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
필립 리브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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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크라이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영토를 우주까지 넓힌 대제국이라는 전제 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주의 창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창조한 자가 존재한다는 이 기발한 상상력에서 아트와 머틀이 태어난 것이다.

 

 '최초의 존재'인 우주 거미들의 공격으로 고아가 된 아트와 머틀은 구명보트를 타고 라크라이트를 탈출한다. 우주 거미들의 거미줄로 꽁꽁 묶인 라크라이트로 다시 돌아오게 될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달에 착륙하여 우주나방의 공격을 받은 그들은 우주 해적 잭 해벅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남매와 해적들은 잭의 소프로니아호로 화성으로 피한다. 그 곳에서 다시 우주 거미들의 공격으로 머틀이 잡혀 간다. 잭의 부하들은 아트까지 넘기라고 하지만, 머틀에게 반한 잭은 머틀을 구하기로 마음 먹는다.

 

 갖은 고행 끝에 우주 거미의 본거지인 토성에 도달하게 된 아트와 잭 무리는 큰 위험을 당한다. 하지만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를 깨워 그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아트는 어머니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의 변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아트와 머틀의 어머니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또 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만드는 자'이며, 라크라이트가 '만드는 자'의 배라는 것이다. 이는 곧 그의 어머니가 지구를 창조한 자라는 뜻이다.

 

 온갖 위험 끝에, 결국 지구는 물론 우주를 구한 그들은 라크라이트호로 다시 돌아간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트과 머틀 모두 말이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를 만난 그들은 그동안 겪은 고행보다 더 큰 행복을 얻는다. 게다가 엉터리 요조숙녀인 머틀은 용감한 남자친구 잭과 함께다. 이러한 해피엔딩은 그 사이의 긴장과 흥미를 놓치지 않고 잘 이끌어 나가고 있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허나 대영제국의 우주 영토 확장은 기발한 상상력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제국주의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져 아쉽다. 이것이 영국 작가인 필립 리브의 지나친 애국심의 발로인지, 제국주의라는 허상에 대한 비웃음의 일갈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덕분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신기한 온갖 우주생물들과 인체실험을 서슴지 않는 인간들의 잔인함에 대한 폭로들은 매력적이다. 또 우주선들이 어떤 물질의 연소가 아닌, 의지를 통한 화학적 결합, 즉 연금술에 의해 움직여 진다는 것 또한 기발해, 눈을 반짝이게 만든다.

 

- 배를 둘러싸고 있는 연금술적으로 변성된 입자들이 일으키는 그 반짝이는 선수파 때문에 에테르 항해자들은 천체들 사이를 빠른 속도로 여행할 때 '아이작 뉴턴 경의 황금길을 탄다'고 말한다. (93쪽)

 

 나 또한 기회가 된다면, 아이작 뉴턴 경의 황금길을 타보고 싶을 정도로 설레인다. 아트와 머틀과 함께 한 모험이, 나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도 무럭무럭 빛나는 것 같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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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삿갓 -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이청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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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네 다리 소나무 밥상에 올려놓은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오락가락하는구나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주인 양반 무안해하지 마오

吾愛靑山到水來 오애청산도수래

청산이 물에 비치니 그 아니 좋소

 

 김삿갓을 좋아하게 된 건 이 시 덕분이었다.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던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이 시는 오래토록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김삿갓, 하면 이 시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어쨌든 그런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하니 기대가 안 될 수 없었다. 이미 그를 소재로 많은 책이 쓰여 졌고, 읽혀 왔으나 역사소설을 즐겨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고 나면 헷갈리기 마련이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읽고 난 지금은 더 헷갈리기 그지없다. 전설 속의 인물로 자리잡힌 그에게 인간적인 면모라 칭하며 한꺼풀 더 씌워 놓은 것이 살갑다기 보다, 씁쓸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인간적인 면모란 것이, 또 고뇌란 것이 어쭙잖게 가벼운 느낌이었다. 우리는 김삿갓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았지, 무책임한 영혼으로 본 것은 아니다. 비범인으로 보았지, 범인으로 본 것이 아니다. 명인으로 보았지, 무뢰한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청은 이 점에 대해 단호하다. 사람들은 김삿갓의 실존보다 전설을 더 좋아하지만 자신은 전설 뒤에 있던 김삿갓을 만나겠다, 고 말이다. 허나, 진정 이것이 김삿갓의 진정한 모습이며, 고뇌인가.

 

 물론 이것은 픽션일 따름이며, 그가 보는 김삿갓은 내가 보는 김삿갓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를 논할 수 있었어야 했다. 연재하던 글을 엮어 묶은 것이라서 더 안타까웠던 것일까. 연재물의 특성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나의 취향에는 더욱 부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여기까지가 그의 역량이라면, 그냥 웃고 말지요.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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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머물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김활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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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쓴 일본어로 읽었더라도 이렇게 느껴졌을까. 글쎄, 딱히 번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갑자기 아무렇지 않던 것이 내 눈 앞에 선명히 나타나 살짝 어지럼증이 일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딱딱한 문체에, 무미건조한 어투에, 세상사에 관심없다는 듯한 냉소적 관조에 몸이 마치 얼음에 덴 듯 서늘해진다.

