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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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공적 권력의 테크놀로지로 지배 테크놀로지를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통치(행정관리)라는 과정에 주체가 스스로 참여하는(피통치에) 방식(방법)을 말한다. 자기의 행동을 감시하는 자기 테크놀로지로. 자기제어의 기술.
푸코에 의하면 자기 테크놀로지란 개인이 자기 수단을 이용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신체 영혼 사고 행위 존재 방식을 어느 일련의 방식으로 조정하는, 즉 자신을 변화하는 방법. 중요한 것은 그저 외부(타자)에서의 투입뿐만 아니라 자기 수단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변화는 행복/순결/지혜/완전무결함/불사와 같은 특정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엔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 “이때 내가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이러한 점은, 푸코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절부터 나타났는데 바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통해 말한)의 델포이의 신탁 “네 자신을 알라”가 있다. 자신 안에 적당한 행동을 위한 기반이 되는, 즉 영혼을 관조하는 태도로 행동의 정당함에 대한 제 규칙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 플라톤에게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깃든 이 진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점. 즉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진리가 그 토대.
스토아학파는 자신이 무엇을 행 하였고 행 했어야 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으로 자기 검토를 한다. 또한 진리는 자기 자신 내부에 있지 않고 교사들이 행한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자신들이 들은 것을 외우고 그 말을 행동의 규칙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획득과 흡수되는 외부의 것이며, 개인은 그것을 행동 원칙으로 삼고 영속적으로 자신을 변화하는 실천을 한다. 즉 진리가 에토스ethos가 된다. 이 에토스가 그 토대.
그리스도교는 구원종교로서 외부에서 자기변혁을 위한 행동의 조건과 규칙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자기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에선 두 가지 방식이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방식으로, 사실의 인지가 있다. 자기자신을 죄인이며 참회자로 인식하는 방식이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방식이다. 자신의 죄를 폭로하는 것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공개하면서 동시에 죄를 없애는 행동이기도 하다.
두 번째 방식은 고백이다. 그리스도교의 자기검토로서 복종을 통해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신에 대해(향해) 영원히 관상하는 것 이 두 가지를 고백으로 실천한다. 여기서 검토의 대상은 과거의 행위(스토아학파 참고)가 아니라 현재 신에게 향한 사고와 그렇지 않은 사고를 항상 식별한다는 차원에서 현재의 사고이다. 이 사고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뱉어지는 말의 해석학, 해석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자신 속에 뭔가 숨어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 비밀을 숨기는 자기 환영 속에서 살고 있으니 그 안에 숨어있는 것을 캐내는, 그 숨은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이 양질의 사고인지 아닌지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 아닌지 인지할 수 있을까? 바로 고백이다. 사제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가능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교도자에게 고하고 모든 사항에서 자신의 스승에게 복종하고 모든 생각을 끊임없이 말로 표현하는 것.
자신의 의도마저도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 자백의 가치는 결국 언어로 표명되지 않은 그외 모든 것을 죄로 여기는 데에 있다.
타자와의(해석학적인 관계로 맺어진 스승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해석학적으로 맺어진 상태에서 타자의 의미) 완전한 복종 관계를 맺을 때 행하는 사고를 분석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고백이다.
그러나 푸코는 또 한 번의 역사적 단절을 짤막하게 설명하고 글을 끝맺는데 그리스도교에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어느 정도의 자기 포기가 함께 하는데
“자기자신의 포기 없이 이러한 언어상의 기술을 사용하게 된 것은 과거와의 결정적인 단절”이라고 한다.
대체 이게 뭘까 고민하는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현대의 수많은 자기고백적 행동들(tv 상담프로그램, 인터뷰, 고백 에세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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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감정 자본주의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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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챕터2의 감정자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읽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본 리뷰는 챕터2에만 한정.
심리가 병리가 된 후 가장 큰 변화는(사소할 수도 있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병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과 이런 병리가 있다는 건 건강한, 즉 완전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걸 전제하는 것. 이를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이는 상황이 왔는데, 문제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실현된 자아(완전한 자아)이고 아닌지 그 기준점이 명확하게, 심리학도 정신분석도 그 어떤 것도 밝히지 못 하고 있다는 것. 특히 이런 완전하지 못한 자아가 겪는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들이(자기계발 포함)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의 소유 차이에 따라 가능하기에 문제...
