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소철나무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월
평점 :
품절


난봉꾼 집안.
구역질 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나는 하루가 멀다고 계집질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두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앞에서 여자를 안았다. 내 눈에는 두 사람이 나와 핏줄로 연결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추악하고 무서운 짐승으로 보였다. 이윽고 내 안에 시원하리만치 압도적이고 고요한 절망감이 싹텄다. /p.219


마사유키는 료헤이가 기어 다닐 때부터 돌봐주는 아이로 지금은 중학생이다. 마사유키는 2002년도 겨울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료헤이의 부모는 하늘나라로 갔고 그 뒤로 할아버지도 돌아가셔서 할머니인 시마모토 후미에가 유일한 보호자인 아이다. 그 사

고의 속죄를 마사유키가 13년째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가해자인 줄 알았으나 가해자는 아니었다. 마사유키는 짜증 나게 미련했다.


"당신과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지. 아까 말했다시피 당신은 성실해. 참을성이 많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지. 부조리한 상황을 몇 년씩이나 버텨왔어."
"당신을 칭찬하는 게 아니니 착각하진 말게. 짜증이 치민다고 말했잖은가.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지. 당신은 어리석어 보여. 아니, 실제로 어리석지. 13년 전 당신이 뭔가 잘못했나?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고." / p.142


삼대 정원사이면서, 난봉꾼 집안에서 마사유키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어린 시절을 무관심과 냉대로 자랐다. 아무도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사유키가 철이 들었을 무렵 소가조원에는 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여자들이 있었고, 쉬는 날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둘 다 여자와 놀고 마사유키는 혼자였다. 한 번도 유원지와 동물원에 데려가 준 적이 없다. 결핍이 결핍인지도 마사유키는 몰랐다. 이런 환경은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먹지를 못하게 되었다. 물이나 커피 우롱차 외에는 그 무엇도 누군가 앞에서 목구멍에서 넘기질 못한다. 그러다 시공주의 쌍둥이들과 처음으로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살 위인 남매로, 첫째 이쿠야와 인생의 최초의 친구로 마이코는 첫사랑이 되었다.


마이코의 눈에 눈물이 어려 있다. 나는 수많은 가시를 느꼈다. 온몸 구석구석 가시가 박혔다. 두꺼운 가시, 가는 가시, 독 가시, 얕고도 깊게 나를 찔러댔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모를 만큼 상처 입었는데. 본인한테 자각이 아예 없어서야."/ p.250


"자네가 여태껏 최악이었다 해도 그건 자네 탓이 아닐세. 아무것도 모르는 자네한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제부터는 아닐세. 자네는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 만약 앞으로 자네가 최악이라면 그건 전부 자네 탓이네. 누구의 탓도 아니지."


"삼대 청년. 그걸 처음에 가르쳐준 사람에게 감사하게나. 말하기 어려운 걸 말해줬으니 말이야. 보통은 최악인 사람에게 당신은 최악입니다. 하고 굳이 말해주지 않거든. 조용히 인연을 끊을 뿐이지. 그걸 말해준 까닭은 진심으로 자네를 걱정하기 때문이야. 그것만은 알아두길 바라네."/p.256


이쿠야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서른두 살 먹도록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채 빙빙 돌기만 하고 있다. 아무 데도 못 간다.
바보처럼, 개처럼 13년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내가 해온 모든 일이 헛수고였을까? /p. 404


시공주이면서 쌍둥이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 난봉꾼 아버지의 어긋난 사랑은 죽음으로 치닫게 되었고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료헤이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마사유키는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3년째 후미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료헤이를 돌봐준다. 미련스럽게도.. 가슴이 아프다.
2013년 7월 7일은 그에게 중요한 날이다. 어쩌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수도 있는 정말 중요한 날이다. 어쩌면 이 날을 위해 13년을 견뎌왔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가 따뜻한 밥을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날이 올까.


- 료헤이와 마사유키
료헤이 또한 마사유키가 할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이 수그리는 것을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의문을 품게 되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삼촌이었던 마사유키에게 배신과 연민을 모두 갖게 되었다. 마사유키가 단지 속죄만으로 료헤이를 돌봤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못 가졌던 관심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료헤이에게 모두 해줬다. 그러면서 자신도 즐거워했고 무엇보다 료헤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사유키의 결핍을 채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료헤이와 첫사랑인 마이코였다. 사람이 준 상처는 사람이 낫게 해준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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