 

 잉꼬같이 다정한 두 부부가 사실, 서로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외면에서부터 그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 마음까지 얼어 붙을 것 같았다. 냉정한 평화를, 그 따위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미움보다 무서운 건, 무관심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그 둘을 바꿔놓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šœ이치는 사에코가 대리모를 하겠다는 것조차 좋을 대로 하라며 손사레를 쳤고, 사에코는 šœ이치가 불임에 대한 죄책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그것에 대해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의 침묵은 서로에게 상처만 깊어가게 할 뿐이었고, 결국은 사에코의 정신 이상까지 가져오게 된다.

 

 평소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의견을 나누고 사랑을 말했더라면 그들에게는 분명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수십년을 살아 온 부부처럼, 늘 편안한 그늘을 제공했을 테니까.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된 이유였던 눈물과 고독이, 부부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기 여겼기 때문일까. 혹은 그 고독이 인간에게 언제까지나 따라 붙는 멍에와 같은 것임을 잠시 잊었던 것일까. 언제나 인생의 단면에 드리우는 그것을.

 

 결국 유산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사랑을 되찾는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일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끊임없이 피를 묻히게 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그것이.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를 중얼거려 본다. 'X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느냐?'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다. 서로가 상처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 꼭 상처를 주어 봐야 아느냐, 라고.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지탄받을 대상은 아니리라. 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따끔해지는 것일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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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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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분류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독이 코끼리의 이름인 줄 몰랐던 탓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오래된 도시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표지의 아이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브람이 남자라고 하자 또 놀랄 밖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소설은 동물 조련사가 쓴 글답게 화려한 기교는 없었지만, 그 탓에 더욱 아름다웠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남자 아기 '브람'과 암코끼리 '모독'의 사랑과 우정은 시종일관 코끝이 찡했고, 또 안타까웠던 것이다. 처음부터 남다른 인연에 묶여 있던 둘은 단순히 코끼리와 조련사라는 관계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서커스단의 해체에 의해 동물들이 모두 미국으로 팔려가자, 브람은 미국행 배에 숨어 든다. 아버지의 유언이 모독을 돌보라는 것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 말이 없었더라도 브람은 그 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부모님이나 연인인 게르티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모독이었으니까.

 

 인간의 욕망에 의해 브람과 모독은 이리저리 실려 다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들은 몇 번의 생을 거쳐도 모자랄만한 모험을 겪으며 성장한다. 노스가 브람의 애원을 거절했을 때, 폭풍우에 의해 배가 난파당한 후 죽은 줄 알았던 모독이 살아서 브람의 곁으로 왔을 때, 구조하러 온 배가 작아서 모독이 탈 수 없자 브람이 구조를 거절하고 같이 죽을 것을 결심했을 때, 도적떼의 탐욕에 의해 모독이 끌려가다가 그들을 짓밟고 브람을 찾아 왔을 때,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인들에게 끌려 갔을 때, 전투에 의해 많은 코끼리와 시안이 살해당했을 때, 노스가 결국 그들을 찾아내어 미국으로 끌고 갔을 때, 많은 코끼리들이 어리석은 조련사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셀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쓰라린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기억 때문에 물을 두려워하게 된 모독에게 람스는 이런 말을 한다.

 

- 괜찮아, 모독. 나도 때로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걸. 끔찍한 날들이었어. 우리는 영원히 그때를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그게 다 지난 일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래... 알게 될 거야. (179쪽)

 

 그래, 모든 고통은 단지 지나간 추억으로 남아 곱씹어 보게 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처의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것인가.

 

- 인간은 조율법을 배워야 합니다. 음악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인간이 조물주보다 더 나은 것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듣는 법을 가르치세요. 특히 당신의 적에게 가르치세요. 자연의 교향곡을 들으세요. 장님도 그것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그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천지창조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동시에, 따로 또 같이 듣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연과 신은 하나입니다. (189쪽)

 

 인간은 지나치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조율법을 알지 못한다.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주어도 귀를 틀어 막고, 보여 주어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이다. 마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럼, 보여도 보지 않았기에 장님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 끝도 없는 것일까. 씁쓸한 질문에 대답은 뻔하다.

 

 노스의 계략으로 돈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들이 마침내 재회했을 때 기쁨과 슬픔, 노여움이 동시에 뒤섞여 엉망이었다. 오랜 지기와의 재회가 기뻐서, 브람과 떨어져 지낸 동안 죽어가던 모독이 슬퍼서, 구제불능인 인간들을 처단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노여워서.

 

 저자 랠프 헬퍼와의 만남은, 만감이 교차하던 둘의 재회와 연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 끝에 이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경이로운 존재가 될 거야. 너는 우주로 날아올라 삼라만상의 일부가 되고, 조물주 곁에 앉아서 모든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돕게 될 거야. (383쪽)

 

 모독과 브람의 애정을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일흔 여덟 해 중에서 떨어져 지낸 날도 있었지만, 함께 한 나날이 더 많았던 그들 사이에서 묻어나는 내음 또한.

