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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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을 고를 때 드는 생각이 있다. 

현재의 내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책 예를 들어 수험서나 자격증 취득서 혹은 음식, 취미 생활 등 읽고 나서 바로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책들 그리고 그 반대개념으로 현실에서 즉각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나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미래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으로 보면, 후자에 속한다.  사실,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이니 하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즉 다시 말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지구 환경과는 정말 무관한 사실들이다. 내 기대 수명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우리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와는 1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홀>이란 책을 구입했고, 읽게 되었고, 빠져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이다. 그의 전작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를 읽고 무척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하루하루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에 뭔가 한줄기 빛처럼 그 책 하나가 나의 삶을 밝혔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 우리의 삶이 단순히 현실적인 먹고 살며 생존하는 문제에만 천착된다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하는 조금은 철학적이고 담론적인 질문 말이다.



이 책은 단순한 물리적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전작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철학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해야할 물리적 지식은 없어도 된다. 물론 그런 지식이 조금 있다면 도움은 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나의 착각이거나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 책을 통해 화이트홀에 대한 물리적지식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고 얻지도 않았다. 책의 첫장을 펴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오롯이 화이트홀과 블랙홀의 대비적 관점 그리고 그것이 동일선상에서 대척점에 존재한다는 담론적 측면만을 생각했다. 


이 담론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우리 인간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맞닿아 있다는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고 있을 듯 하다. 우리 인간의 몸이 우주만큼 복잡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말이다. 세포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 인간의 몸은 정말 우주의 저 넓은 공간 보다 넓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닮은 듯 다른 세포들이 인간의 몸을 지탱하고 바꾸고 한다. 우주의 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우주라는 공간을 꾸미고 있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앞서 언급한 전작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왔다. 아인슈타인으로 대변되는 상대성이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요즘 대세인 양자역학을 그것과 비교하며 물리적 지식을 아주 쉽게 풀어준다. 전작들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이 책을 읽는데 바탕이 된다. 


공간의 휘어짐은 중력이라는 힘으로 이어지고 이 힘은 결국 우주의 천체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으로 귀결된다. 그 흡입점에 블랙홀이 존재하고, 그 방출점에 화이트홀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블랙홀에 가본 적도 없고 그것을 가까이서 관찰해본 적도 없다. 지금의 관측과 가설은 모두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빛과 행성의 움직임으로 추측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믿지 못할 사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우리 인간은 아무런 과학적 장비가 없던 수천년전부터 우리의 눈 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그 사이의 연결성과 관계성을 계산해내었다. 너무나 신기하게 그 추측들은 현재의 과학으로 증명되고 있고 대부분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인간의 직관성은 앞서 언급한 '인간= 우주'라는 개념을 좀 더 공고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우주를 탐험하고 연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이 책을 우주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책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나 자신 = 우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이트홀과 블랙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가 빨아들이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들과 밀어내고 있는 상황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는 일종의 생각의 선이 결국은 하나라면 (이 책에서 말하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하나의 선상에 존재한다는 물리적 현상처럼 말이다) 나의 생각은 편견이나 취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밀어냄과 받아들임의 선상에 존재하는 일종의 자연 현상일 뿐인 것이다. 나의 생각에 여러 측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소위 상황이라는 것에 맞게 달라지듯 말이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가지려는 그래서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은 오히려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다시, 물리학으로 돌아가자.  물리학적 측면을 생각해서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적 현상 중 화이트홀과 블랙홀은 정말 우리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체물리학을 설명할 때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것이 어쩌면 우주의 탄생과 소멸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정설이다. 그리고 빅뱅의 힘이 블랙홀이 가진힘과 화이트홀이 가진 힘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들여다 보는 이유는 행성과 항성의 움직임 그리고 상호작용이 바로 별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별의 탄생은 우주의 탄생을 작은 단위 측면에서 보여주는 상황이다. 뭉치고 에너지를 얻고 팽창하고 폭팔하고 소명하고 다시 뭉치고 하는 과정들 말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듯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현재로선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우선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관측하고자 하는 행성과 항성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과학적 기술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화이트홀에 대한 설명은 결국 가설일 뿐이다. 아무리 논리적인 물리적 지식으로 설명되었다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생각해야 한다. 뉴턴의 사과가 우리에게 중력이라는 힘을 생각하게 했고, 그 중력이란 힘이 결국 공간의 휘어짐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해체라는 단계까지 생각하고 소멸과 생성 그리고 분해와 결합이라는 공상과학에 나올만한 이야기들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화이트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비교적 잘 알려져 온 블랙홀은 조금은 부정적 단어였다 즉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멸적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써진 대로라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질이 모두 소멸되거나 분해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저자인 카를로 로밸리의 말처럼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이나 물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우리의 시야에서 관측에서 사라졌으니 소멸로 보는 것일 뿐이다.  소멸이 아닌 생성,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화이트홀이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과 물체는 대척점에 있는 화이트홀을 통해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블랙홀이 반드시 존재하듯 화이트홀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물리적 지식과 관측으로 보면 그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먼 훗날의 일이지만 우리 지구도 소멸한다고 한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 훗말에는 화이트홀을 통해 다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블랙홀 속의 그 공간을 잘(?) 통과만 한다면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소위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릴적부터 과학시간에 우리의 지구는 물론 우리의 우주는 언젠가는 모두 소멸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정말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할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그래도 소멸할 곳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물론 우리 인간의 생명 또한 유한하지만 ) 그런데 이 책은 화이트홀을 통해 모든 물질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책을 덮는 순간 묘한 기분 좋음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양적 철학과 불교적 개념이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불교를 잘 모르지만 공즉시생 생즉시공이란 말은 알고 있다. 이 말을 여기에 적용해보면 묘하게 딱 맞아떨어진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반대의 개념이지만 그 두 개념은 결국 하나의 선상에 놓인 같은 개념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 책 <화이트홀>은  물리적 지식이 없이도 참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다. 더불어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 자기자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제 천천히 여름과 이별하고 있는 시간이다. 가을이 오면 한 번 더 이 책을 펼쳐볼 생각이다. 그렇게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며 우주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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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비소리는 독서하기에 제격인 것 같아요. ^^ 


