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생활 도구 - 좋은 물건을 위한 사려 깊은 안내서
김자영.이진주 지음 / 지콜론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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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구점에서 전동 지우개를 보며 '라떼는 말이야'가 절로 나왔다. 어디서 저런 기똥찬 생각을 했을까+요즘 애들은 좋겠어~라고 말이다.
생활용품점만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쇼핑을 하곤 한다. 혼이 나간 채 바구니를 들고 한 시간 이상을 돌아다녔지만 막상 구매는 한두 개 정도만 하게 된다. 무분별한 소비는 쓰레기를 만든다는 것을 몇 번 겪고는 눈 호강을 실컷 하고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사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좋은 물건인지에 대한 고민을 줄여보고 싶었는데 마침 적합한 책을 만났다.

<월간 생활 도구>라는 책 제목은 매달 출간될 것 같은 착각을 부르지만 한 권으로 끝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김자영과 이진주는 함께 상점 카탈로그를 운영하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좋은 물건에 대한 저자들의 철학과 애정의 결과는 <월간 생활 도구>로 태어났다.
12개월로 목차를 나누고, 월마다 주제를 정하여 주제와 부합한 생활용품을 소개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어쩌면 리빙 잡지로 머물 수도 있는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목차만으로 오해가 풀렸다. 계절을 반영한 낭만적인 제목 속에 도구는 컬러와 디자인, 편리성, 도구의 역사 등 흥미로운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February(그리운 시절), March(기록의 가치), May(초대하는 날), September(글 읽는 밤) 등등 감성적인 소제목에 텐션이 살짝 오른 상태에서 글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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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절- 휴대전화
독일어로 마침표 혹은 점을 뜻하는 풍트는 기술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을 담아 시계, 전화기, 충전기 같은 전자 제품을 만드는데 2018년 통화와 문자, 일정 등 최소 기능만 하는 휴대 전화 MP 02를 출시했다고 한다. 유치원생들도 사용이 보편화된 스마트폰이 대세인 요즘에 역순하는 제품이었다. 

늘 누군가와 연결된 우리의 삶이 피로하지는 않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어느 먼 곳의 누군가와 '좋아요'로 하는 소통에 마침표를 찍고 가까운 지인과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은 어떨지도 말이다. p.51

길을 걸을 때도 친구와 커피숍에 있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지인을 보며 서운함을 느낀다. 눈을 보고 말하고 싶은데 그들의 눈은 폰에 가있으니 대꾸를 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한 뉴트로 제품 풍트의 MP 02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 줘서 단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록의 가치 - 10 Years Memo
오늘을 회상하고 동시에 내년의 오늘을 상상할 수 있다. 쓰지 않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기록의 기쁨이다. p71

2012년 일본의 편집자이자 디자이너인 도츠카 야스오가 고안한 십 년 다이어리는 십 년이라는 시간 속에 하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성이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메모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두 눈이 번쩍이는 제품이었다. 한 페이지에 10년의 내용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니~! 상당히 두껍겠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도츠카의 일기장의 하루치 쓸 공간은 세 줄 정도여서 부담스럽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국내에도 10년 일기장이 있어 구매해서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루의 작은 흔적을 몇 년 후에 한꺼번에 봤을 때의 감동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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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뚜껑 따개
덴마크 엔지니어 헬게 브릭스 한센은 관절염을 앓고 있는 여든의 어머니를 위해 병따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병뚜껑을 살짝 들어 올리는 방식의 유리병 뚜껑 따개를 만들어 1995년 특허를 받았다. 그 후로 다른 디자이너들이 재질과 형태를 변경해 무게와 가격을 낮췄다고 한다.
손에 땀이 나 미끄러워서인지 뚜껑 부분에 쨈이 굳어서인지 도통 열리지가 않던 뚜껑과 씨름을 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손쉽게 열 수 있는 도구가 있다.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사람을 향한 애정이 도구를 완성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된 셈이다. 그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 있을까.


<월간 생활 도구>에서 소개된 마흔여섯 가지 생활 도구의 이야기는 금세 읽힌다. 진귀한 물건만 나열한 정보 집이 아닌 테마별로 엮은 에세이집 같은 느낌이었다. 계절별로 정리된 도구의 쓰임새와 향기에 흠뻑 젖는 시간으로 채워졌고, 익숙한 도구의 역사와 에피소드 등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별거 아닌 물건에도 찐한 사연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 도구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빛의 여러 색을 섞으면 흰색이 되듯, 다양한 도구를 담은 이 책의 표지도 순백색으로 정한 것도 감각적이다. 건축학교를 함께 다녔던 저자 두 명이 집필했다고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통일된 분위기의 글과 내용에 편안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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