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 이론총서
조현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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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실수로 원전인 줄 알고 이북을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소고들을 모아놓은 개론서였다.
읽다가 든 생각들 몇 개만 적어두기로 한다.
라캉은 상징적 남성이 팔루스를 가지지 못 한다고 했는데 왜 그 부분은 이야기가 없지?
특히 라캉은 생물적 남성이 상징적 남성 위치를 지닌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캉이 로고스 중심적이라는 것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데 로고스의 문제는 로고스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것이 올바른 논리라고 믿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서
사실 헤테로노마티브한 점도 비판적이긴 한데 만약 라캉이 말한 팔루스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팔루스가 아닌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여성성과 동일시한다면 여성의 히스테리는 자신이 팔루스가 아니라는 점/남성이 원하는 그 무언가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모두
상징적인 위치에서 생각해 생물학적 성별과 전혀 관계 없이 이해한다면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고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 적어도 자기혐오 정도는
그 기표가 나의 기표와 같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느끼는 게 인간이고...
나의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생기듯이
하지만 이 기표가 내 기표가 아니라는 그러한 논리 밑에는 진정한 기표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문제는 진정한 게 있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이냐도 있지만 그러면 결국 본성 문제로 돌아가는 것밖에 안 되는 것...
텅 비어있는 기표이기에 기표의 수행성으로 정체가 결정지어진다면...
하지만 생물학적 본질이 마커로 수행성이 입혀지지 않을까... 남성은 남성의 수행성이... 여성은 여성의 수행성이...
행위가 수행을 통한 정체성을 입혀준다면 아떤 존재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게 되는 그 논리/그 갈고리? 그러한 행위를 끌고 오는 갈고리를 선택하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우울증을 이야기하며 사랑의 거부(라캉의 의미적에서)와 동성애는 대타자와 자신을 타자화하는 의미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가 아닐까...
따라서 라캉의 여성성에 기초해 내가 여성적 상징 위치를 갖고 있고 거기서 내가 팔루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내가 남성적 상징 위치도 갖고 있으며 거기서 내가 팔루스를 가지지 못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 라캉 말처럼 욕망을 가로질러 조금은 덜 곶통스럽다는 걸...
사실 라캉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거 같다. 우리가 언어 사용자인 이상 대타자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남의 욕망의 대상의 그 대상과 동일할 수 없고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도 없다는 걸(물론 가질 수도 없고) 아는 걸로 체념을 통한 조금은 덜 곶통스러워 해라 이런 거...
그래서 나는 완벽해질 수 없고 모두에게 사랑 받을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을 가질 수도 없다는 거~*
남성이 여성에게 얽매이는 여성성이라는 것도 결국 지들을 옭아매는 것이고... 라캉의 상징적 여성 위치를 통해 이런 여성성(팔루스라는 것에 부여하는 온갖 가치들)을 다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능성을 보고 라캉과 페미니즘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이 상징적 위치를 단일한 생물적 성별에 연결해서 생각하기 쉬운 그런 오해 때문에 헤테로노마티브함, 그리고 생물적 성별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나는 이제 라캉에서 넘어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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