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형제의 숲
알렉스 슐만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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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분야: 장편소설, 북유럽 소설

『세 형제의 숲』은 2년 전에 있던 일에서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형과 동생과 함께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문득 형이 여자친구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형은 연애를 오래 했고, 나는 형의 여자친구와 인사할 때마다 좋은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 헤어졌어."

형이 이별을 겪은 줄도 몰랐던 나는 당황했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괜찮냐고, 속상하진 않냐고 다시 물었다.

"괜찮지, 그럼. 헤어진 지 반년 정도 되었거든."

어떻게 이럴 수가. 어렸을 때 나는 우리 세 형제가 한 몸처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서로의 근황도 모르는 채로 소원해지다니. 언제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후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마침내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고 살아남는 것에 대한 소설이다.

...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출처는 다 나에게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이며, 모든 것을 서로 나누던 형제 동생 그리고 나를 생각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고.

작가의 말

『세 형제의 숲』의 이야기는 작가가 경험한 형제로부터 느낀 단절감에서 시작되었다. 단절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 독자들에게 연결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남자 세 명이 별장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다. 서로를 안고 울고 있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춘 차림이다. 그 옆, 잔디 위에 유골 단지가 놓여 있다. 경찰관의 눈이 세 남자 중 한 명과 마주치자 그가 일어선다. 나머지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 부둥켜안고 앉아 있다. 피투성이에 심하게 두들겨 맞은 모습이기에 경찰관 역시 앰뷸런스를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베냐민입니다. 신고 전화를 건 사람이 접니다."

 

경찰관은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찾는다. 이 이야기가 종이 한 장에 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금 자신이 수십 년간 이어진 이야기의 결말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경찰관은 모른다. 오래전 이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세 형제의 이야기라는 것도,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무엇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며 별개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무게는 어마어마하고, 당연하게도 사건의 대부분은 이미 일어났다. 여기 돌계단 위에서 펼쳐지는 세 형제의 눈물과 부어오른 얼굴, 피의 이야기는 그저 수면에 남은 마지막 파문이자 돌이 떨어진 자리에서 가장 먼 곳에 일렁이는 잔주름일 뿐.

 

1장: 오후 11시 59분

『세 형제의 숲』은 총 2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하나는 과거('베냐민'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간순으로 서술되고 다른 하나는 현재(어머니의 장례식)의 이야기로 역순으로 서술된다. 현재의 이야기가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재미있는데 소설의 첫 장면부터 형제들 간의 난투극이 벌어져서 과연 이런 파국적인 관계가 회복가능할지 의문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챕터가 진행될수록 독자들은 형제들 간의 미묘한 감정선을 알아차리게 되고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 같은 관계가 얼마든지 회복될 수도 있다는 것을 또 이런 난장판이 평화로운 일상과 마찬가지로 세 형제에게는 단지 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형제의 포옹은 잠깐이었지만, 아무리 짧더라도 포옹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강풍 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잡아 올리느라 엉켜버린 그물을 풀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하게 엉켜서 절대로 풀 수 없을 테니 처음에는 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곳의 매듭 하나를 풀자 그 뒤로는 저절로 그물이 술술 풀려 벽에 붙은 고리 위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 것처럼 말이다.

9장: 오후 4시

역순의 이야기 진행방식 덕분에 읽는 내내 '이 자식들 (이 시간대부터 저 시간대 사이에)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지?'하며 궁금해했는데 작가의 플롯 짜는 솜씨가 뛰어난 것 같다. 


『세 형제의 숲』의 또다른 재미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출처는 다 나에게 있다.'고 했던 <<작가의 말>>, 또 작가 소개의 '알콜 중독자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룬 회고록'을 쓴 이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에르뿐 아니라 실은 가족 중 그 누구도 개와 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몰리는 좋은 놀이 상대가 아니었다. 늘 불안하고 몸도 약한 데다가, 틈만 나면 깜짝깜짝 놀랐다. 몰리를 키우게 된 뒤에 맞이한 첫 여름엔 다들 이런 일은 머지않아 지나가리라고, 시간이 지나면 몰리도 적응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몰리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세상이 무서운지, 몰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듯 누군가의 품에 안겨 다니는 쪽을 선호했다. 아빠가 어색하게 따뜻함을 표현하려고 다가가도 겁을 먹고 물러났다. 닐스와 피에르도 몰리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어쩌면 엄마가 자신들보다 개를 더 아낀다는 생각에 질투를 느낀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몰리를 몹시 사랑하면서도 내킬 때만 사랑을 표현했기에 몰리는 더 불안해했다. 엄마는 몰리를 다른 가족과 공유하지 않고 독점하려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몰리에게 쌀쌀맞을 때도 있었다. 때로 베냐민은 몰리가 외톨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는 피에르와 닐스의 무관심, 아빠의 체념, 엄마가 보이는 돌연한 무심이 낳은 결과였다.

