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 관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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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아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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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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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봤다. 20년전 우리는 영화 속 인물인 앤해서웨이와 닮아 있었다. 꿈 많았고, 의욕은 넘쳤지만 경험은 부족했고, 실수투성이에 늘 불안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렀고, 이제 영화 속 그녀도 20년이 지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를 지켜보는 우리도 그 만큼의 세월을 흘려 보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렀지만, 그 시간을 보내온 우리의 모습은 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가졌었던 꿈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여전히 꿈꾼다. 

  영화의 여운만큼이나, 우리는 영화 속 등장인물과 동일하게 우리에게서도 흘러간 20년의 시간에 대해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두 주인공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로 옮겨 갔다. 우리 나라를 방문한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까지 우리의 수다 주제가 되었다.

    커피가 바닥을 보여 물을 한 잔 받아오면서 그 인터뷰(정확히는 유재석의 유퀴즈)에서 메릴 스트립이 한 말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 되었다. "여배우는 나이 40이 정점이다. 그 이후는 비중이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언제부터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냐는 질문에, 어릴 때 UN을 방문한 적이이 있었는데 여성 통역사들을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당시 시대의 여성은 간호사나 선생님 정도가 되어야 하는 (그런 꿈을 꾸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게 그때 사회의 통념이었다.' 라는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 이런 말은 아니고 대략적으로 이런 뉘앙스의 말로 기억된다)

  

  우리는 현재의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이 그리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과 많이 변했다라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런 이야기는 또다시 젠더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페미니즘하면 빼놓을 수 없는 수전 손택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알라딘에서 구입한 그녀의 책 '여자에 대하여'.

 


 


  수전 손택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책 내용 중 수전 손택은 여성의 나이듦은 남성과는 달리 대략 50무렵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신체적인 변화와 정신적 변화 뿐만 아니라 여성이 그동안 여성으로서 살아오다가 순간 다른 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즈음에 여성은 나이든 남성과는 달리 (남성은 나이가 들어도 남성의 성적인 매력을 다른 것들 즉 사회적 지위, 돈 등으로 충분히 치환할 수 있지만) 여성의 성적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말이다. 사회는 (남성 중심인 사회는 남성의 시작각이 대세가 되고 더 존중되는 것처럼 여겨지므로) 나이 든 여성에 대해 더이상 가치 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메릴 스트립이 말했던 여배우의 나이는 40까지인 것 같다 그 이후의 역할은 비중이 확연히 줄어들거나 엄마 역할 정도라고 말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표현이 좀 과격하지만, '여성 해방 투쟁'이란 문구는 내가 대학생 시절에 학교 자보판에 항상 걸려 있던 문구였다. 사실, 인간은 남성과 여성 구분을 떠나 수천년간 지배, 피지배의 관계에 빠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지배하고 종속시켜왔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의 생각이 옳은 것인냥 무조건적으로 순응해야 했고 거부했을 시에 치러야 하는 댓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근본 관계와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차별적, 종속적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여성 해방 투쟁'의 근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의 이야기의 귀결은,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더해진다는 것이었다. , 나이듦 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여성의 편이 아니라 남성의 편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성은 특정 시점에 여성을 잃어 버린다. 물론 그것이 훨씬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이런 변화를 겪으며 혼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여성은 진보하기보다는 퇴보한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여성의 실질적 능력 저하보다는 사회의 기대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든 여성은 사회적으로 큰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무언가((이 때의 무언가는 사회를 발전 시키는 이론이나 기술적 측면)를 배우기에도 늦었고, 발전 가능성도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고, 그런 지배적 인식들이 나이 든 여성을 스스로 일어서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나이 든 엄마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면 찬성한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된 엄마의 시간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엄마가 원하는 것이 20대 때의 그 꿈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현실적 이유로 무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렇게 엄마는 다시 말해 나이든 여자는 사회적 판단에 귀속되어 자신이 해야 것을 사회적 틀에 끼워맞춘다. 누군가는 이것이 옳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스스로 그렇게 결정 내리는 것과 사회적 틀에 갇혀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의 차이는 다른 것이다.