제가 얼마전부터 아주 좋아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고 있어요.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 평전>입니다. 여러 좋은 평들이 있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자 슈테판츠바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이분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의 글에 그만 확 꽂혀버렸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이 책까지 읽게되었어요. 책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그때그때의 느낌으로 연결연결되어 계속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에라스무스라는 아주 위대한 분에 대한 일종의 전기형식의 글입니다. 전기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치부를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른 전기형식의 글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네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워낙 냉철한 분이시다 보니 마치 그것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처럼 슈바이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에라스무스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게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에라스무스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인문,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은 저자가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말할 정도이구요. 아마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에라스무스가 처했던 상황이 중첩되면서 저자가 에라스무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영향력이 커지면 그 어떤 세력들이 접근해 와 그들의 무리 속에 넣으려고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도 에라스무스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고뇌를 겪었고 그 점에서 서로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게 말입니다. 


제가 느낀 에라스무스의 매력은 그가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조성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창조적인 인간은 소위 광기를 동반하기 일수인데 에라스무스는 누구보다 광기를 배척하기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광기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비범한 사상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볼테르와 레싱의 표현을 빌려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라고 할까요. 그는 불명확한 모든 것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에 본성적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가 증오한 것은 바로 애매함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함이야 말로 분별력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번역본보다 언젠가 독일어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 좀 더 해야겠지만요. 대학때까지 배운 독일어 실력이 살아있길 바라면서ㅋ)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분별력과 명확함을 내세운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읽다 보니 그 답이라고 느껴질만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이 학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온함이라고 한 대목에 전 주목하고 싶습니다. 평온함이란 결국 명확함을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판단할 때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많으 고민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잔항요. 에라스무스도 사람인지라 공부를 거듭할수록 사회현상, 인간본질, 관계 등 모든 면이 그에게 고민거리로 다가와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으로 아마 평온함을 꼽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평온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학문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세간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깐요. 이건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은 홀로 있어도 고뇌에 빠지고 여럿에게 속해도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끝까지 화합(자신을 영입하려고 싸웠던 적대적 양대 세력의 화합) 이라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후대에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하나의 방향 즉 학문에 매진하는 것에 더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펴낸 거죠. 그 유명한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군주론에 표현된 마키아베릴의 사상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민중들에게 개인적인 권리, 이기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권리보다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인류의 우호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국가의 권력의지, 힘의 의지보다 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정의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립 해소라는 위대한 민문주의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했던 여러 국가들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의 세계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집필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기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에라스무스를 위대하다고 칭한 이유또한 짐작이 가네요. 


