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권현숙 지음 / 세계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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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속에 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권현숙의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삼중주」, 「열린문」「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마지막 수업」,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라는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매 단편마다, 그는 도시 속 인간의 외로움을 절절히 표현한다. 하나같이 이국적인 분위기와 몽롱함이 조화된 단편들은, 외로워하는 인간들을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해화 속에 미묘한 불협화음은 내재된 외로움을 간지럽히고,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불협화음 가운데 진정한 해화를 위한 구원은 언제나 늦다는 것이다.

 

- 순순히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어. 주인이 허락한다면, 살아갈 용기까지도....... 하지만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141쪽, 「인간은 죽기 위해 도시로 온다」)

 

 「인간」은 세미노마를 앓고 있는 남자와 음악잡지에 기사를 쓰는 여자가 이국의 땅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확정성이 넘치는 미래를 내다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단편이다. 사랑이 거세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절망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희망에 환희를 느끼기도 전에, 남자는 허망한 말투로 말한다. 구원은 너무 늦게 온다, 고.

 

- 길은 푸르스름한 밤의 빛에 싸여 있다. 그 너머 깜깜한 어둠은 숲이다. 하늘에는 아직 먼동이 트는 빛도 보이지 않는다. 고독한 시간, 밤의 가장 쓸쓸한 시간이다.  (42쪽, 「삼중주」)

 

 또 「삼중주」에서는 새벽은 깊어 가고, 먼동은 아직 트지 않은 시간을 가장 고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외로움은 시시때때로 각 장에서 몸을 비틀고, 꼬아대며 외치고 있다. 마치 그 단어 자체에서 어떠한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이라도 하듯. 

 

 「삼중주」에서는 윗집 여자가 아내를 잃어버린 아랫집 남자의 집을 몰래 다녀가는 과정 속에서 생긴 오해를 섬뜩하게 그렸다. 우연히 아랫집 남자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게 된 여자는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남자의 집을 들락거린다. 남자는 아내의 향수 '바디'의 향기, 깨끗해진 프라이팬, 푹 파인 사과차, 작은 단추 등으로 누군가의 침입을 짐작한다. 덫을 쳐놓고 기다리지만, 낌새는 전혀 없다. 남자는 깨닫는다. 혹시, 죽은 나의 아내가, 라고 말이다. 여자도, 남자도 각자의 방에서 제각기 미쳐가고 있다. 그들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편집적일 정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놀랍기 그지없다.

 

- 쓸데없이 전기를 낭비하며 마냥 돌고 있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나는 돌발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소비, 무규칙, 방임.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무구한 기쁨. 갑자기 이 도시에서 살고 싶어졌다. 이 중세도시가 내게 인본주의의 맛을 보였다. (154쪽, 「마지막 수업」)

 

 그들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가는 것일까. 역시나 이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수업」에서, 쟝은 사고로 죽는다. 안과 싸우고 내연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가는 길이었다. 쟝은 죽어버렸지만, 안은 살아 있다. 게다가 뱃속에는 쟌느까지 있었던 것이다. 쟝의 친구인 아담은 안이 걱정되어 매일같이 그들이 동거했던 집에 찾아가 안을 돌본다. 안은 자신이 쟝을 죽이고, 쟌느까지 죽였다고 고백하며 그에 따른 죄책감과 그렇게 만들게 한 쟝에 대한 분노가 한데 뒤섞여 있다. 스스로 죽음을 찾아 가려던 안은, 애초에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아담으로 인해 되살아 난다. 이것은 「인간」에서 얼핏 보이던 희망과 같은 종류의 것일까. 물론, 의뭉스러운 작가는 이것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의사인 남자와 화가인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허나 남자가 결혼을 말하여도 여자는 거부한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을 의심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껴안는다. 반면 여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연애 속의 사랑을 자제하는 것도, 냉송하는 것도 힘든 여자에게 결혼은 두려움이다. 억눌러 온 집착을 억제할 수 없다고 짐작한 여자는 끝끝내 거부한다. 이러한 줄거리는 달리는 바이크 위에 앉은 여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바이크 위의 두 남녀의 대화는 못내 진지하다.

 

- 넌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회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해. 좀 더 근원적인 것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어. (203쪽,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

 

  이어, 그들은 추락한다. 앞에 앉은 남자를 꼭 붙잡은 여자의 손이 늘 위태하긴 했다. 하지만 이 추락은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의도적인 외도이다. 여자는 사과꽃 향기가 풍기고, 달려오는 숲이 보이는 아름다운 순간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언제나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잡아 먹는다고 말하지만, 이 단편을 보면 그 반대인 듯 하다.