 

<이제야 수전 손택을 제대로 읽는다>

 

  누구든 그 상황이나 입장에 서보지 않으면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수전손택의 글도 그렇다. 그녀가 말한 여성의 나이듦에 대한 소해는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은 여성은 실감할 수 없는 것 같다. 단순히 갱년기 증상에 대한 호르몬 영향이라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수전 손택은 여성 그리고 여성이라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간극을 길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그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건 남성을 역차별하고 여성을 위한 즉 여성이 주인이 되어 남성을 종속화시키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여성과 남성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는 완벽하게 동일하지만 ''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그 다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커진다. 어릴 적 여성은 남성과 거의 동일하다 신체적 능력 또한 그렇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남성은 여성보다 월등히 강해진다. 신체적 능력에서도 그렇고 사회적 인식과 대우 그리고 나아갈 수 잇는 공간 마저도 넓어진다. 그렇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을 받게 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그 속도 또한 엄청나게 빨라졌지만 그래도 여성은 여전히 갇힌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일부 남성은 역차별이란 말로 이런 여성들의 외침 마저도 외면한다.

 

  <악프2>가 차갑고 냉철하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권위적인 상사와 모든 가능성에 도전해보자 그런 벽을 깨부수고자 했던 신입 사원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면 수전 손택의 <여자에 대하여>는 너무나 굳건한 사회의 틀(벽) 즉 남성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의 글이다. 두 이야기를 하나로 보면, (관념적으로 말이다) 일맥상통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건 <악프2>의 권위주의의 상징인 매릴 스트립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런 해석들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린 살아가면서 (살아오면서) 많은 벽을 만난다. 그 벽들의 대부분은 너무나 단단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 왔다. 누군가는 부딪히라 말할 테고, 누군가는 순응하라 말할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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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의식 연구
한동훈 지음 / 보민출판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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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의식 연구>라는 책을 받았다. 



  요즘 어디를 가나 AI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된다. 이 책 역시 그런 인공지능 로봇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적 로봇은 '정의'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악을 상대로 싸우는 로봇 만화를 보며 그 로봇의 불굴의 의지를 노랫말로 표현한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나도 그런 사람 아니 로봇이 되리라 마음 먹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이제 로봇은 더 이상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 뉴스에서는 생산직을 대체할 우리 국산 로봇이 소개되기도 했다. 쉬는 시간도 필요없고, (충전 시간은 필요) 퇴근 시간도 필요 없고, 실수 또한 최소화 하고, 심지어 야간 근무 때는 조명 조차 필요없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라움을 곧이어 두려움과 걱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이제피할 수 없는 미래이고, 현실이다. 


  이 책 <로봇의 연구>는 로봇의 발전과 함께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이 인간과 얽히고 섥히면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화자는 과학적 지식과 함께 이야기를 나열해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 가족의 이야기도 묻어 있다.


  책 속의 로봇은 우리 인간과 닮아 있다. 마치 인간의 감정과 동일한 것을 느끼고 그것으로 촉발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걸 지켜보고 수습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로봇을 만들 때는 어떻게하면 좀 더 인간에 가까운 아니 인간과 똑같은 것을 만들까 고민했지만, 정작 그 결과물이 인간과 똑같이 되자 당혹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사고뭉치다. 인간에게 완벽한 것은 신이다. 오직 신만이 인간의 모든 단점을 소멸시키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추앙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인간의 하등조직으로서 소위 부리는 존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로봇이 우리 인간과 똑같음을 뛰어 넘어 신과 맞먹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로봇을 신처럼 섬겨야 하고, 신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랐듯이 로봇의 말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의지로 로봇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의 의지에 우리가 조종당해야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조금은 단순하게 생각되는 지점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들마저 천착하면 두려움이 된다. 이 두려움은 경이로움의 또다른 말이다. 이젠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로봇과 거기에 탑재될 인공지능은 막을 수 없는 현실이며, 곧 도래할 현실이다. 

