 우리의 삶이 단순히 현실적인 먹고 살며 생존하는 문제에만 천착된다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하는 조금은 철학적이고 담론적인 질문 말이다.



이 책은 단순한 물리적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전작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철학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해야할 물리적 지식은 없어도 된다. 물론 그런 지식이 조금 있다면 도움은 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나의 착각이거나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 책을 통해 화이트홀에 대한 물리적지식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고 얻지도 않았다. 책의 첫장을 펴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오롯이 화이트홀과 블랙홀의 대비적 관점 그리고 그것이 동일선상에서 대척점에 존재한다는 담론적 측면만을 생각했다. 


이 담론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우리 인간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맞닿아 있다는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고 있을 듯 하다. 우리 인간의 몸이 우주만큼 복잡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말이다. 세포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 인간의 몸은 정말 우주의 저 넓은 공간 보다 넓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닮은 듯 다른 세포들이 인간의 몸을 지탱하고 바꾸고 한다. 우주의 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우주라는 공간을 꾸미고 있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앞서 언급한 전작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왔다. 아인슈타인으로 대변되는 상대성이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요즘 대세인 양자역학을 그것과 비교하며 물리적 지식을 아주 쉽게 풀어준다. 전작들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이 책을 읽는데 바탕이 된다. 


공간의 휘어짐은 중력이라는 힘으로 이어지고 이 힘은 결국 우주의 천체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으로 귀결된다. 그 흡입점에 블랙홀이 존재하고, 그 방출점에 화이트홀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블랙홀에 가본 적도 없고 그것을 가까이서 관찰해본 적도 없다. 지금의 관측과 가설은 모두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빛과 행성의 움직임으로 추측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믿지 못할 사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우리 인간은 아무런 과학적 장비가 없던 수천년전부터 우리의 눈 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그 사이의 연결성과 관계성을 계산해내었다. 너무나 신기하게 그 추측들은 현재의 과학으로 증명되고 있고 대부분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인간의 직관성은 앞서 언급한 '인간= 우주'라는 개념을 좀 더 공고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우주를 탐험하고 연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이 책을 우주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책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나 자신 = 우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이트홀과 블랙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가 빨아들이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들과 밀어내고 있는 상황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는 일종의 생각의 선이 결국은 하나라면 (이 책에서 말하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하나의 선상에 존재한다는 물리적 현상처럼 말이다) 나의 생각은 편견이나 취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밀어냄과 받아들임의 선상에 존재하는 일종의 자연 현상일 뿐인 것이다. 나의 생각에 여러 측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소위 상황이라는 것에 맞게 달라지듯 말이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가지려는 그래서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은 오히려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다시, 물리학으로 돌아가자.  물리학적 측면을 생각해서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적 현상 중 화이트홀과 블랙홀은 정말 우리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체물리학을 설명할 때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것이 어쩌면 우주의 탄생과 소멸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정설이다. 그리고 빅뱅의 힘이 블랙홀이 가진힘과 화이트홀이 가진 힘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들여다 보는 이유는 행성과 항성의 움직임 그리고 상호작용이 바로 별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별의 탄생은 우주의 탄생을 작은 단위 측면에서 보여주는 상황이다. 뭉치고 에너지를 얻고 팽창하고 폭팔하고 소명하고 다시 뭉치고 하는 과정들 말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듯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현재로선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우선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관측하고자 하는 행성과 항성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과학적 기술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화이트홀에 대한 설명은 결국 가설일 뿐이다. 아무리 논리적인 물리적 지식으로 설명되었다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생각해야 한다. 뉴턴의 사과가 우리에게 중력이라는 힘을 생각하게 했고, 그 중력이란 힘이 결국 공간의 휘어짐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해체라는 단계까지 생각하고 소멸과 생성 그리고 분해와 결합이라는 공상과학에 나올만한 이야기들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화이트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비교적 잘 알려져 온 블랙홀은 조금은 부정적 단어였다 즉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멸적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써진 대로라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질이 모두 소멸되거나 분해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저자인 카를로 로밸리의 말처럼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이나 물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우리의 시야에서 관측에서 사라졌으니 소멸로 보는 것일 뿐이다.  소멸이 아닌 생성,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화이트홀이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과 물체는 대척점에 있는 화이트홀을 통해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블랙홀이 반드시 존재하듯 화이트홀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물리적 지식과 관측으로 보면 그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먼 훗날의 일이지만 우리 지구도 소멸한다고 한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 훗말에는 화이트홀을 통해 다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블랙홀 속의 그 공간을 잘(?) 통과만 한다면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소위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릴적부터 과학시간에 우리의 지구는 물론 우리의 우주는 언젠가는 모두 소멸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정말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할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그래도 소멸할 곳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물론 우리 인간의 생명 또한 유한하지만 ) 그런데 이 책은 화이트홀을 통해 모든 물질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책을 덮는 순간 묘한 기분 좋음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양적 철학과 불교적 개념이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불교를 잘 모르지만 공즉시생 생즉시공이란 말은 알고 있다. 이 말을 여기에 적용해보면 묘하게 딱 맞아떨어진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반대의 개념이지만 그 두 개념은 결국 하나의 선상에 놓인 같은 개념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 책 <화이트홀>은  물리적 지식이 없이도 참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다. 더불어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 자기자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제 천천히 여름과 이별하고 있는 시간이다. 가을이 오면 한 번 더 이 책을 펼쳐볼 생각이다. 그렇게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며 우주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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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비소리는 독서하기에 제격인 것 같아요. ^^ 