 

 어쨌든 의심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사랑을 그치고 삶이 있게 하라」는, 전개 과정 내내 템포가 한 박자씩 느리게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살짝 지루해질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일까. 혹은 또 다른 복선일까. 또, 이 문제점은 「열린문」에서도 살짝 비친다.

 

 죽을 때가 다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네의 정신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방탕했던 노인이, 나이가 들어 외로움과 병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성욕이 불끈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독특한 소재로 다가온다. 이것 또한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노인은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에서, 늘 문을 열어두고 사는 특이한 인물이기도 한다. 또, 등장하는 여자는 성욕을 잃은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향기에 발기해버리는 노인에게 역겨움과 구토감을 느끼며 떠밀치고 도망친다, 라는 설정이 씁쓸하다.

 

 인간은 정말 죽기 위해 도시로 오는 것인가. 도시는 도대체 무슨 힘을 갖고 있기에, 곧 세상을 버릴 노인까지 답답한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인가. 단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올 수가 없다. 마치 진혼곡 도중, 그 장엄함에 짓눌러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올가미 속에서도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인간」에서 여자가 그토록 싫어하던 프랑스에 발을 묶이게 만든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이다. 물론 이 인본주의에도 불협화음은 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만 인간답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시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답은 뻔하다. 허나 그것이 도시의 외로움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 자체의 감수성과 아스팔트에 적응하는 것인지,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섣불리 속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제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는 것만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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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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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 서편제라는 세 편의 연작 소설은 <천년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활했다. 세 편의 제목만 읽어서는 <천년학>이라는 제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누이의 진정한 만남과 깨달음이 <천년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독하지 않은 이상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년학>을 찾기 위해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렸다. 문득, 이렇게까지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신을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배다른 오누이가 짊어져야 했던 한을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리를 해야 했던 누이의 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은 그 자체가 한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언제나 소리에 얽매여 있었고, 햇덩이를 가진 오라비는 그러한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수를 해야 했지만,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햇덩이를 감당할 길이 없던 오라비는 결국 아버지와 누이를 내버려 두고 떠난다. 다시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을 찾아 헤매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누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게다가 누이는 장님이라 한다. 오라비는 누이가 눈을 잃은 이유를 단숨에 꿰뚫는다. 오라비가 떠난 것 처럼, 누이가 떠날까봐 겁이 난 아버지의 횡포라는 것을.

 

 소리로 인해 햇덩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오라비는, 소리로 인해 눈을 잃은 누이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를 용서한 누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소리는 한의 정서에 의해 태어났다는 기존의 학설처럼, 그들에게 소리는 그 자체로써 한의 대상이며, 한을 풀어 내는 매개체이다. 그런 아이러니는 이루 감당할 길이 없을만큼 처절하게 느껴진다. 한의 대상인 소리를 듣기 위해 떠도는 오라비와 소리를 뽑아 내는 누이는, 그렇기에 더욱 쌍둥이같은 닮은 꼴로도 보인다.

 

 오라비가 누이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결국 오라비가 누이를 찾았는가는 의문이다. 찾는 동안 한 번의 만남은 있었으나 그것으로 누이를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 오라비에게 나를 찾게 하지 마시오. 전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 하시오…….

 

 누이는 이런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남은 <천년학>을 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선학동은 이미 옛 모습을 잃었지만, 누이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천년학>을 보고, 또 오라비가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리라. 그리하여 오누이는 가슴에 지닌 한을 끝끝내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의 한을 이해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라비가 생의 분노와 살기인 햇덩이에 취해 소리를 청하는 것을 누이가 이해했듯이, 누이가 아버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을 오라비가 이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허나 이렇게 닮은 꼴이기에 서로의 한을 서로가 덮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이는 한 마리의 학이 되어 소리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오라비는 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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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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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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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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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무덤 훼손 사건 발생'이라는 기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전개부터 결말까지 어설픈 글솜씨로 내용을 진행한다. 주인공인 청소년 핼이 일기를 쓰는듯한 형식으로 내용을 진행하고 있고, 중간 중간에 핼을 상담하는 사회사업가의 기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사업가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사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사업가라는 말은 사장되어 더이상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한다면 사회복지의 역사까지 파고 내려가야 하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자.

 

 어쨌든 청소년 문제 담담인 듯한 이 사회사업가는 핼에게 친구의 무덤에서 장난을 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끈덕지게 조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만 그에게 선고하는 형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도록 판사에게 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쉽지 않은 사례에 대해 사회사업가가 겪었을 어려움과 핼의 아픈 기억을 건드려야만 하는 고통도 언뜻 이해가 간다. 그의 강요 끝에, 핼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사건의 전말을 글로 설명하려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사전은 어휘의 광산이다. 들이파면 나온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278쪽)

 

 이처럼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쉬울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던 것이다. 핼은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글로 표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더욱 고된 작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소설을 쓴 에이단 체임버스는 12년의 집필기간을 거쳤다고 말하지 않던가. 