명료한 정신, 순수한 도덕의 힘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힘없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덕 정신을 형성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영원하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화합의 정신을 에라스무와 저자 스테판 츠바이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책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를 좋아한 단순한 이유로부터 나의 손에 쥐어진 이 책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난 창조적인 힘은 명료함에서 나오고, 명료함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의 원리가 인간 사회의 지배논리가 되고 역사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과 동시에 순수한 도덕과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인지 알게 되었네요.

 

덧)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번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책인 것 같아요. 책 내용 중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하다 종교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여러 의견들이 갈리는 부분이고 보시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걸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을 선택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알라딘이 알려준 저의 기록. (저는 알라딘에서 이런 거 알려주는 거 좋더라구요 ^^) 더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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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평전 - 광기에 맞선 이성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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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비소리는 독서하기에 제격인 것 같아요. ^^ 


제가 얼마전부터 아주 좋아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고 있어요.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 평전>입니다. 여러 좋은 평들이 있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자 슈테판츠바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이분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의 글에 그만 확 꽂혀버렸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이 책까지 읽게되었어요. 책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그때그때의 느낌으로 연결연결되어 계속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에라스무스라는 아주 위대한 분에 대한 일종의 전기형식의 글입니다. 전기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치부를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른 전기형식의 글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네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워낙 냉철한 분이시다 보니 마치 그것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처럼 슈바이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에라스무스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게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에라스무스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인문,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은 저자가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말할 정도이구요. 아마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에라스무스가 처했던 상황이 중첩되면서 저자가 에라스무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영향력이 커지면 그 어떤 세력들이 접근해 와 그들의 무리 속에 넣으려고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도 에라스무스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고뇌를 겪었고 그 점에서 서로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게 말입니다. 


제가 느낀 에라스무스의 매력은 그가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조성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창조적인 인간은 소위 광기를 동반하기 일수인데 에라스무스는 누구보다 광기를 배척하기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광기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비범한 사상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볼테르와 레싱의 표현을 빌려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라고 할까요. 그는 불명확한 모든 것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에 본성적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가 증오한 것은 바로 애매함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함이야 말로 분별력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번역본보다 언젠가 독일어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 좀 더 해야겠지만요. 대학때까지 배운 독일어 실력이 살아있길 바라면서ㅋ)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분별력과 명확함을 내세운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읽다 보니 그 답이라고 느껴질만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이 학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온함이라고 한 대목에 전 주목하고 싶습니다. 평온함이란 결국 명확함을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판단할 때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많으 고민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잔항요. 에라스무스도 사람인지라 공부를 거듭할수록 사회현상, 인간본질, 관계 등 모든 면이 그에게 고민거리로 다가와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으로 아마 평온함을 꼽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평온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학문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세간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깐요. 이건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은 홀로 있어도 고뇌에 빠지고 여럿에게 속해도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끝까지 화합(자신을 영입하려고 싸웠던 적대적 양대 세력의 화합) 이라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후대에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하나의 방향 즉 학문에 매진하는 것에 더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펴낸 거죠. 그 유명한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군주론에 표현된 마키아베릴의 사상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민중들에게 개인적인 권리, 이기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권리보다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인류의 우호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국가의 권력의지, 힘의 의지보다 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정의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립 해소라는 위대한 민문주의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했던 여러 국가들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의 세계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집필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기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에라스무스를 위대하다고 칭한 이유또한 짐작이 가네요. 


명료한 정신, 순수한 도덕의 힘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힘없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덕 정신을 형성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영원하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화합의 정신을 에라스무와 저자 스테판 츠바이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책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를 좋아한 단순한 이유로부터 나의 손에 쥐어진 이 책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난 창조적인 힘은 명료함에서 나오고, 명료함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의 원리가 인간 사회의 지배논리가 되고 역사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과 동시에 순수한 도덕과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인지 알게 되었네요.

 

덧)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번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책인 것 같아요. 책 내용 중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하다 종교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여러 의견들이 갈리는 부분이고 보시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걸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을 선택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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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로 환산해서 정리해 보면 뭔가 좀 더 다른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최애 분야는 확실히 관심이 있는 분야가 맞는 거 같고, 최애 작가 또한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분임에 틀림 없네요. 

