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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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삼 일 걸렸다. 하나의 이야기가 마음에서 흐려지기까지 참 오래 걸린 소설이다. 시선의 끝과 마음의 끝이 동등하지 못한 이야기들. 지극히 일상적인데 그 일상이 묵직하고 너그럽다. 어떤 이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니까. 다들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도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떠안고 평범한 척 살아갈 뿐.


8편의 단편 속 화자들.. 그들의 가슴은 찢겨서 붉은 피가 생채기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멸의 상처, 관계의 상처, 이별의 상처... 피가 멈추고 딱지가 안기까지 그들의 주변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 보내며 고요한 애도를 하는 화자들.


누군가에게는 통상적인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살고자 하는 힘이 될 때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울컥한다면 지금 내 마음이 치유되고 있다는 증표일 테지.


<어른>의 경우 실제 작가가 유일하게 인터뷰하고 써 내려간 소설이라고 한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경아의 곁을 지켜주던 경미 아줌마의 챙김이 눈물 나게 따스했다. 딸이냐고 묻는 시장 상인에게 넉살스레 딸이라고 대답해 주고, 혼자 있을 경아를 위해 호박죽을 한솥 끓여놓은 무자비한 따뜻함 때문에.


<위해>속 수현과 유리. 자신과 비슷한 불행을 가진 유리를 보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하지만 유리는 그런 호의를 부담스러워한다. '수현은 유리를 보며 실수할까 봐 걱정을 한다. 실수로 했다는 생각을 내 마음대로 해버린 거구나. 수현은 또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지만 이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행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을 나의 불행과 견주어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현처럼 불행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이주란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는 각 단편마다 많은 물음표와 생각을 준다. 작가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소설을 읽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마음 아파서라고. 충분히 이해하고도 이해되는 말이었다. 작품을 읽으면 알게 된다. 독자들이 위로받는 것만큼 작가 또한 글로 위로받았음을.



*출판사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이며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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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쥬니 2023-05-0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별일은 없고요?

기차타고 조금 오는데 별일은요.

아무튼 잘 가셨다니 마음 놓입니다.

저도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 한참을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불현듯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에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저멀리 반대편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멀리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집 몇 채와 십자가만 보이는 고요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별 일은 없고요>





🪐 세상은 나 없이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테고 내게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


🪐 나는 아줌마가 ‘대단하긴‘, ‘슬프긴‘ 하면서 자주 쓰는 긴 화법이 좋다. 그 뒤에 생각된 말들이 좋기 때문이다. <어른>




🪐 해볼 수 있는 게 없을 때는 체념하는 편이 낫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조용히 살지 않아도 되는데 조용히 사는 거랑 조용히 살아야 해서 조용히 사는 것은 다르니까. 체념하자. 수현은 일정 시기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받아들인 것 같았다가 억울했다가 하는 감정의 징검다리를 오가고 있다. <위해>




🪐 불행해지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동정이나 도움을 받을 만큼 불행해져선 안된다.

너 같은 애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 정도를 지키며 살도록 노력하라고 사람들에게 배웠다.

수현이 그걸 잊었다고 여겨질 때마다 할머니가 열심히 상기해줬다. 이게 다 부모를 잘못 만난 네 탓이야 <위해>




🪐살면서 겪은 대부분의 고난을 지나왔고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인간을 이해했고 살면서 받은 대부분의 상처를 견뎌왔고 자주 웃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사람만은 끝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




🪐 다음. 그렇지. 웬만하면 다음이 있지.

다음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꽤 오래 그 생각을 지웠지만 이제 다시 다음을 당연하게 여기곤 한다. 다신 없을 것 같은 말이라고 확신했던 날들과 너무 행복하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던 날들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 보라와 나는 그것들 함께 나누고. 그러니까 그런 사이가 되었다.

<서울의 저녁>



🪐 시간이 흐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동안에도 시간의 흐르고 있고 이를 테면 모든 것은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떤 것들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서울의 저녁>



🪐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을 살면서 만 번을 한 거 같은데 누군가에게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니었을까. 습관적으로 나온 허위의 마음이 가득한 인사말에도 현경은 괴로웠다. <파주에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