  책장을 덮으며 다른 관련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의 작은 힘이 부족한 생각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최소한 생각이라도 말이다. 기계의  시술이 인간의 기술을 앞서는 시대에 우리 인간이 기계를 앞설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책과 같은 상상력, 인문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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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버나움

감독, 나딘 라바키 / 프랑스 / 2018

- 제 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워상 수상.

- 뉴욕타임즈 올해의 영화 TOP 10 선정.

- 제 76회 골든 글러브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 전세계 영화제에서 관객상 8관왕 수상.

--------------------------------------------------------------------- 이야기.

시작부터 강렬하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합니다"

주인공인 자인의 대사다.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면,

빈민굴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수많은 형제들과 살아가는 자인.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누울 곳조차 없는 그곳이 그(들)의 집이다.

이런 와중에도 부부의 금술은 어찌나 좋은지, 현대판 흥부집이다.

자인은 동생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어여쁜 여동생 사하르가 여인이 되는 성장기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결정과 자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

결국, 자인은 가출을 한다.

떠돌던 자인은 라힐을 만나게 된다.

라힐은 불법체류자에 미혼모다. 그녀는 체류증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면서 판잣집에서 산다.

청소일을 할 때면 아이(요나스)를 화장실 한켠에 놔두고 돌봤지만 이제는 자인에게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간다. 자인은 마치 자신의 동생처럼 자식처럼 아이(요나스)를 돌본다

비록 남이 먹다 버린 케이크를 주워와 생일파티를 하지만, 그들은 잠시 행복함을 맛본다.

하지만 신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인, 라힐, 요나스는 뿔뿔이 흩어지고,

여동생 사하르에게 일어난 불행을 전해들은 자인은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그만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갇힌다. 감옥은 욕설과 구타가 가득한 곳이다.

신은 하나를 앗아가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준다고 한다. 인간이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지만, 자인은 대체 무엇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자인은 부모를 고소하고, 법정에서 부모를 마주한다.

그리고 판사에게 말한다. "부모님을 고소합니다."

---------------------------------------------------------- 나의 평~

- 영화는 던지는 메시지만큼이나 강렬하다. 하지만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다. 감독 나딘 라바키의 이전 작품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감독님은 사이사이 미소를 짓거나 웃을 수 있는 즉 무거운 주제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두신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나딘 라바키 감독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1차 후보에 오른 최초의 아랍 여성감독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자인 역의 자인 알 파리아는 실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던 소년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그가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며 영화관계자들이 그와 그 외 사람들을 계속 돕고 있다는 자막을 보게 된다.

- 영화는 다큐처럼 현실적이면서도 극도로 영화적이다. 지극히 감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극도로 이성적이다. 마치 헤겔의 명제처럼 말이다. 또한 변증법과 함께 관객들은 희망과 절망을 보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를 떠노는 느낌으로.

- 몇 발짝 물러서서 보면,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가 보일 것이고, 천착해서 보면, 인물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엄청난 무게의 주제를 가진 난생 처음보는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문제, 다산과 난산으로 인한 죽음, 빈부격차, 인권 사각지대의 실태, 남자들의 가학적 성욕과 무책임 그리고 이에 동조하거나 방조하도록 길들여진 여성들, 출생과 죽음, 가족의 붕괴와 해체, 인간의 기본 인권의 문제, 이상과 현실, 나약함과 비겁함,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불행,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욕망과 처절한 고통 마저도 삼켜버리는 망각의 늪 등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복잡다단할 뿐 아니라 하나같이 무겁고 난해하다. 하지만 어렵게 꼴을 맞추면 결국 우리 인간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나와 상황과 환경은 다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흐른다.

- 영화는 우리에게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눈 돌릴 것인가? 똑바로 쳐다 볼 것인가? 아이의 절규같은 외침과 부모의 피를 토하는 듯한 항변이 팽팽히 맞서고, 어느 누구도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을 재판이라는설정을 통해 보여주며,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으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묻는다.

