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극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작가 본인과 난징 피해 여성 간의 시간적·공간적 거리감이 사라졌고 이 때문에 난징의 고통이 아이리스 장의 고통으로 전염되었다는 설명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씨앗처럼 이식되어 그녀 내부의 고통으로 발아된 것이겠지요. 그 싹이 자라 맺은 결말의 이름은 작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난징의 강간』은 당시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았던 한국인까지 대변합니다.
일본군 위안소는 중국의 20개 성省과 시市에 분포돼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중국 여성 20만 명이 성노예로 학대받았고 이는 단지 중국만의 일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난징에는 중국, 한국, 대만에서 끌려온 ‘위안부’ 할머니를 추모하는 리지샹利濟巷위안소유적진열관이 위치합니다.
기념관 입구의 검고 어두운 천장에는 12초 간격으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거대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는 난징대학살 당시 12초마다 난징 시민 한 명이 희생됐음을 의미합니다.
‘양쯔 강가 진흙더미 10킬로미터 구간에 태워지다 연료조차 아까워 버려진 난징 시민의 시체가 10만 명’이란 통계가 머릿속에 스쳤습니다.
"We die. That may be the meaning of life. But we do language. That may be the measure of our lives(우리는 죽는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척도가 될 수 있다
피콜라는, 토니 모리슨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떠올린 한 아이이고(백인처럼 푸른 눈을 갖고 싶어했던 한 소녀), 클라우디아는 토니 모리슨의 작가적 분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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