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비소리는 독서하기에 제격인 것 같아요. ^^ 


제가 얼마전부터 아주 좋아하고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읽고 있어요.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 평전>입니다. 여러 좋은 평들이 있어서 저도 읽어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자 슈테판츠바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이분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의 글에 그만 확 꽂혀버렸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이 책까지 읽게되었어요. 책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렇게 그때그때의 느낌으로 연결연결되어 계속해서 읽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에라스무스라는 아주 위대한 분에 대한 일종의 전기형식의 글입니다. 전기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치부를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다른 전기형식의 글과의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생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이네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워낙 냉철한 분이시다 보니 마치 그것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처럼 슈바이크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제격인 책입니다. 에라스무스를 알고 이해하기에는 말이죠.


책을 읽을수록 에라스무스에게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에라스무스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인문,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은 저자가 말했듯이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말할 정도이구요. 아마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에라스무스가 처했던 상황이 중첩되면서 저자가 에라스무스처럼 행동하고 사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영향력이 커지면 그 어떤 세력들이 접근해 와 그들의 무리 속에 넣으려고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잘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도 에라스무스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고뇌를 겪었고 그 점에서 서로에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에게 말입니다. 


제가 느낀 에라스무스의 매력은 그가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창조성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더불어 창조적인 인간은 소위 광기를 동반하기 일수인데 에라스무스는 누구보다 광기를 배척하기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광기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어도 비범한 사상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볼테르와 레싱의 표현을 빌려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라고 할까요. 그는 불명확한 모든 것과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에 본성적으로 반발했습니다. 그가 증오한 것은 바로 애매함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함이야 말로 분별력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번역본보다 언젠가 독일어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 좀 더 해야겠지만요. 대학때까지 배운 독일어 실력이 살아있길 바라면서ㅋ) 


에라스무스가 이렇게 분별력과 명확함을 내세운 이유가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읽다 보니 그 답이라고 느껴질만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이 학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온함이라고 한 대목에 전 주목하고 싶습니다. 평온함이란 결국 명확함을 바탕으로 분별력 있게 판단할 때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많으 고민거리가 생기기 마련이잔항요. 에라스무스도 사람인지라 공부를 거듭할수록 사회현상, 인간본질, 관계 등 모든 면이 그에게 고민거리로 다가와 그의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으로 아마 평온함을 꼽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평온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학문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세간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깐요. 이건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은 홀로 있어도 고뇌에 빠지고 여럿에게 속해도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끝까지 화합(자신을 영입하려고 싸웠던 적대적 양대 세력의 화합) 이라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후대에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쪽에도 속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하나의 방향 즉 학문에 매진하는 것에 더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펴낸 거죠. 그 유명한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군주론에 표현된 마키아베릴의 사상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군주들과 민중들에게 개인적인 권리, 이기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권리보다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모든 인류의 우호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국가의 권력의지, 힘의 의지보다 말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정의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립 해소라는 위대한 민문주의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했던 여러 국가들의 통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의 세계에서는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집필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대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기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에라스무스를 위대하다고 칭한 이유또한 짐작이 가네요. 


명료한 정신, 순수한 도덕의 힘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힘없는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덕 정신을 형성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영원하고 숭고하게 느껴지는 화합의 정신을 에라스무와 저자 스테판 츠바이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책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를 좋아한 단순한 이유로부터 나의 손에 쥐어진 이 책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난 창조적인 힘은 명료함에서 나오고, 명료함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의 원리가 인간 사회의 지배논리가 되고 역사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과 동시에 순수한 도덕과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하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인지 알게 되었네요.

 

덧)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번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책인 것 같아요. 책 내용 중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하다 종교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여러 의견들이 갈리는 부분이고 보시는 분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걸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을 선택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알라딘이 알려준 저의 기록. (저는 알라딘에서 이런 거 알려주는 거 좋더라구요 ^^) 더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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