음반과 블루레이를 이렇게 많이 샀나 싶어 살짝 갸우뚱 한데, 이건 좀 줄여야 겠다 생각했네요. ㅋ 


어쨌든 보통 연말에나 하게 되는 이런 류의 정리를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하니 기분이 좀 묘합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이 책들 또한 다음의 기록에 속하게 되겠죠.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그 끝이 오지 않을까하는 어두운 생각도 교차합니다. 

밤이라 그런가 봅니다. 

확실히 밤은 그것도 어느 달의 마지막 날의 밤은 생각이 많아집니다. 

오늘은 6월 30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버리고 

기억의 편린들이 다시 맞춰지면서 의문이 들었던 그 기억의 

해답이 다가왔네요. 이제야, 대체 왜 이제야. 

지나간 건 지나간대로라는 노랫말처럼 생각하고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은 밤 같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면서 100세까지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렇게 된다면 922권을 읽을 수 있다는 건데 어떤 책들로 922권이 채워질까하는 기대와 설렘도 갖게 되네요. ㅎㅎ 왠지 죽음, 끝이라는 씁쓸함과 더 읽을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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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의 모든 역사>(매튜 코브 지음, 이한나 옮김)를 읽었다. 부제인 '인간의 가장 깊은 비밀, 뇌를 이해하기 위한 눈부신시도들'처럼, 책은 뇌를 연구한 지금까지의 시도들과 그 성과 그리고 정보를 싣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뜻은 

심장이 아프다는 말일까? 아니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일까?


  우리는 심장은 감성이고 머리()는 이성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인공지능 로봇에게 거기엔 심장이 없잖아 라고 말하며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획으로 삼기도 한다. 이처럼 우린 심장인간이라도 말하는 것 같다. 여전히 말이다

  지난 드라마(제목이 파리의 연인? 기억이 가물가물)  명대사 중에 이 안에 너 있다라고 말 할 때조차 그녀의 손을 남자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하는 장면이지만, 내 안에 너 있다와 같은 의미로 '나 = 심장'으로 여기는 대사이다. 만약 그녀의 손을 머리에 대고 이 안에 너 있다.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드라마의 장르가 코미디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기관으로 표상될까? ? 심장? 아님 영국 축구스타 베컴이 나온 광고 카피처럼 둘 다?

이 책은 이런 우리에게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뇌냐? 심장이냐?> 이 책을 펼치며 계속 되뇌어야 하는 질문이다. 

책은 뇌의 역할이 무엇이며, 생각과 감정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의 순서와 함께 보여준다. 


   우선, 고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의 근원이 심장에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망한 뒤, 그리스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침내 뇌의 역할에 대한 통찰이 시작된다. 인체를 해부하고 연구한 덕에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는 뇌의 핵심적인 두 개 부위, 즉 피질과 소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어느 정도 규명해낼 정도로 뇌구조를 알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생각과 감정의 근원이 뇌냐 아니면 심장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로마 시민 갈레노스는 (서기 129년 터키 출생) 뇌가 프노우마(pneuma)’라는 특별한 공기가 뇌에서 생성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기관은 심장이 아닌 뇌에 종속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과거 철학자들의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지 못한다


   다음은 중세다. 

    14세기 초, 루치오 몬디노의 <몬디노 해부학>이라는 논문으로부터 시작해 베살리우스의 연구까지 이제 사람들은 본격적 의심을 시작한다. 뇌일까? 심장일까? 중세는 이렇게 의심한 것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강한 의구심과 함께 그것을 찾고자 주어진 지식 내에서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시대를 대표했던 셰익스피어의 대사로 대표될 듯하다.  

  “말해주세요.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났나오? 심장인가요? 머리인가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에서)


   이제 근세. 

  17세기는 뉴튼과 같은 과학자들과 함께 우주를 수학화하여 바라보는 시기였다. 그러한 과학적 사고는 뇌에 대한 생각과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게 했다18세기에 들어서서야 뇌의 본질에 대해 학술적이고 대중적인 생각이 기초하게 된다. 전기 자극 실험이 시작된다. 개의 머리를 잘라 전기를 흘려보내고 이를 관찰하는 끔찍한 실험까지 일어난다. 인간의 이성과 성찰이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과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또 그로인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지 두려워지는 일들이다.


  이어서 근대.

안타깝게도 19세기에는 더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자행된다. 그런데 전 이 실험들은 결국 뇌의 구조와 역할을 밝히는데 획기적인 성과를 내게 된다. 위대한 발견이라 명명될 정도로.


