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암살 위협이 계속되었지만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처음에 서재필의 귀국 소식을 들은 윤치호는 무덤덤했다.
1893년 에머리대학을 졸업하고 들른 워싱턴에서 의사가 된서재필을 찾아갔다가 차가운 대접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서재필은 서울에 오자마자 윤치호에게 여러 차례도움을 청했다. 이때 윤치호는 서재필이 벌이는《독립신문》이다소 무모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순 한글 신문이 성공하자, 영어로 일기를 쓰던 그는 한글 철자법에도 관심을 보이며 조금씩 바뀌었다. 윤치호는 여러 정파가 뒤섞인 독립협회도 처음에는 이상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윤치호가 완전히 생각을 바꾸는 계기는 1897년 7월배재학당의 졸업식이다. 각국 외교관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졸업생 이승만이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는 영어 연설로 주목받았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학생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공개 토론을 진행한 것이다. 이 모습에 수백 명 청중이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구하는 토론 수업을 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토론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협성회‘의 시작이다. 1년 만에 서재필이 이렇게 미래 세대를 키워내자 윤치호는 감동한다. 그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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