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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은 책 전체를 다 읽고 쓴 서평이 아니다. 단숨에 읽을 수 없는 책이 특성상. 책 첫 부분을 읽고 느낀 감상부터 써가는 연작 서평이다. 연작서평을 누군가가 읽어주고 덧글을 달아준다면 더욱 능동적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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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내 일상은 전형적인 직장인 모습이다. 아침에는 회사 도착시간에 딱 맞추어 일어나고. 전철타고 셔틀타고 회사에 도착한다. 오전과 오후에 교정-교열을 보고. 셔틀을 타고 집에 도착. 이후 집에서는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1~2시간을 때우며 때론 온라인 게임 1~2시간을 하다가 잠이 든다. 

 지독한 반복의 구조다. 물론 반복 자체에 긍-부정의 본질이 어찌 있으랴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반복의 삶은 그저 밥벌이 삶을 그저 살아가는 전형적 근대 임금노동자의 모습이다. 들뢰즈란 철학자의 유명한 책인 "차이와 반복"을 보면. 반복을 차이나게 하기. 차이나는 반복. 이것이 바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내 삶의 지독한 반복을 어떻게 긍정적 차이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바꿀 것인가. 

 회사 도서비지원금 때문에 요새는 원없이 책을 구입하고 있다. 한달 평균 16만원어치 책을 산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앞 문장 그대로 그저 책을 사는 행위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쌓여만 가는 책을 보며 나도 그만큼 발전하리라는 말도 안되는 유추.  

 이런 책들 대부분은 표지와 첫머리만 본고 덮는다. 사실 8시간 교정을 보며 활자와 씨름하는 나로서는 저녁 시간만큼은 활자에 해방되고픈 욕망이 간절해선지 진중하게 책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책들 중에 나를 사로 잡는 머릿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데리다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 서문의 핵심 주제다. 

데리다 책을 마냥 어려운 포스트모더니즘류의 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작 데리다는 자신의 후기 대표작 강연록 모음집인  "마르크스 유령들"의 서문을 일상적 언어와 상식적 수준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상적이고 쉬운 문구를 풀어내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또한 자꾸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선 '살아가는 법',

우리는 현재의 삶을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주어진 조건에 의문을 취하지 않고 묵묵히 삶의 반복 구조에 묻혀 산다. 그러나 데리다는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살아가는'은 지금(현재)도 아니도 미래완료(죽음)도 아니다. 바로 前-미래 시제격이 바로 '살아가는'의 의미다. 즉 지금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 앞에 있는 시간. 미래완료 전에 있는 시간이다. 

 이 살아가는 법은 그래서 유령이다. 분명 현실적 공간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지만 그 실체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법"이다. 그런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를 데리다는 강조한다. 

 이것은 정말 비장한 언어다. 그리고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문구다. 어찌 반복의 편안한 맹목적인 구조를 벗어나라 외치는 것인가. 지금의 반복의 구조를 조금씩 변화하는 법을 배우기를 데리다는 주장하는 듯하다.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자꾸 계몽해야 한다. 동시에 불어로 배우기는 가르치다란 뜻을 담고도 있다고 한다. 스스로 배우는 것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가르침( 이 가르침은 직접적 강의를 뜻할 수도 있지만 공자의 '인'사상처럼 한 사람의 변화가 주변에 좋은 향기를 내뿜고 이는 그 향기를 맡는 타자의 자발적 변화를 이끄는 의미도 될 수 있다)이다. 