베냐민은 몰리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해 여름, 엄마와 아빠가 시에스타를 즐기던 기나긴 오후 내내 둘은 유대관계를 만들어 갔다. 베냐민은 속으로 몰리는 자기 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같이 호수에 가서 돌을 던지고 놀았다. 숲속을 산책했다. 함께 쏘다녔다.

8장: 식품 저장고

엄마의 말이 끝나고 침묵이 이어지자 베냐민은 눈을 들어 엄마를 쳐다보았다. 이야기가 끝난 게 분명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교훈도 없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

"식품 저장고에 들어가서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져라."

"식품 저장고요?"

처음 받는 벌이었다. 예전에는 늘 불 꺼진 사우나에 들어가 있으라는 벌을 받았다. 사우나 안에 혼자 앉아서 잘못을 반성해야 했다. 엄마의 육아 방법은 엄격하고 규칙 중심이었지만, 일관성은 없었다. 엄마는 결단력 있는 동시에 애매모호했다. 사우나에서의 벌칙이 언제쯤 끝나는 건지, 언제 나와도 되는지 알려준 적이 없어서 베냐민이 알아서 결정해야 했다. 결국 사우나에서 나온 뒤에도 너무 일찍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8장: 식품 저장고

베냐민은 쉬는 시간마다 몰래 피에르를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멀리서 동생을 지켜보고 나서야 그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컴컴하고 혹독하게 추운 한겨울 오후 2시였다. ... 베냐민은 아주 얇은 재킷을 입고 모자도 쓰지 않은 피에르가 놀이를 하는 아이들 한구석에서 벌겋게 얼어붙은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베냐민은 문득 화가 치밀었다. 왜 엄마 아빠는 쟤한테 더 따뜻한 외투를 안 사준 거지? 왜 쟤한테는 모자도 장갑도 없는 거야?

다시 교실을 향해 돌아가던 길에야 베냐민은 자기도 몸이 꽁꽁 얼었다는 사실, 자기가 입고 있는 재킷 역시 동생이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얇아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서서히 모든 단서를 하나로 꿰어 맞췄고, 그렇게 주변을 관찰함으로써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갔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집 안. ... 베냐민은 집뿐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다 보니 차츰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15장: 졸업 파티

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탄탄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상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의 경험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었음이 분명한 알콜중독자 부모님에 대한 묘사,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일관성 없는 가정교육 아래서 자라 어딘가 불안정한 세 형제와 몰리의 모습.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현실적이라 정말 스웨덴의 어느 도시에 인물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의 육아 방법은 엄격하고 규칙 중심이었지만, 일관성은 없었다. 엄마는 결단력 있는 동시에 애매모호했다. 사우나에서의 벌칙이 언제쯤 끝나는 건지, 언제 나와도 되는지 알려준 적이 없어서 베냐민이 알아서 결정해야 했다. 결국 사우나에서 나온 뒤에도 너무 일찍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와 같은 부분들, 베냐민의 마음 속 이야기에서 상징성은 특히 두드러지는데, 『세 형제의 숲』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만 같은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핵심인 과거의 특정 사건과 연관지을 때 그렇다.

 

이 이상은 스포 가능성이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할 생각이다.

