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남한산성』, 학고재 2007 리뷰


▶ 비(非)인간적이어서 더 인문적 가치를 지닌 소설 ◁


아침 8시 지하철. 그곳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한 정거장 지날수록 좁아지는 내 공간. 압축. 압착된다. 나는 분명 제자리에 서있고 싶은데, 지하철이 출발하면 좌·우로 움직인다. 아니 움직여진다. 그대로 밀려갔다. 그대로 밀려온다. 다음 정거장. 그곳엔 또 나같은 사람이 탄다. 우주 드넓은 공간에 휑하니 떠있는 과학책 속 지구. 그 지구 어느 조그만 좌표에 서울이 점으로 박혀있다. 그 서울의 띠끌만한 공간에 개미들보다 더 우글우글 땅 밑을 우리는 매일 아침 지난다. 내 의지는 부재하고 단지 내 땀만 분비된다.


김훈 『남한산성』을 읽는 내내 왜 자꾸 아침 8시 지하철 그 공간이 떠올랐을까. 거꾸로 왜 자꾸 아침 8시 지하철만 타면 『남한산성』소설이 뭉근히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왜 하필 아침 8시에 지하철을 타야만 하는가. 사실 7시 40분에만 타도 혹은 8시 20분에만 타도 그런 비(非)인간적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마 한반도 남단의 직장인 대부분은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회사에 9시까지 출근해야하고 대략 1시간 남짓 거리에 살고 있다면 8시가 최대 마지노선이란 사실을. 회사가 10시 출근이라면, 아침에 피곤함이 없다면 그 8시 ‘지옥철’ 타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직장인은 그 시간에 집을 나서고 그렇게 모두들 지옥철에서 만난다.


인간은 이렇듯 비슷하다. 어떤 필연적 구조에 갇혀 살아간다. 우리네 일상은 이렇게 꽉 막힌 8시 지하철과 비슷하지 않은가. ‘2007년’ 우리네 삶은 ‘1636년’ 남한산성에 있던 조상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미약한 존재인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답답한 지하철처럼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추상적 언어로 싸움한다. 동시에 남한산성 안의 사람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린다. 꽉, 막힘. 출성하지도 항거하지도 못하는 절망적 상황. 그 상황이 지금 우리네 민중의 일상과 너무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소설을 읽으며 내 현실과 지하철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출구없는 막막함만 보여준 김훈을 얄밉다고. 결국 동물적 삶만 추구하는 것 아니냐며 혹은 인간의 고귀함은 다 버리고 그저 생존을 위한 동물의 왕국을 묘사한 것이라 김훈에게 ‘날’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역(逆)날’을 세우고 싶다. 고귀한 인간이 있는지. 고귀한 눈으로 그려지는 민중의 일상이 과연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인간적’이란 단어를 조심히 사용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인간의 활기와 정이 느껴지는 곳으로 재래시장을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긴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롱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인간의 활기와 정(情) 같은 것은, 그 생존 바닥에서 생계의 곤고(困苦)함에 놓이지 않은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희망이란 단어를 쉽게 내뱉는 것은 쉽다. 쉽게 출구를 이야기 하는 것도. 이런 말들은 그런 생존 현실 자체에는 거리를 둔 인간들만의 특권이기 쉽다.


김훈은 그저 ‘보여주기(Showing)’만을 한다. 쉽게 출구를 만들지 않고 그저 그 답답함을 처절하게 묘사한다. 나는 오히려 김훈의 이런 면에 더욱 큰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구체성‘에 기반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생존의 구체성. 생명의 처절함. 생의 절박함. ’생(生)‘을 ’날(生)‘것 그대로 보여줄 때. 인간을 진정 ’바로보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고로,

김훈의 남한산성은 철저히 비(非)인간적이어서 더욱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설이라 감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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