 이런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정작 압권인 단어는 이를 수식하는 '마지막으로'이다. 마지막이란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번 마지막이란다. 그 절박함 그 비장함을 지녀야만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 차이나는 반복을 만들고 동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평범하면서 비범한 문구를 되새기며 나를 변화시키는 실천을 해야겠다. '마지막으로'의 심정으로. 책도 더욱 열심히 읽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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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7-12-22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주 재미있는 서평이네요.
이 서평을 읽으니까 머리말에 나오는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의 의미가
새롭게 읽히네요. :-)
앞으로 계속될 연작서평이 기대됩니다. ^^

크네히트 2007-12-2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밌게 읽어주어서 저도 좋네요~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김훈『남한산성』, 학고재 2007 리뷰


▶ 비(非)인간적이어서 더 인문적 가치를 지닌 소설 ◁


아침 8시 지하철. 그곳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한 정거장 지날수록 좁아지는 내 공간. 압축. 압착된다. 나는 분명 제자리에 서있고 싶은데, 지하철이 출발하면 좌·우로 움직인다. 아니 움직여진다. 그대로 밀려갔다. 그대로 밀려온다. 다음 정거장. 그곳엔 또 나같은 사람이 탄다. 우주 드넓은 공간에 휑하니 떠있는 과학책 속 지구. 그 지구 어느 조그만 좌표에 서울이 점으로 박혀있다. 그 서울의 띠끌만한 공간에 개미들보다 더 우글우글 땅 밑을 우리는 매일 아침 지난다. 내 의지는 부재하고 단지 내 땀만 분비된다.


김훈 『남한산성』을 읽는 내내 왜 자꾸 아침 8시 지하철 그 공간이 떠올랐을까. 거꾸로 왜 자꾸 아침 8시 지하철만 타면 『남한산성』소설이 뭉근히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왜 하필 아침 8시에 지하철을 타야만 하는가. 사실 7시 40분에만 타도 혹은 8시 20분에만 타도 그런 비(非)인간적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마 한반도 남단의 직장인 대부분은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회사에 9시까지 출근해야하고 대략 1시간 남짓 거리에 살고 있다면 8시가 최대 마지노선이란 사실을. 회사가 10시 출근이라면, 아침에 피곤함이 없다면 그 8시 ‘지옥철’ 타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직장인은 그 시간에 집을 나서고 그렇게 모두들 지옥철에서 만난다.


인간은 이렇듯 비슷하다. 어떤 필연적 구조에 갇혀 살아간다. 우리네 일상은 이렇게 꽉 막힌 8시 지하철과 비슷하지 않은가. ‘2007년’ 우리네 삶은 ‘1636년’ 남한산성에 있던 조상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미약한 존재인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답답한 지하철처럼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추상적 언어로 싸움한다. 동시에 남한산성 안의 사람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린다. 꽉, 막힘. 출성하지도 항거하지도 못하는 절망적 상황. 그 상황이 지금 우리네 민중의 일상과 너무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소설을 읽으며 내 현실과 지하철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출구없는 막막함만 보여준 김훈을 얄밉다고. 결국 동물적 삶만 추구하는 것 아니냐며 혹은 인간의 고귀함은 다 버리고 그저 생존을 위한 동물의 왕국을 묘사한 것이라 김훈에게 ‘날’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역(逆)날’을 세우고 싶다. 고귀한 인간이 있는지. 고귀한 눈으로 그려지는 민중의 일상이 과연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인간적’이란 단어를 조심히 사용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인간의 활기와 정이 느껴지는 곳으로 재래시장을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긴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롱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인간의 활기와 정(情) 같은 것은, 그 생존 바닥에서 생계의 곤고(困苦)함에 놓이지 않은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희망이란 단어를 쉽게 내뱉는 것은 쉽다. 쉽게 출구를 이야기 하는 것도. 이런 말들은 그런 생존 현실 자체에는 거리를 둔 인간들만의 특권이기 쉽다.


김훈은 그저 ‘보여주기(Showing)’만을 한다. 쉽게 출구를 만들지 않고 그저 그 답답함을 처절하게 묘사한다. 나는 오히려 김훈의 이런 면에 더욱 큰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구체성‘에 기반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생존의 구체성. 생명의 처절함. 생의 절박함. ’생(生)‘을 ’날(生)‘것 그대로 보여줄 때. 인간을 진정 ’바로보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고로,

김훈의 남한산성은 철저히 비(非)인간적이어서 더욱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이라 감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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