이야기는 이런 질문과 함께 확장되어, 출생과 사망(출생신고서와 사망신고서라는 메타포의 대비)의 담론에 도달한 영화는 주인공의 억지(강요) 혹은 자의(자발)가 동시에 읽히는 미소짓는 얼굴로 마무리된다.

- 좋은 영화는 다양하게 읽히며 해석된다. 이 영화 역시 그런 특징이자 장점을 지녔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보려고 하는 만큼 보이고, 읽으려고 하는 만큼 읽힌다고. 보는 이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이 영화의 스펙트럼은 무한히 넓어질 것이다. 끝으로, 길거리 캐스팅의 기적이라 불린 배우들의 연기는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경이롭다. 그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였기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 참고 >

가버나움 Capernaum



‘나훔의 마을’이란 뜻. 갈릴리 호수 북서 해안의 성읍. 신약에만 언급되는 성읍인데, 이곳은 신약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이 있는 큰 성읍이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세리 마태는 이곳 가버나움 세관에서 제자로 부름받았다(마 9:9-13). 예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특히 백부장의 중풍병 걸린 하인(마 8:5-13),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마 8:14-15),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막 2:1-12) 그리고 왕의 신하아들(요 4:46-54) 등을 치유하신 사건이 있었다. 또 이곳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과 관련하여 생명의 떡에 관한 강화와 많은 다른 말씀들을 전해주셨다(막 9:33-50). 하지만 이런 놀라운 기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가버나움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1:21-24; 눅 10:15).

[네이버 지식백과] 가버나움 [Capernaum]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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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3-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버나움....기억하겠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3-29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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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을 고를 때 드는 생각이 있다. 

현재의 내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책 예를 들어 수험서나 자격증 취득서 혹은 음식, 취미 생활 등 읽고 나서 바로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책들 그리고 그 반대개념으로 현실에서 즉각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나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미래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들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으로 보면, 후자에 속한다.  사실,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이니 하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즉 다시 말해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지구 환경과는 정말 무관한 사실들이다. 내 기대 수명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우리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와는 1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홀>이란 책을 구입했고, 읽게 되었고, 빠져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이다. 그의 전작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를 읽고 무척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하루하루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에 뭔가 한줄기 빛처럼 그 책 하나가 나의 삶을 밝혔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 우리의 삶이 단순히 현실적인 먹고 살며 생존하는 문제에만 천착된다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하는 조금은 철학적이고 담론적인 질문 말이다.



이 책은 단순한 물리적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전작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철학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해야할 물리적 지식은 없어도 된다. 물론 그런 지식이 조금 있다면 도움은 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나의 착각이거나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이 책을 통해 화이트홀에 대한 물리적지식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고 얻지도 않았다. 책의 첫장을 펴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오롯이 화이트홀과 블랙홀의 대비적 관점 그리고 그것이 동일선상에서 대척점에 존재한다는 담론적 측면만을 생각했다. 


이 담론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우리 인간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맞닿아 있다는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고 있을 듯 하다. 우리 인간의 몸이 우주만큼 복잡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말이다. 세포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 인간의 몸은 정말 우주의 저 넓은 공간 보다 넓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닮은 듯 다른 세포들이 인간의 몸을 지탱하고 바꾸고 한다. 우주의 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우주라는 공간을 꾸미고 있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앞서 언급한 전작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왔다. 아인슈타인으로 대변되는 상대성이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요즘 대세인 양자역학을 그것과 비교하며 물리적 지식을 아주 쉽게 풀어준다. 전작들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이 책을 읽는데 바탕이 된다. 


