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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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모든 이름들>이라는 원제를 사용치 않고,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변경한 탓에 화도 좀 났더랬다. 이 제목 덕택에 <눈먼 자들의 도시>나 <눈뜬 자들의 도시>의 연작과 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고, 그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모든 이름이란 곧 아무 이름도 아니라는, 혹은 그 어떤 이름도 중요치 않다는 것을 대변해 보일 수 있어서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주제씨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인의 신상기록부를 우연찮게 손에 넣으면서 시작된다. 단지 이름과 탄생일, 결혼일, 이혼일 등만이 기록된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를 알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제씨가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혹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제씨가 수십 년 동안 보고 기록했던 그 모든 서류들이 차츰차츰 쌓여, 그의 마음 속에 어떤 열망과 갈망을 들게 만들었으리라.

 

 어쨌거나 주제씨는 그를 찾아 나선다. 비록 찾아 내더라도 서로 마주보고 대화할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지만, 그를 찾으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 다짐은 마침내 주제씨에게 비이성적인 행동까지 강요한다. 무단 침입, 도둑질, 공문서 위조 등 수많은 죄와 거짓말을 만들어 내면서도 임무를 달성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주제씨는 임무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 여인을 찾아 내어 확인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탓이다. 주제씨는 그 여인의 무덤을 찾아가지만 청천벽력같은 양치기의 말을 듣는다.

 

- 예를 들어, 여기 이곳에 있는 사람도, 노인은 지팡이로 무덤의 불룩 튀어나온 곳을 두드리며 말했다, 선생이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거요. 주제 씨는 그가 서 있는 땅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묘지 번호판의 마지막 돌과, 그의 마지막 확신과, 마침내 찾아낸 그 미지의 여자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251쪽)

 

 불교의 사상 중 하나인 유식무경(有識無境)의 철학이 떠오른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느낄 때 인식하는 대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인식 활동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 자체를 잘못 인식하거나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른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주제씨는 공(空)한 것을 실재하다고 믿었으나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미지의 여인이 허물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이미 여인은 숨을 거두었지만 시체가 무덤 아래에 파묻혀 있기에 그것이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주제씨는 확신을 잃어 버린다. 도대체 그 여인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인가. 자신의 허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인가. 중앙호적등기소도 소장도 할머니도 3층의 여자도 모두 자신의 상상일 뿐인가. 혹은 그 자신마저 한 순간 꿈 속에 파묻힌 허망한 존재인가. 이같은 주제씨의 혼란은 삶의 허무로 대치된다.

 

-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다를 게 없죠, 나타났다가, 얘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진사들에게 미소를 짓고, 항상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죠. (206쪽)

 

 하지만 주제씨는 그 허무를 이겨내려 한다. 그리고 미지의 여인을 실재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 낸다. 여인의 사망일이 적힌 기록부를 찢어 태우고, 사망진단서를 찾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록부를 작성해 그가 아직 존재한다는 증거를 남기려 다짐한다. 이 일만 무사히 완수한다면 그 미지의 여인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그를 다시 실존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진심으로 존재한다고 믿음으로 해서 그 여인이 이름없는 무덤을 헤치고 벌떡 일어나 돌아오지는 않을 터다. 더군다나 유식무경의 철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 이 논의를 단지 종교에 기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다시 말해 불교의 윤회나 기독교의 지옥을 끌어 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군가의 존재가 죽음을 맞았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 있는가. 혹은 그 존재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인가. 그 누군가가 죽음을 맞아도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혹은 주제씨가 새로 작성할 기록부 속에서 여인이 존재하는 것으로 재구성된다면, 그것은 다만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미 타계한 작자들이 쓴 아름다운 작품들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쓰인 것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상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제 아무리 명확한 근거라 확신하며 무언가를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허나 그것들에 아무리 천편일률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답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분명 해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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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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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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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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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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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김영숙 지음 / 애플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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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유의해야 할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파리 블루>가 기존의 여행서적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라는 부제에 홀딱 넘어간 독자들에게는 루브르, 오르세, 피카소, 로뎅, 퐁피두 등의 미술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사진 등을 기대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 책이 아쉽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책은 여행기라기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며, 미술관에 관련된 내용보다는 파리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뜨거운 연인들의 사진과 풍경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행 정보를 얻고 싶어하는 독자나 미술관 여행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으리라. 아마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라는 부제라도 없었더라면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들지는 않을텐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파리 블루>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이 책을 덮으면서, 참으로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김영숙의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부모님에 대한 단상들은 참으로 블루(blue, 우울한)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파리 미술관 여행을 하면서 지난 날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우울을 당당히 엮어낸 것이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허나 여행에세이가 가진 목적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였던 이 책에 대한 실망감은 그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즐거운 기분으로 전환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여행의 목적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단순히 관광만 즐기려는 사람도 있고, 휴식을 가지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연인 혹은 가족과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 김영숙은 그 중 휴식을 목적으로 떠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휴식을 통한 기쁨을 얻기 보다는 과거의 불행만을 떠올리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일상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고 삶의 활기를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자학을 위한 여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에 반해, 슬픔을 위해, 그것도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슬픔에 빠지기 위해 떠난 여행은 그닥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더 감성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된 글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무엇보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연민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애닯고 슬픈 감정을 승화시키지 못 하고, 단순히 그 아픔만을 떠올리는 것은 위악으로 보인다. 나에게 있어 위악은 위선 못지 않게 답답한 것이라서, 어쭙잖은 위악에 화가 나고 실망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골랐던 이 책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었기에 더욱 더 큰 실망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싶었고, 그동안 가고 싶었던 미술관들을 사진과 글로나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짙은 아쉬움을 남겨 주었지만, 여행의 목적과 방향성, 의미 등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준 것 같다. 또, 올해 여름엔 꼭 파리로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던 내게 주춤거릴 시간을 안겨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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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거울 메타포 1
미하엘 엔데 지음, 에드가 엔데 그림, 이병서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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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해하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아버지 에드가 엔데에게 바치는 글답게 이 소설은 초현실적인 세계를 매우 몽환적으로 잘 표현해 내었다. 그래서 미하엘 엔데라는 이름을 보면 <모모>보다 <자유의 감옥>을 먼저 떠올리는 내게, <거울 속의 거울>은 실망시키지 않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난해함' 이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점입가경'이다. 넘기면 넘길수록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였음을 깨달았을 때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1장(場)의 마지막에서 호르는 말한다. 우리가 만날 수 있을 때, 자신이 '모든 것'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호르를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엔데는 <자유의 감옥>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에 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내야만 그 말은 진실이 된다"라고 말했다. 옳다. 그리고 반갑다. 그는 이야기에 걸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제발 부탁이야, 지금 네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네 귀를 내 입에 바싹 붙여 줘.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하고 있어 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야. (8쪽)