햇빛에 눈을 찌푸린 채 찍힌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찬란하다. ... 그러나 기억을 처음부터 찬찬히 되짚어가면 별장에서의 어린 날은 사진 속처럼 다정하고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 별장에서의 여름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을 맺고, 베냐민은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기억들에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섞여든다. 어른이 된 베냐민이 마침내 형제들과 함께 오래전의 별장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어린 시절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만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역순이다. 타임머신을 묻듯이 뚜껑을 덮어 가슴 깊은 곳에 밀어 넣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천천히 더듬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 형제의 숲』은 어린 시절을 갑작스레 무너뜨린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억을 다시금 방문하며 그 기억과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묻혀 있던 기억을 꺼내지 않고서는, 비극적인 사고 이후에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찬찬히 풀어헤치지 않고서는 자라날 수 없으니까. 

...

이 책의 스웨덴어 원제인 'Overlevarna'는 '생존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복수형으로 쓰인 이 표현은 베냐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을 형성한 역기능逆機能 가족 전체에 흐르는 잔잔한 폭력의 흐름을 나름의 방식으로 버텨낸 세 형제 모두를 가리킬 것이다. 어쩌면 생존이란 한 차에 올라 흙길을 달려 어린 시절로 되짚어가는 과정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끝나고, 불가해한 사건에 관해 끝까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어른들은 사라진다. 늘 함께이던 형제들은 각자의 삶으로 떠나 길에서 마주쳐도 돌아보지 않는 사이가 된다. 누구나 언젠가 유골 단지에 담긴 낯선 빛깔의 재가 된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제자리에 멈춰 힘껏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곳에 묻힌 끔찍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다. 

옮긴이의 말

『세 형제의 숲』은 어린 시절의 비극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둔 채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다. 책을 끝까지 읽어야만 왜 베냐민의 가족들에게 그 사고가 그토록 큰 상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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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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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야: 인문 에세이

부제: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소설 <<은밀한 결정>>에서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는 이름 없는 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한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라진다. 사물과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은밀한 결정>>은 우리의 현재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사물들이 사라진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 인플레이션은 정반대가 사실인 양 우리를 속인다.

오가와 요코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소통 도취와 정보 도취다.

정보 곧 반사물Unding이 사물의 앞을 가로막고 사물을 완전히 빛바래게 한다.

우리는 폭력의 지배가 아니라 정보의 지배 아래 산다. 정보의 지배는 자유로 가장된다.

사물과 기억이 사라진 이름 없는 섬은 여러모로 우리의 현재를 닮았다. 오늘날 세계는 비워지며 정보에게 자리를 내준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 또한 기억을 없앤다. 기억을 되짚는 대신에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한다.

오가와 디스토피아와 달리 우리의 정보사회는 그리 단조롭지 않다. 정보는 사건Ereignis인 척한다.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Reiz der Uberraschung을 먹고산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흥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자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서문

[사물의 소멸]은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담긴 인문 에세이다.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이 모든 지식들을 잘 이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나에게 남는 건 추상적인 단편들뿐이다. 나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 한병철은 디지털화로 인한 사물의 소멸에 주목하며 이것이 사람들의 관계와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3D 프린터가 '사물이 존재의 차원에서 지닌 가치를 없앤다'라는 문구를 보고 철학적인 사고는 여기까지 나아가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보통 상태의 내 사고는 이 세계의 패러다임인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찌들어있기 때문에-의식적으로 이렇게 사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생각해버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평소의 나는 3D 프린터를 보며 그저 기술 발전에 감탄하고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생각할 뿐이다. 

이과 출신이긴 하지만 평소 내가 뼛속까지 이과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애초에 이런 이분법을 별로 안 좋아한다.) 이과 그룹에서는 내가 문과에 가장 가까운 쪽에 속했으니까. 그런데 [사물의 소멸]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이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서 현실 세계에 구현하고 싶다는 욕망,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생각은 한다. 나에게는 신기술이 주는 꿈과 희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부작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무엇이든 부작용은 존재하는 게 당연하니까. 

디지털화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화의 혜택이 막대하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사회가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비대면 소통 방식에 대체로 순응하고 심지어 열광한다면, 그 찬란한 새로움의 뒷면에 밴 어둠을 들춰내는 것이 그 사회를 위하여 철학자가 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역자 후기

철학자인 저자는 그 부작용에 집중한다. 여태까지 나한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그 문제들에 대해서. 이제 [사물의 소멸]을 읽으면서 나는 그 경이의 뒷면에 신경 쓰게 되고 그렇게 그 문제들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물론 저자 역시 디지털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 흐름을 탈 때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이 책은 이야기한다.