제가 얼마전부터 아주 좋아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고 있어요.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 평전>입니다. 여러 좋은 평들이 있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자 슈테판츠바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이분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의 글에 그만 확 꽂혀버렸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이 책까지 읽게되었어요. 책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그때그때의 느낌으로 연결연결되어 계속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에라스무스라는 아주 위대한 분에 대한 일종의 전기형식의 글입니다. 전기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치부를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른 전기형식의 글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네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워낙 냉철한 분이시다 보니 마치 그것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처럼 슈바이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에라스무스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게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에라스무스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인문,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은 저자가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말할 정도이구요. 아마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에라스무스가 처했던 상황이 중첩되면서 저자가 에라스무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영향력이 커지면 그 어떤 세력들이 접근해 와 그들의 무리 속에 넣으려고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도 에라스무스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고뇌를 겪었고 그 점에서 서로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게 말입니다. 


제가 느낀 에라스무스의 매력은 그가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조성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창조적인 인간은 소위 광기를 동반하기 일수인데 에라스무스는 누구보다 광기를 배척하기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광기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비범한 사상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볼테르와 레싱의 표현을 빌려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라고 할까요. 그는 불명확한 모든 것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에 본성적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가 증오한 것은 바로 애매함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함이야 말로 분별력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번역본보다 언젠가 독일어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 좀 더 해야겠지만요. 대학때까지 배운 독일어 실력이 살아있길 바라면서ㅋ)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분별력과 명확함을 내세운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읽다 보니 그 답이라고 느껴질만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이 학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온함이라고 한 대목에 전 주목하고 싶습니다. 평온함이란 결국 명확함을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판단할 때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많으 고민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잔항요. 에라스무스도 사람인지라 공부를 거듭할수록 사회현상, 인간본질, 관계 등 모든 면이 그에게 고민거리로 다가와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으로 아마 평온함을 꼽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평온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학문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세간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깐요. 이건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은 홀로 있어도 고뇌에 빠지고 여럿에게 속해도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끝까지 화합(자신을 영입하려고 싸웠던 적대적 양대 세력의 화합) 이라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후대에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하나의 방향 즉 학문에 매진하는 것에 더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펴낸 거죠. 그 유명한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군주론에 표현된 마키아베릴의 사상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민중들에게 개인적인 권리, 이기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권리보다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인류의 우호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국가의 권력의지, 힘의 의지보다 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정의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립 해소라는 위대한 민문주의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했던 여러 국가들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의 세계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집필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기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에라스무스를 위대하다고 칭한 이유또한 짐작이 가네요. 


명료한 정신, 순수한 도덕의 힘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힘없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덕 정신을 형성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영원하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화합의 정신을 에라스무와 저자 스테판 츠바이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책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를 좋아한 단순한 이유로부터 나의 손에 쥐어진 이 책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난 창조적인 힘은 명료함에서 나오고, 명료함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의 원리가 인간 사회의 지배논리가 되고 역사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과 동시에 순수한 도덕과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인지 알게 되었네요.

 

덧)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번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책인 것 같아요. 책 내용 중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하다 종교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여러 의견들이 갈리는 부분이고 보시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걸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을 선택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알라딘이 알려준 저의 기록. (저는 알라딘에서 이런 거 알려주는 거 좋더라구요 ^^) 더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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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 저도 좋아합니다. 전 얼마전 감정의 혼란을 읽었습니다. 평온함을 가져야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도 생길텐데, 쉽지 않은 날들입니다.
 
