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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일상에서 이렇게 문명을 바꿀 줄이야 - 세계사를 바꾼 문명의 생성과 문화인류 이야기
홍익희 지음 / 체인지업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서 홍익희의 <물질이 일상에서 이렇게 문명을 바꿀 줄이야>를 골라 든 것은, 70년 넘는 세월 동안 내가 직접 겪어낸 눈부신 물질의 변화가 떠올라서였다. 돌이켜보면 내 유년 시절은 흙과 나무, 그리고 짚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세상이었다. 땔감을 때고 우물물을 길어 쓰던 세상에서, 지금처럼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플라스틱과 실리콘의 세상으로 넘어오기까지, 우리 세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파른 물질문명의 전환기를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누리는 일상의 물건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는지 거대한 지도를 펼쳐 보여준다.
저자는 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교과서적인 분류를 넘어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 다양한 물질들을 추적한다. 면화, 설탕, 고무, 유리, 석유, 그리고 현대의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물질들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세계 질서를 재편한 ‘보이지 않는 손’이었음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머무른 대목은 면화와 석유에 관한 이야기였다.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짓던 시절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다. 하지만 그 면화가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세계 무역의 중심 축이 되었으며, 나아가 미국의 남북전쟁까지 유발했다는 거시적인 역사적 연결고리를 마주했을 때 가슴이 묵직해졌다. 우리가 매일 입고 벗는 옷 한 벌에 인류의 욕망과 투쟁, 그리고 피땀 어린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석유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20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석유의 시대였다. 석유는 자동차를 움직이는 연료를 넘어 플라스틱, 비닐, 화학섬유, 약품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의 뼈대와 살을 만들었다. 석유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 덕분에 우리 세대는 굶주림을 벗어나 성장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풍요의 이면에 가려진 환경 파괴와 자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짚어낸다. 노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날의 기후 위기와 환경 오염은, 우리가 앞만 보고 달려오며 물질을 과도하게 소비한 대가인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부채감이 남는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를 단지 과거의 기록으로 박제하지 않고, 현재를 거쳐 미래로 연결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희토류와 리튬, 반도체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패권 전쟁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과거에 후추와 면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총칼을 겨누었다면, 이제는 배터리와 칩을 만들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뉴스들이 복잡하고 낯설게만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물질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니 오늘날의 지정학적 갈등과 경제적 격변이 비로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70대의 입장에서 이 책은 단순한 역사 지식의 확장을 넘어, 내가 살아온 시대를 객관적으로 조망하게 만드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물질의 결핍에서 출발해 물질의 과잉으로 끝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건이 귀해 기워 쓰고 아껴 쓰던 미덕은 사라지고, 이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편리함이 미덕이 된 세상이다. 물질은 분명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인간의 정신과 공동체의 가치를 파편화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책은 우리에게 물질을 거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일상의 당연함을 의심하고,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문명의 실체를 정확히 인지하라고 권한다. 책을 덮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을 가득 채운 가구, 가전제품, 그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까지 어느 것 하나 거대한 문명의 역사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남은 생 동안 내가 실천해야 할 지혜는 물질의 편리함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이 지닌 무게와 책임을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내 일상을 채운 물질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지속 가능한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 소비를 덜어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진 묵직한 화두이자, 격동의 물질문명을 누려온 한 노년이 가져야 할 마땅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한 단계 넓혀준 참으로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