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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진가
모데라타 폰테 지음, 양은미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10월
평점 :
"당신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남녀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는 거예요?
이런 역사는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 남자들에 의해 씌어졌다는 걸 기억하세요.
어쩌다 실수로 사실을 말해 버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죠" p101

우리 사회에 미투 운동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화제가 된지도 꽤 되었습니다. 뻔뻔한 가해자들의 행동은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밝히고 전면에 나서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이 물살을 타고 극우 페미니즘 단체는 더욱 거세게 움직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미투 운동 이전에 데이트 폭력이 간간이 매스컴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일부 사람들의 일이라 여기며 별 관심을 못 얻던 것이 2018년 1월 30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청 내부 성추행에 대한 고발로 인해 본격적인 한국의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지요.
성폭력도 아니고 성추행 정도임에도 검찰이라는 단체의 특수성으로 인해, 대한민국 최상위 지성인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분개했던 걸까요. 사실 보통의 여성들에게 성추행은 일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서적 또한 많이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책이 있었으니, 초기 페미니즘을 보여주는 고전이라 하며 출간된 문학세계사의 '여성의 진가'입니다.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여성의 진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옮긴이의 말, 소개, 모데라타 폰테의 생애와 삶 등에 대해 서술하고 뒤이어 여성의 진가가 나옵니다.
모데라타 폰테는 이 책의 작가 모데스타 포조의 필명입니다. 모데스타는 첫돌이 되기 전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고아가 되어 수녀원에서 잠깐 생활하기도 하지만 주로 외할머니와 의붓 외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됩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 외에도 악기 연주 등 다방면에 능력을 발휘하지만, 결혼을 하고 4번째 자녀를 출산하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모데라타 폰테는 당시 결혼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집안 일과 자녀 양육에 충실하면서도 글쓰기를 이어가며 몇몇 작품을 남기는데요. 다행히도 사망 직전 초기 페미니즘 작품이라 불리는 '여성의 진가'를 탈고하게 됩니다.

'여성의 진가'는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7명의 여성들이 모여 나누는 이틀간의 대화를 보여줍니다. 이제 막 결혼한 헬레나로 인해 남자들에 대한 화제를 꺼내들게 되고 곧, 남자의 편을 들 사람과 비판할 사람을 구분하여 토론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 구성원들은 나이 든 과부와 유부녀, 젊은 미망인과 유부녀, 갓 결혼한 어린 신부와 미혼 여성 2명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더 의미가 있어 보였습니다.
"얘야, 결혼에 관해서라면 난 네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네 삼촌은 너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했어. 네가 그렇게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그건 안전한 손에 들어가야 하거든. 그러니 나로서도 결혼 외에 어떤 해답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하지만 어쨌든 기운을 내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남자들이 똑같진 않으니까. 아마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잖니." p58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딸 버지니아에게 결혼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 따르자고 합니다. 혹시 우연히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는 그 혹시에 기대하자고 말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현대에 들어, 다들 하는 결혼이니 그냥 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토론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작가 코린나와 젊은 유부녀 코넬리아, 젊은 미망인 레오노라였는데요. 남자들의 장점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남자편의 토론자들에 비해 이들은 기독교적으로나 사회계층적 관점 혹은 사랑의 관점으로 남자들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차지한 우위는 불공정하게 가로채서 선점한 거에요.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자연 재해, 질병, 삶의 모든 사건 사고에 종속된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아요.
그건 순종한다는 차원에서 종속된 것이 아니라 부담감으로 고통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두려워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으로 그들을 견디는 걸 의미해요." p77
"남자는 여자 이전에 창조되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여자의 우월함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죠. ······ 우리는 남자의 내조자로, 동반자로, 그들의 기쁨이자 더없는 영광으로 창조되었어요.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가 얼마나 가치 있고 그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장점을 시기해 우리를 파괴하려 들죠." p79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훔친다면, 그는 도둑으로 불려야 마땅하잖아요. 남자들이 우리 권리를 빼앗고,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하는데도 우리는 아무런 불평조차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거에요? 존재 가치 면에서가 아닌 사회적 지위에서 그들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다면, 이건 일종의 학대죠." p80
그리고 이런 남자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맙니다. 또한 여성들의 뛰어난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배움이 짧은 여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남자들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내어주는지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현대의 여성들이 토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게다가 남자의 편을 든 헬레나는 레오노라가 가진 남자의 단점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남자들에게 당할 그녀의 안전 문제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이에 레오노라는 그건 남자에 대한 증오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일부 못된 남자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편협한 시야에 비판을 가합니다.
어떤가요? '여성의 진가'라는 책의 전반적 흐름과 극히 일부 발언을 적었을 뿐인데도, 그녀들의 대화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미투 운동 따위라고 생각한다면, 난 여자가 아니니까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냥 참지 뭐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당한 건 아니니까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선택도 자유지만, 이왕 사회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만큼 현시점의 미투 운동에 대해 올바른 시선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와 생각에 많은 도움이 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