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측한 괴물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오싹하고 섬뜩한
‘프랑켄슈타인’을 소설로 먼저 접하기보다
영화나 티비 등의 매체로 받아들였던 이미지가
꽤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소설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해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생명의 피조물을 인위적 조작 실험으로 만들어낸
괴물의 탄생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괴물을 만든 창조자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며,
흔히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기도 했으나
실제로 괴물은 이름이 없다.
존재 자체가 탄생과 동시에 버림받은 인생이 되어버린 그.
심연의 깊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창조주를 쫓게 되는
비극적인 일들이 그저 가슴 아플 뿐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통과 불행, 파멸의 끝을 이 책 속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오만함이 불러 일으킨 격정의 삶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인지가 참으로 의아하기도 했다.
반면 버림받은 괴물은 고통과 증오 속에서 혐으를 둘러싼
심리적 고통이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또한 씁쓸한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불멸의 모약으로 신체 건장한 인간을 만들어 보려는 이상이
세상 만물보다 더 우월하려는 욕망으로 피어올라
이토록 끔찍한 일이 닥칠 줄 정말 몰랐을까.
인간의 불결한 야망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괴물이 희망이 무참히 소멸되는 모습 속에서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결국 피조물로부터의 역습은 당연한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간의 심리적 갈등과 묘사를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이 작품이 어린 나이에 메리 셸리가 만들어 낸 유령이야기의 탄생이라니
감탄을 번복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내 영혼은 사랑과 인간애로 빛났소.
하지만 이제 나는 혼자, 가련하게 혼자가 아니오?
내 창조자인 당신까지도 나를 혐오하는데 내게 빚진 게 없는 당신의 주변 사람들한테야
내가 무얼 기대할 수 있겠소?
그들은 나를 경멸하고 증오하오.
내겐 인적 없는 산과 황량한 빙하만이 피난처요. 나는 이곳에서 많은 날을 방랑했소.
내가 유일하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얼음 동굴이야말로 내 집이오.
그곳에서만큼은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볼 일이 없소.
난 저 황량한 하늘을 반기오. 그건 저 하늘이 당신과 같은 인간들보다 내게 더 친절하기 때문이오.
많은 인간이 내 존재를 알았다면 당신처럼 나를 경멸하며 해치려고 무기를 들었을 거요.
나를 그토록 증오하는 인간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p186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은 자신도 역겨워 고개를 돌릴 만큼
소름 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신은 가엾게 여겨,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떠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만들었건만,
내 모습은 추악한 당신의 모습이구나.
그런 당신의 모습을 빼닮았기에 더욱 소름 끼친다.
사탄에게는 칭찬해주고 용기를 줄 친구,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지만,
나는 외톨이요 증오의 대상이로다.”
p250
프랑켄슈타인의 위선적이고 나약한 모습과
책임지지 못하고 회피하려 했던 모습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과오를 끝내 후회하긴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받아들여야 할 참혹한 결말 앞에서
그만 비겁할 순 없었을까.
그에게 필요했던 건 작은 관심 하나였을텐데
프랑켄슈타인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아쉬움이
끝까지 미련을 남게 만든다.
이들의 입장에서 과연 올바른 선택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