공간의 휘어짐은 중력이라는 힘으로 이어지고 이 힘은 결국 우주의 천체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으로 귀결된다. 그 흡입점에 블랙홀이 존재하고, 그 방출점에 화이트홀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블랙홀에 가본 적도 없고 그것을 가까이서 관찰해본 적도 없다. 지금의 관측과 가설은 모두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빛과 행성의 움직임으로 추측해 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믿지 못할 사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우리 인간은 아무런 과학적 장비가 없던 수천년전부터 우리의 눈 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그 사이의 연결성과 관계성을 계산해내었다. 너무나 신기하게 그 추측들은 현재의 과학으로 증명되고 있고 대부분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인간의 직관성은 앞서 언급한 '인간= 우주'라는 개념을 좀 더 공고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우주를 탐험하고 연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이 책을 우주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책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나 자신 = 우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이트홀과 블랙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가 빨아들이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들과 밀어내고 있는 상황들 그리고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는 일종의 생각의 선이 결국은 하나라면 (이 책에서 말하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하나의 선상에 존재한다는 물리적 현상처럼 말이다) 나의 생각은 편견이나 취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밀어냄과 받아들임의 선상에 존재하는 일종의 자연 현상일 뿐인 것이다. 나의 생각에 여러 측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소위 상황이라는 것에 맞게 달라지듯 말이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가지려는 그래서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은 오히려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다시, 물리학으로 돌아가자.  물리학적 측면을 생각해서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적 현상 중 화이트홀과 블랙홀은 정말 우리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체물리학을 설명할 때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것이 어쩌면 우주의 탄생과 소멸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정설이다. 그리고 빅뱅의 힘이 블랙홀이 가진힘과 화이트홀이 가진 힘으로 해석된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들여다 보는 이유는 행성과 항성의 움직임 그리고 상호작용이 바로 별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별의 탄생은 우주의 탄생을 작은 단위 측면에서 보여주는 상황이다. 뭉치고 에너지를 얻고 팽창하고 폭팔하고 소명하고 다시 뭉치고 하는 과정들 말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듯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현재로선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우선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관측하고자 하는 행성과 항성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과학적 기술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화이트홀에 대한 설명은 결국 가설일 뿐이다. 아무리 논리적인 물리적 지식으로 설명되었다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생각해야 한다. 뉴턴의 사과가 우리에게 중력이라는 힘을 생각하게 했고, 그 중력이란 힘이 결국 공간의 휘어짐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해체라는 단계까지 생각하고 소멸과 생성 그리고 분해와 결합이라는 공상과학에 나올만한 이야기들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화이트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비교적 잘 알려져 온 블랙홀은 조금은 부정적 단어였다 즉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멸적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써진 대로라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질이 모두 소멸되거나 분해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저자인 카를로 로밸리의 말처럼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이나 물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우리의 시야에서 관측에서 사라졌으니 소멸로 보는 것일 뿐이다.  소멸이 아닌 생성,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화이트홀이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물질과 물체는 대척점에 있는 화이트홀을 통해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블랙홀이 반드시 존재하듯 화이트홀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물리적 지식과 관측으로 보면 그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먼 훗날의 일이지만 우리 지구도 소멸한다고 한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 훗말에는 화이트홀을 통해 다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블랙홀 속의 그 공간을 잘(?) 통과만 한다면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소위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릴적부터 과학시간에 우리의 지구는 물론 우리의 우주는 언젠가는 모두 소멸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정말 먼 훗날의 일이라 생각할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그래도 소멸할 곳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물론 우리 인간의 생명 또한 유한하지만 ) 그런데 이 책은 화이트홀을 통해 모든 물질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책을 덮는 순간 묘한 기분 좋음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양적 철학과 불교적 개념이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불교를 잘 모르지만 공즉시생 생즉시공이란 말은 알고 있다. 이 말을 여기에 적용해보면 묘하게 딱 맞아떨어진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반대의 개념이지만 그 두 개념은 결국 하나의 선상에 놓인 같은 개념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 책 <화이트홀>은  물리적 지식이 없이도 참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다. 더불어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 자기자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제 천천히 여름과 이별하고 있는 시간이다. 가을이 오면 한 번 더 이 책을 펼쳐볼 생각이다. 그렇게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며 우주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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