 철학 이야기지만 난해하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 앞부분에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과 기술 비판에 대한 주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개념 정도만 잠깐 언급되는 정도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료한 편이지만 읽다가 이해가 잘 안된다면 맨 뒤 부록 인터뷰 대담과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물의 소멸]을 통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를 경험했기 때문에 김영사의 다른 현대철학 책들도 도전해 볼 예정이다. (표지가 비슷한 책들이 있어서 시리즈인 줄 알았으나 시리즈는 아닌 듯. 시리즈/세트 구성 원해요.. plz) 


+ 처음 [사물의 소멸]이라는 제목을 보고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이 떠올랐는데, 두 책 모두 디지털화로 인한 세계의 변화와 이것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사물의 소멸]이 디지털화가 사람의 관계 형성과 상호작용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반면 [소유의 종말]은 비즈니스적, 경제적 측면에 집중하는 점이 다르다. 두 책 모두 읽어보고 비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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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원칙 - 제시 리버모어 월가의 영웅들 1
제시 리버모어 지음, 우진하 옮김, 박병창 감수 / 페이지2(page2)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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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영웅들 #제시리버모어 #투자의원칙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야: 주식/증권

PAGE2에서 출간되는 <<월가의 영웅들>>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은 '제시 리버모어'.

주식투자는 크게 가치투자와 모멘텀투자로 나눌 수 있는데, 모멘텀투자를 대표 주자가 바로 '제시 리버모어'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제시 리버모어의 명성과는 별개로 그가 처음 투자에 뛰어든 것은 1892년, 100년도 더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투자 조언이 아직도 유용할까 싶었는데 읽을수록 괜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투자의 원칙]의 핵심 주제는 당연하게도 제시 리버모어의 투자/투기 원칙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이상으로 인생의 원칙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주식 투자/투기에 관심있는 게 아니더라도 고전이라는 점에서 한 번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서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한 대로 제시 리버모어가 제시하는 투자의 원칙은 이해하기 정말 쉽다. 간단히 말하자면 흐름을 타라는 건데, 시간이라는 요소를 중점으로 시장을 분석하는 것이다. 부록에서는 어떻게 그런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지 차트를 기록하는 법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최소 80년 전의 자료니 요즘에는 굳이 손으로 쓸 필요 없이 프로그램/앱을 이용하면 될 것 같다.

이 책의 맨 뒤에는 <제시 리버모어의 연보>가 들어있다.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30세가 될 때까지 무려 세 번이나 파산했다는 것

둘째는 그렇게 파산을 수차례 경험했음에도 투자/투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

예전에 미국에는 금맥 찾기와 석유 찾기가 대유행한 시대가 있었다는데 꽝만 계속 나오는데도 땅 파기를 멈추지 않는 그런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계속 투기/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싶은 게, 포기하면 그냥 꽝에서 끝나지만 대박이 한 번이라도 터지면 이전의 꽝은 전부 만회할 수 있으니까. 

1940년 사망 이유가 권총 자살인 걸 보면 말년이 그리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직접 읽은 바로는 [투자의 원칙] 내용이 썩 괜찮은 편이라, 1940년 출간 당시 판매가 저조했던 건 어쩌면 사람들에게 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 때문에 냉대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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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이었을 때
앰버 가자 지음, 최지운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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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분야: 스릴러, 영미 장편소설

줄거리

폴섬,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인 '켈리 메디나'는 어느 아침 소아과에서 자신에게 잘못 건 전화를 통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웃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켈리 메디나'는 새로 알게 된 동명이인의 싱글맘을 도우며 자신의 상실감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켈리는 '켈리 메디나'가 예상보다 더 형편없는 엄마였다. 이 여자는 아기를 키울 자격이 없어, 그렇게 생각한 '켈리 메디나'는... 

내 의도는 좋았다. 그저 설리번을 도우려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날 찾은 거야, 켈리. 기억해? 당신은 자유로울 수 있음에도 당신이 날 선택한 거야.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내가 당신처럼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계속 그렇게 지냈을 거야.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이 길을 선택했다.

이제 내가 당신에 대해 알았으니 당신을 놓아줄 수 없다. 설리번을 놓아둘 수 없다.

