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복이 - 할머니가 손자에게
김초혜 지음 / 아이스크림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학창 시절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을 즐겨 읽었기 때문일까요. 제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가장 대표적인 사랑 시는 언제나 사랑굿인데요. 마침 얼마 전 김초혜 시인의 책이 출간되었다길래 기쁜 마음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시가 아니라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랍니다. 할머니가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 김초혜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을지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그래서 만나보았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한 추억이 너무나도 짧다 보니 특히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애틋한 분들을 볼 때면 은근 부러웠는데요. 이 기회에 책으로라도 그 사랑 느껴보고 싶더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책은 2008년에 쓴 <사랑하는 재면아>의 개정판이랍니다. 다행히인지 아닌지 저는 이번에 <행복이>를 처음 만나본 것이었는데요. 거기에 양장본이라 소장하고픈 분들에게는 더 좋은 소식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럼 읽으면 읽을수록 할머니의 손자에 대한 무한 사랑이 느껴졌던 도서 <행복이> 한번 살펴볼까요.
저자는 김초혜 시인. 196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떠돌이별>, <사랑굿1>, <사랑굿2>, <사랑굿3>, <섬>, <어머니>, <세상살이> 등과 시선집 <떠도는 새>, <빈 배로 가는 길>, <편지>, 수필집 <생의 빛 한줄기 찾으려고> 등을 출간하였답니다. 한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요.
다른 책들과 달리 <행복이>는 작가의 말, 들어가는 말이 없습니다. 목차도 없습니다. 그냥 일기니까요. 대신 '사랑하는 손자 재면이에게'라는 짧은 편지글로 시작하는데요. 실제로 손자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바람을 매일 일기로 써서 손자 재면이의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었던 노트 글이랍니다. 그리고 일 년 후 출판사의 요청으로 손자의 허락을 받아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답니다.
사실 책을 받아들고도, 읽으면서도 내내 표지에 숨겨진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글인 12월 31일 글을 읽고는 의문을 완전히 풀 수 있었는데요. 바로 손자 재면이가 초등학교 1학년 5월 어버이날에 할머니에게 선물한 공작물이랍니다. 재면이는 공작물 속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훗날 책 제목이 될 줄 알았을까요.
글은 날짜별로 대략 한 쪽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말을 일기 같은 편지글로 엮었기에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는데요. 매월 시작하는 부분에는 판화가 이철수 님의 작품으로 시작하더군요. 한국적 느낌 물씬 풍기는 굵은 선과 짧은 글. 좋아하는 시인의 책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만났는데, 뜻하지 않게 좋아하는 판화가의 작품도 콜라보되어 있어 더욱 기분이 좋고 횡재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전하는 인생에 대한 조언을 가득 담고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성실과 인내,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헤쳐나가는 마음가짐과 방법, 독서, 건강관리 등 1년 365일 그 주제도 다양했는데요. 어찌 보면 이상적일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바르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더군요. 때문에 당장의 성공과 행복이 아니라 손자의 인생 전반에 몸과 마음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덕분에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가득 느낄 수 있었고, 한편 부러운 마음도 내내 들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도 제 곁에 계셨다면 이런 마음이셨을까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할머니의 사랑이 궁금했고 대리만족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책 뒤표지에 실린 이광재 님의 한 줄 리뷰에서 '소학'이라는 말을 발견하는 순간 조금 멈칫하기도 했었는데요. 읽다 보니 왜 '소학'을 이 책과 비교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어렵게 쓰인 소학의 내용들이 우리말로, 할머니의 말로 풀어쓰면 바로 <행복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너무 와닿는 글이 많았지만 몇 가지만 골라보았습니다. 요즘 저는 인생을 쉬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신호가 와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그동안 제 마음과 몸을 돌보기보다는 너무 치열하게만 살아왔더라고요. 그래서 방향도 방법도 다시 돌아보고 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나는 나의 창조자', '한 번뿐인 인생', '노력 끝에 오는 것', '시련을 겁내지 마라' 등의 글에 포스트잇 플래그를 잔뜩 붙이고 있더라고요.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운명은 네가 만들고 네가 지배하는 것이다. 누가 길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고, 너를 속박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막는 것도 너 자신이고 속박을 하는 것도 너 자신이다. 누구 때문에 환경이 허락지 않아 못했다고 하는 것은 패자의 비굴한 변명이다."
지금은 부모님과 대화를 통해 그 마음 풀었지만, 한때는 어린 시절 마음대로 인생을 정할 수 없었다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는데요. 성인인 지금도 과연 제 마음대로 제 의지대로 운명의 길을 걷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적을 충분히 알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망설임 없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그길로 매진해라. 비바람이 몰아쳐도, 폭설이 퍼부어도 집념만 강하다면 너는 꼭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탓'하며 미루고 겁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의 목적을 정말 충분히 알고 있는지 혹은 그 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마음이 세워지지 않았고 굳건하지 않기 때문에 매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너는 너의 주인이고, 너 자신의 창조자다."
어찌 보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억해야 할 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한 번씩 생각하는 주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한 글입니다.
"착한 사람과 가까이하거라. 그의 착함을 배울 수 있으니 그가 곧 스승이다. 악한 사람이라고 너무 배척하지 말아라. 악한 사람의 행실을 보고는 그것이 나쁘다고 깨닫게 되니 그 또한 스승이다. 착한 사람과 사귀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악한 사람과 사귀면 마음이 항상 불안할 것이다. 착함은 배우고 악함은 멀리하거라."
착한 사람을 만나면 저래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 살아갈까 싶다가도 한결같이 잘 살고 있는 모습보다 보면 그래도 저게 정답이지 싶은데요. 간혹 들곤 하는 절대적인 선함은 있는가, 선함과 악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함께 들곤 하는 생각, 어떤 사람이 착한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악한 것인가라는 의문에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힌트를 주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사람, 그리고 불안한 사람.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사람을 가려 만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겠다 싶기는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고 만나야만 하는 악한 사람이라면 너무 배척하지 말고 교훈으로 삼는 마음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표에 집중하다보면 잊기 쉬운 것이 건강이겠지요. 시인은 혹여나 사랑하는 손자가 건강을 잃게 될까봐 중간중간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휴식이라는 것은 피로해지기 전에 쉬어야만 효과가 크다. 피로가 극도에 달한 다음에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피곤을 앓는 것이다."
흔히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요. 막상 건강을 잃으면 이전 생활로 돌아가기가 참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피로해지기 전에 쉬어야 한다는 말, 정말 의미심장하게 마음에 와 닿네요. 피로하면서도 피로한 줄 깨닫지 못하고 무리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겠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의미,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를 알려주었던 <행복이>.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했던 '소학'의 내용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의 큰 사랑이 물씬 느껴지는 책이었는데요. 혹시 우리 아이가 우리 손자가 바르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초등학생이던 시절 방학 때 두어 번 할머니와 지내 본 것이 전부인 저에게는 할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는데요. 나중에 이런 사랑을 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무엇보다 지금의 제 아이에게도 다른 무엇이 아닌 진짜 사랑을 전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