에라스무스 평전 - 광기에 맞선 이성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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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비소리는 독서하기에 제격인 것 같아요. ^^ 


제가 얼마전부터 아주 좋아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고 있어요.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 평전>입니다. 여러 좋은 평들이 있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자 슈테판츠바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이분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의 글에 그만 확 꽂혀버렸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이 책까지 읽게되었어요. 책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그때그때의 느낌으로 연결연결되어 계속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에라스무스라는 아주 위대한 분에 대한 일종의 전기형식의 글입니다. 전기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치부를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른 전기형식의 글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네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워낙 냉철한 분이시다 보니 마치 그것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처럼 슈바이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에라스무스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게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에라스무스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인문,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은 저자가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말할 정도이구요. 아마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에라스무스가 처했던 상황이 중첩되면서 저자가 에라스무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영향력이 커지면 그 어떤 세력들이 접근해 와 그들의 무리 속에 넣으려고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도 에라스무스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고뇌를 겪었고 그 점에서 서로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게 말입니다. 


제가 느낀 에라스무스의 매력은 그가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조성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창조적인 인간은 소위 광기를 동반하기 일수인데 에라스무스는 누구보다 광기를 배척하기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광기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비범한 사상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볼테르와 레싱의 표현을 빌려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라고 할까요. 그는 불명확한 모든 것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에 본성적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가 증오한 것은 바로 애매함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함이야 말로 분별력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번역본보다 언젠가 독일어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 좀 더 해야겠지만요. 대학때까지 배운 독일어 실력이 살아있길 바라면서ㅋ)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분별력과 명확함을 내세운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읽다 보니 그 답이라고 느껴질만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이 학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온함이라고 한 대목에 전 주목하고 싶습니다. 평온함이란 결국 명확함을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판단할 때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많으 고민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잔항요. 에라스무스도 사람인지라 공부를 거듭할수록 사회현상, 인간본질, 관계 등 모든 면이 그에게 고민거리로 다가와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으로 아마 평온함을 꼽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평온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학문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세간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깐요. 이건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은 홀로 있어도 고뇌에 빠지고 여럿에게 속해도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끝까지 화합(자신을 영입하려고 싸웠던 적대적 양대 세력의 화합) 이라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후대에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하나의 방향 즉 학문에 매진하는 것에 더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펴낸 거죠. 그 유명한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군주론에 표현된 마키아베릴의 사상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민중들에게 개인적인 권리, 이기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권리보다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인류의 우호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국가의 권력의지, 힘의 의지보다 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정의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립 해소라는 위대한 민문주의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했던 여러 국가들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의 세계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집필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기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에라스무스를 위대하다고 칭한 이유또한 짐작이 가네요. 


명료한 정신, 순수한 도덕의 힘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힘없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덕 정신을 형성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영원하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화합의 정신을 에라스무와 저자 스테판 츠바이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책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를 좋아한 단순한 이유로부터 나의 손에 쥐어진 이 책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난 창조적인 힘은 명료함에서 나오고, 명료함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의 원리가 인간 사회의 지배논리가 되고 역사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과 동시에 순수한 도덕과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인지 알게 되었네요.

 

덧)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번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책인 것 같아요. 책 내용 중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하다 종교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여러 의견들이 갈리는 부분이고 보시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걸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을 선택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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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로 환산해서 정리해 보면 뭔가 좀 더 다른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최애 분야는 확실히 관심이 있는 분야가 맞는 거 같고, 최애 작가 또한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분임에 틀림 없네요. 

음반과 블루레이를 이렇게 많이 샀나 싶어 살짝 갸우뚱 한데, 이건 좀 줄여야 겠다 생각했네요. ㅋ 


어쨌든 보통 연말에나 하게 되는 이런 류의 정리를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하니 기분이 좀 묘합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이 책들 또한 다음의 기록에 속하게 되겠죠.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그 끝이 오지 않을까하는 어두운 생각도 교차합니다. 

밤이라 그런가 봅니다. 

확실히 밤은 그것도 어느 달의 마지막 날의 밤은 생각이 많아집니다. 

오늘은 6월 30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버리고 

기억의 편린들이 다시 맞춰지면서 의문이 들었던 그 기억의 

해답이 다가왔네요. 이제야, 대체 왜 이제야. 

지나간 건 지나간대로라는 노랫말처럼 생각하고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은 밤 같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면서 100세까지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렇게 된다면 922권을 읽을 수 있다는 건데 어떤 책들로 922권이 채워질까하는 기대와 설렘도 갖게 되네요. ㅎㅎ 왠지 죽음, 끝이라는 씁쓸함과 더 읽을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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