미안해요, 켈리.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런 거야.

235p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출간된 작품이라 재밌을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좋았다. 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장편소설이지만 심리 스릴러이기 때문에 잔인한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비하인드 도어], [나를 찾아줘] 같은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앰버 가자의 [당신이 나였을 때]도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라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문장이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 다 읽는 데 두 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거 같다. 읽으면서 이 표현 정말 좋다, 생각해서 좀 더 음미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뒤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화자인 '켈리 메디나'의 불안정한 정서/정신 상태를 정말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화자가 도대체 뭔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긴장하면서 읽었다.

 


개연성이 좋기 때문에 반전이 있다고 해도 '어.. 이거...?'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로 밝혀지는 정도. 너무 자세히 리뷰를 적으면 읽을 때 재미가 반감될까 봐... 적지를 못 하겠... 

그냥 한 마디로 존잼이니 믿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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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7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동산 버블 붕괴는 어쩌다 시작되었나 - 일본의 집값 폭락과 우리 이야기
강철구 지음 / 어문학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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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제: 일본의 집값 폭락과 우리 이야기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국도 일본처럼 자산 버블이 팽창한 후 폭락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될까?"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유사한 전철을 되풀이할 것인가?"

"한국과 일본이 경제 환경은 달라도 부동산 폭등과 폭락 과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여러 상황을 설정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면 어떻게 하지? 고민해 봤다. 그리고 나 역시 애매모호한 답변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 눈치 채고는 이렇게 답변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장의 흐름이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의 버블경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예방을 위한 충분한 노력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나의 답변과 달리 어쩌면 다음과 같은 단순 명쾌한 논리는 차라리 쉽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은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이니 경기침체니 하는 전철은 "밟지 않을거야"라거나 또는 "밟을거야"라는 식의 답변 말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축으로 하여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세 가지로 간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의 버블 과정을 살펴보니 수요 공급 이론만으로 성립되는 시장이 아니었다.

2) 90년대 초반 일본의 부동산 붕괴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경기침체에 빠트렸다.

3) 일본의 부동산 시장 붕괴 과정은 한국 입장에서 바로미터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일본의 부동산 폭등 경험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폭등의 정도와 폭락의 폭이 비슷하다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는 없기 바란다. 다만, 온 국민들이 허영된 숫자를 보며 부자가 된 듯 기뻐하거나 또는 우울해하고 있지만, 속마음 한편에서는 언젠가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에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마치 30년 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 책에서 한국의 현재 부동산 가격이 버블이냐 아니냐를 명확히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일본의 버블 발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부동산 버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책을 구성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저자의 고집을 반영하여 그래프와 표, 사진 등은 최소화했다.

참고로 이 책은 부동산 입문서가 아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국 부동산 시장의 안정과 장기불황 대책에, 그리고 정책 입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서문: 당연한 이야기

서문에서 저자가 설명한대로 이 책은 부동산 입문서가 아니며,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사실상 30년)에 대해 거시경제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일반인을 목표 독자로 설정한 건지 이해하기 힘든 그래프와 표 등은 등장하지 않으며 데이터의 대부분이 문장형으로 풀어서 쓰여있다. 사실 나는 그래프와 표를 좋아하기에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장은 전혀 없다.

일본이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배경은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경제와 일본 정부의 정책적인 실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일본이 경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자연재해, 금융위기가 터져서 좌절되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정책 판단 실수가 더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동산 버블 붕괴는 어쩌다 시작되었나] 장단점

장점

- 그래프와 표 대신 줄글로 쉽게 표현함

- 일본의 경제 침체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음

- 일본의 사례에 기반해 한국은 앞으로 어떤 정책/선택을 해야 할지 예측할 수 있음

단점

- 그래프, 표 덕후들은 실망함

- 일본의 사례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의 시장과 비교하기 어려움

기타

- 책의 정보가 개인의 선택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개인이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한국 부동산 폭락이 미칠 영향이 두려웠는데 읽은 후에는 일본만큼의 폭락은 없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일본의 사례가 워낙 역대급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동산/경제 정책에 대해 불만 및 비판을 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한국은행을 비롯한 정책기구가 일본과 비교할 때 일을 정말 잘 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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