오프라 윈프리쇼를 예시로 고백 상담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어떻게 병리화되고 관계에서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 안에서 생기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감정기능이 감정자본이 되는가 이야기해주는 게 은근 재밌었다.
추가)
챕터3에서 주목할 지점: 문화는 정치로 봉쇄, 포섭될 수 없다는 저자의 의견. 대중문화 텍스트는 자의식적, 고의적으로 양면적, 아이러니하고. 자기반영적이고, 자기모순적이고, 역설적이기에 참/거짓이나 정치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옳은가...라고 저자는 지적. 따라서 비판론은 문화가 일정한 정치적 아젠다를 어떻게 증진하는가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내부 안에서 시작하는 비판이라고 한다... 내재적 기준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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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 이론총서
조현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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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실수로 원전인 줄 알고 이북을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소고들을 모아놓은 개론서였다.
읽다가 든 생각들 몇 개만 적어두기로 한다.
라캉은 상징적 남성이 팔루스를 가지지 못 한다고 했는데 왜 그 부분은 이야기가 없지?
특히 라캉은 생물적 남성이 상징적 남성 위치를 지닌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캉이 로고스 중심적이라는 것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데 로고스의 문제는 로고스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것이 올바른 논리라고 믿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서
사실 헤테로노마티브한 점도 비판적이긴 한데 만약 라캉이 말한 팔루스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팔루스가 아닌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여성성과 동일시한다면 여성의 히스테리는 자신이 팔루스가 아니라는 점/남성이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모두
상징적인 위치에서 생각해 생물학적 성별과 전혀 관계 없이 이해한다면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고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 적어도 자기혐오 정도는
그 기표가 나의 기표와 같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느끼는 게 인간이고...
나의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생기듯이
하지만 이 기표가 내 기표가 아니라는 그러한 논리 밑에는 진정한 기표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문제는 진정한 게 있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이냐도 있지만 그러면 결국 본성 문제로 돌아가는 것밖에 안 되는 것...
텅 비어있는 기표이기에 기표의 수행성으로 정체가 결정지어진다면...
하지만 생물학적 본질이 마커로 수행성이 입혀지지 않을까... 남성은 남성의 수행성이... 여성은 여성의 수행성이...
행위가 수행을 통한 정체성을 입혀준다면 아떤 존재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그 논리/그 갈고리? 그러한 행위를 끌고 오는 갈고리를 선택하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우울증을 이야기하며 사랑의 거부(라캉의 의미적에서)와 동성애는 대타자와 자신을 타자화하는 의미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가 아닐까...
따라서 라캉의 여성성에 기초해 내가 여성적 상징 위치를 갖고 있고 거기서 내가 팔루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내가 남성적 상징 위치도 갖고 있으며 거기서 내가 팔루스를 가지지 못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 라캉 말처럼 욕망을 가로질러 조금은 덜 곶통스럽다는 걸...
사실 라캉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거 같다. 우리가 언어 사용자인 이상 대타자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남의 욕망의 대상의 그 대상과 동일할 수 없고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도 없다는 걸(물론 가질 수도 없고) 아는 걸로 체념을 통한 조금은 덜 곶통스러워 해라 이런 거...
그래서 나는 완벽해질 수 없고 모두에게 사랑 받을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을 가질 수도 없다는 거~*
남성이 여성에게 얽매이는 여성성이라는 것도 결국 지들을 옭아매는 것이고... 라캉의 상징적 여성 위치를 통해 이런 여성성(팔루스라는 것에 부여하는 온갖 가치들)을 다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능성을 보고 라캉과 페미니즘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이 상징적 위치를 단일한 생물적 성별에 연결해서 생각하기 쉬운 그런 오해 때문에 헤테로노마티브함, 그리고 생물적 성별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나는 이제 라캉에서 넘어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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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k Bruna: See More (Paperback)
딕 브루너 / Nai Uitgevers Pub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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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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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귀환 - 현대철학과 함께 돌아온 사유의 혁명가
서동욱.진태원 엮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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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숙제를 해야 하는 그런 책. 서양철학사라도 가볍게 읽고 들쳐매야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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