 

 흥미로운 것은 핼과 배리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에서는 동성애를 특이한 것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핼과 배리는 물론이오, 주변의 인물들 또한 지나치게 이상하게 여기거나, 역겨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처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매우 이채로움을 느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질감을 느껴지지 않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어쨌든 핼이 사랑한 배리 고먼, 시체가 된 배리 고먼은 매우 독특한 인물로 그려진다. 

 

- 빠른 건 속도를 얻는 수단이야. 간선 도로처럼 좋은 길에서는 빨리 달린다는 느낌이 안 들어. 그저 속도가 저만치 앞에 있고 내가 그걸 쫓아간다는 느낌만 들지. 속도는 언제나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그래서 나는 그걸 잡으려고 점점 더 빨리 달려. 하지만 속도는 늘 저만치 앞쪽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빨리 달리는 걸 느끼지 못해. 아니면 점점 빨라진다는 걸.

 

- 만약에. 네가 그걸 따라잡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나는 꿈에서 그걸 경험해. 그건 보이지 않는 거품 안에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어떤 힘의 장場에 있는 것. 그건 나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어. 눈 깜짝할 새에. 아주 이상해.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아는데, 힘쓰는 느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진동도 없고 비슷한 무엇도 없어. 그리고 위험도 없어. 그 경험 전체가 아주 놀라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에너지의 거품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영원히. (191쪽)

 

 흔히 속도를 즐기는 사람을 위험한 인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배리 고먼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배리는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사를 초월한 듯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스릴과 공포를 가져다 주는 것을 즐기게 되었던 것인데,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그 방법의 일환이었다. 배리의 성격은 여기저기서 독특하게 연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 중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 사람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거야. (223쪽)

 

 특희 배리가 제시한 이 맹세는 이 사건의 출발점이자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 물론 고통 뿐 아니라 잠시지만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가 맹세를 받아 들였기에,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그에 곁에 머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이 황당무계한 약속을 받아 들인 것은 배리의 죽음이라는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 '마치 하늘을 날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확 뛰어올랐죠. 어찌나 황당하던지.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중독된 모양이에요. 아니면 미쳤는지도 모르고요.' 그 어느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기도 했다. 시간 없는 시간의 거품에 취하고, 속도에 중독되고, 비상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미쳤던 것일거다. 그의 꿈이 맞았던 것이다. (272쪽)

 

 핼이 배리와 했던 맹세를 깨버리려고 하자, 배리는 그 맹세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리는 엉망진창이 된 마음으로 핼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 어려운 일이야.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는 건. 그걸 원하는 게 잘못인 것 같아. 시도하는 것도 잘못이고. (295쪽)

 

 카리의 말은 배리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핼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마법의 콩을 찾던 핼에게, 배리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핼은 더욱 그를 강렬히 원했던 것이리라.

 

 결국 불행으로 끝났지만, 그것이 꼭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 죽음으로 인한 존재의 부재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핼은 죽음이라는 관념에 더욱 관심이 있었지만, 그 또한 배리의 부재로 인한 고통으로 그 관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듯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 현실은 알코올 결핍이 빚어내는 환상이다. (128쪽)

 

- 너만 그런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잘 몰라. 끝까지 못 찾기도 하고. 그걸 찾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지. 원하는 걸 알고 그걸 손에 넣는 사람은 더 운이 좋고. (154쪽)

 

 핼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말을 해준다. 하지만 그 말들을 이러한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귓가에서 흘러 사라졌을 말이다. 핼은 값비싼 삶의 경험을 획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겪지 않고서라도 진리를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등가교환의 법칙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분명 그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진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경험은 은행에 돈이 쌓이듯 우리 안에 쌓이는 걸까? 거기에 이자도 붙어서 나중에 그걸로 어떤 근사한 것을 살 수 있게 될까? 거대한 초신성 같은 경험을 가지고? 나는 그렇게 저축한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사게 될까? 우리의 모든 과거를 가지고? (250쪽)

 

 그 탓에 핼은 이 경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당신의 삶을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꽤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인생의 진리와 첫사랑을 경험하고 안타까운 이별과 경험을 얻기까지 핼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파이크에게 사우스엔드의 선물을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핼이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우리는 동정과 깨달음을 얻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역사는 무엇일까, 좀 더 고민해 볼 일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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