  현대를 거쳐 현재까지.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학자들은 컴퓨터와 인간의 뇌의 유사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물학적 피드백이 신호로서 전환 가능할까.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의식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의식을 가진 기계인건가? 이러한 의문들은 여러 실험들로 인해 곧 답을 찾게 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인류라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뉴련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디지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이버네틱스 및 뇌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책 275 page)

 

이제 우리는 신경세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신경 부호의 존재는 뇌의 연구에 수학을 입힌 것이다. 앞서 인류가 우주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수학적 방법을 사용한 것처럼, 뇌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수학의 힘을 빌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또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신경세포는 제어가 가능한가? 는 물음이다. 쥐를 이용한 미로 실험을 통해 해마가 일화기억을 부호화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곧이곧대로 묘사한 지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간 정보가 어떻게 해마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는지도 알아낸다. 기억의 생화학 기제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신경전달물질 외의 분자들도 시냅스 활동 및 응고화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아낸 것이다. 연구는 이제 다양한 방면으로 진행된다. 수면 연구, 비시지각, 호르몬, 정서, 뇌 발달 및 유전자가 뇌에 미치는 방식 등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드디어 인간의 뇌를 흉내 낸 기계들의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컴퓨터를 시작으로 많은 기계들이 있었지만, 최근의 AI는 그 방점을 찍었다. 일례로 우리는 얼마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을 지켜봤다. 결과는 알파고의 승리였지만, 전패가 아닌 단 한 번의 승리로 이세돌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아직은 인간을 확연하게 앞지른 인공지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쁨 때문이었는지, 아님 다른 그 무엇이 인간의 편을 들게 생각하게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간의 뇌는 인공지능의 뇌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벤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뇌의 실체를 밝히는데 필요한 이론적 연구는 너무 부족하다고 책은 말한다.

 

책의 처음에 언급되었듯이우리는 뇌를 컴퓨터와 비교하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회로와 매커니즘을 컴퓨터와 비교하면서 이해하려 한다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이다즉 인간과 유사한 기계를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기계가 인간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준 교훈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잠시 다시 짚어 봐야 할 것이 있다.  뇌인가? 심장인가?

오랜 역사와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다른 대답 혹은 두 개의 대답 사이에서 고민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달리 던져 보면 어떨까? 혹 질문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질문한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론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책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은 마치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라는 철학적 담론을 실은 철학책 같다. 이런 질문들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형태를 달리한 질문들은 개인의 화두가 되어 평생을 함께한다. 이어 그 생각의 과정에 뇌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연구)해야 하며, 더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인류의 존재론적 물음에 답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찾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루시’(LUCY, 뤽 베송 감독, 2014)

우리 배우인 최민식님이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한 영화다. ^^ 

이 영화는 인간의 뇌를 100% 사용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기본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마 이렇게 되려면 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절정에 다다라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잠시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주인공 스칼릿 조핸슨(루시 역)은 자신의 뇌를 100%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범죄조직의 비밀 약을 몸속에 넣고 운반을 하다 약이 터져서 일어난 일종의 사고로 인해서다. 영화는 그녀가 자신의 뇌를 24% -> 30% -> 40% 급기야 100%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액션과 함께 뇌사용에 대한 설명을 화려한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오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고, 타인의 기억도 읽을 수 있다. 40%가 넘어서면서는 공상 과학 수준으로 이야기가 발전한다. 영화 속 박사인 모건 프리먼 (노건 역)의 말처럼 evolution(진화)revolution(변혁, 혁명)으로 변하는 것이다. 모든 감각이 깨어나고, 다른 에너지를 흡수해 능력을 향상시키고, 시공간 여행을 하고, 그야말로 상상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단계. 그게 바로 뇌사용 100%의 단계라고 영화는 말한다.


뇌 과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한다면, 이 영화와 같은 일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다른 존재로 진화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런 설렘과 기대로 책장을 덮었다. 


어설픈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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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16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어요^^
마음의 위치도...!

scott 2021-12-24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수천님!
상상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도록 !
저도 오늘 뇌 사용을 욜심히! ㅎㅎ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ヾ( *・ω・) °・ 🎁
`し( つ つ━✩* .+°
(/しーJ

yamoo 2023-04-26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샀어요!!
이 리뷰를 읽었던 게 결정적인듯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