 

 엔데도 호르와 같은 절실함을 통해 특별한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절실함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해답을 찾아 가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엔데가 그에게 미하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손을 맞잡은 채 빛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살풋 떠오른다. 아마 그들은 거울 속의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리라.

 

 한가지 아쉬운 점은 역자 후기의 A to Z 퍼즐이었다. 애써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부분들이 눈에 띄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퍼즐이 있었기에 주목할만 하다. 그것은 I, 즉 Inhaltsverzeichnis(차례)였다. 그는 I 퍼즐 아래에, '이 작품에서 차례는 별 의미가 없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작품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라는 덧을 달아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거울 속의 거울>의 핵심이리라. 그 이유는 '거울 속의 거울'과 <거울 속의 거울>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나 또한 역자처럼 엘레베이터에서의 '거울 속의 거울' 놀이가 떠올랐는데, 그 상(狀)은 언제봐도 새로운 것이었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이 거울 속에 발을 들여다 놓고 또 다른 문을 향해 계속 걸어가다 보면 나올 것 같던 그 세계는 어디 있는지 등을 생각하곤 했었다. 때때로 그 끝을 찾다가 마침내 한 점(点)이 볼 때면, 어린 나이에도 그 한 점이 문의 끝은 아닐거라는 짐작이 들어 괜한 기대에 설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걸어도 그 끝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버리면, 거울 속을 외면해 버리고 마는 것으로 끝났다. 마치 13장(場)의 방인 동시에 사막인 공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처음 말했듯 이 소설은 난해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누구라도, 언뜻 보면 서로 연관이 없는 것 같은 30장의 이야기들이 한 데 엮이는 순간을 느낄테니까. <거울 속의 거울>, 그 또 다른 세계의 출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을.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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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 붓으로 칼과 맞선 500년 조선전쟁사 KODEF 한국 전쟁사 1
장학근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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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 전쟁과 관련된 영화나 소설 등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좋아한다기 보다 전쟁에서 묻어 나는 절망 속의 희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욕망의 끝은 어디인지에 대해, 무엇보다 그 어리석음에 대해 알 수 있는 탓이다. 이는 또 선과 악 혹은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너무나 잘 볼 수 있는 주제이다. 그래서 한국 전쟁사를 다룬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가 흥미로워졌다.

 

 허나 표지를 볼 때부터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의 부제는 '붓으로 칼과 맞선 500년 조선전쟁사'이지만, 조선의 외교술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대교린의 조선 외교 정책은 초반까지 무난히 가능했으나 그것의 성공으로 인한 지나친 일반화로 조선을 어렵게 할 때가 왕왕했다. 특히 장학근이 가장 비판했던 것 중에 하나는 명·청 교체기에 새로운 국제관계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기존 질서에 안주하려 했다는 점이다. 사대 정신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던 탓이다. 명나라가 성리학을 외교 관계에도 이용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단순히 성리학의 이론을 숭상하여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는 점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성계가 혁명 정권을 세우며 명의 질서를 따랐던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들처럼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청에 대항하려 했던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 할 만하다.

 

 게다가 외교의 기본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도 게을렀다. 일본이 메이지 정권을 수립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을 무렵, 조선은 여전히 스스로를 상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에 침략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처럼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지 못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의 잘못이다. 조선은 500년 역사 속에서 늘 수세적인 태도만을 보여 왔고, 기존 시대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 정치를 고집하고 명에 사대하는 것만이 옳다고 여기다 보니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언제나 외침에 대비하기 보다는 명의 원조를 기다렸고, 그것은 결국 조선을 멸망케 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 대 인간도 의리만을 따를 수 없을진대, 국가 대 국가는 오죽하랴. 조선은 그것을 몰랐을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명을 숭상할 줄만 알았지 그들과의 관계를 돌이켜 볼 줄 몰랐던 탓이다. 우리가 지금 역사를 배울 때 이순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공을 기리지만, 선조가 외침에 대비하지 않고 국토를 허술히 관리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우리는 한 번도 외침을 한 적이 없는 민족이라는 점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곤 한다. 학교 교육이 그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어적인 자세를 지속하고 가르친다면, 언젠가 또 같은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오욕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려는 의지가 없다면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은 과거를 지향하는 가정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만약 그 때 그랬다면'이 아니라,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으로 가정해야 한다. 이제 몸과 마음의 경직을 풀고 달려야 할 시점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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