 

- 나무는 사람과 마찬가지란다. 인간이 나아갈 길에 대해 해답을 주지. 나무는 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자라. 아이들은 나무 꼭대기처럼 젊음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고, 밑에 있는 어른들보다 많이 흔들리지. 아이들은 자연력에 더 영향을 받기 쉽고, 인생의 거친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있는지를 시험당하고 끊임없이 도전당하지. 어느 정도 자라면 아이들은 나무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족을 강화하여, 언젠가는 크고 튼튼한 가지가 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아래쪽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위에서 압박을 받지 않고 노년의 느긋한 평온에 잠기지. 나무 밑동은 언제나 더 뜻하고 안전해. 밑동은 나무 전체의 무게를 견디고 떠받치기 때문에 보호받고 튼튼하지. (55-56쪽)

 

 그들은 정말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만났을까.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무게를 견디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며 더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었을까. 나무가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자연과 사람의 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을 말한다. 모독을 통해 자연을 느꼈던 브람과 그런 브람을 통해 사랑을 느꼈던 모독.

 

 늦은 봄,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옅은 눈물을 머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로 착잡하고 쓰린 마음을 외면하며 껴안았던 소설이 이렇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코끼리 모독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인간으로써 고맙고 또 미안하다. 霖

 

-

 

오타 지적 : 다른쪽 발을만을 사용했다. > 다른 쪽 발만을 사용했다. (370쪽 9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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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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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도치, 도대체 왜 고슴도치가 아닌 가시도치라고 제목을 정한 것일까. 가시도치는 북한어, 고슴도치는 우리 고유어인데, 굳이 가시도치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을까. 고슴도치는 '고솜>고솜돋>고솜돗>고솜도치>고슴도치'로 변한 것인데, 고솜은 가시라는 뜻의 우리말이며, 도치 또한 가시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강조하기 위해서 같은 뜻의 단어를 중첩하여, 가시가 달린 생물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왜 굳이 북한어인 '가시도치'로 하였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각설하고, <가시도치의 회고록>은 가시도치인 '느굼바'가 주인공이다. 키방디라는 주인은 가시도치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가시도치라는 뜻의 '느굼바'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간으로서의 오만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자체에서부터 가시도치가 보여주는 인간의 세계가 부정하고, 오만한 것임이 드러난다.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콩고에서 태어난 알랭 마방쿠는 전체인구의 48%가 민속신앙을 믿는 나라답게, 신비로운 것을 제재로 삼았다. 모든 인간에게는 생사를 같이하는 분신이 있다는 아프리카 민담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가시도치를 그 분신으로 정한 것이다.

 

 책은 가시도치의 주인인 키방디가 죽은 후, 도망쳐 바오밥 나무에 기대어 그 나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자신이 마흔 두 살이라고 소개한 가시도치는, 대답이 없는 바오밥 나무가 그리도 고마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꾸를 해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사뭇 철학적인 이 가시도치가 인간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비애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 인간 같은 면이 점점 더 나의 동물적인 본성을 압도하고 있었거든, 나 자신을 보잘것 없는 놈, 비열한 놈, 가엾은 이기주의자라고 책망하면서, (29쪽)

 

 가시도치는 주인 키방디를 위해,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을 죽인다. 그 전까지는 의심을 사지 않았지만, 마침내 백 명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면 끝장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가시도치는 그 말을 키방디에게 하고 싶었지만, 불복종은 자신의 권리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아빠 키방디처럼, 키방디도 백 명을 채우지 못 하고 죽게 된다. 죽을 때 까지 함께 하는 분신이기에, 분신도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시도치는 죽지 않는다. 그리하야, 주인이 죽어버린 무서운 장소에서 도망친 가시도치는 바오밥 나무에 다다라서 숨을 내몰아 쉬는 것이다. 왜냐하면,

 

- 사실은 말이지, 너에게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는지 나는 확신이 안 서, 설령 그런 내세가 있다손 치더라도 난 알고 싶지도 않아, 더 좋은 삶 따위 꿈꾸고 싶지 않다고, (34쪽)

 

 왜냐하면, 그는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방디를 위해 인간들을 죽였을지언정, 가시도치가 스스로를 위해 누군가를 살해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 또한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을 따라 죽지 않았고, 또 죽은 주인을 내버리고 도망쳤던 것이다.

 

 주인 키방디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원한을 갚기 위해 가시도치를 이용한다. 이것은 인간사에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군가를 이용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 따위는 말이다. 한바탕 웃어줘야 할 사명감이 불타 오를만큼 같잖은 인간, 자신이 최고라 여기는 오만한 인간, 타인을 책망하고 나무라는 인간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정을, 가시도치는 주인이 명령한 살인으로써 낱낱이 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 분명, 가치도치가 그러한 인간들을 조롱하거나 농담거리로 삼을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경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키방디의 해로운 분신으로서, 그 존재 자체가 키방디가 살인을 명령하기를 부추겼던 것 처럼 다른 이들의 부정도 해로운 분신으로 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우선 나는 이 고장의 해로운 분신들과 일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힘든 싸움이 되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몰아내고 싶어, 내 죄를 씻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마을에 닥쳤던 여러 불행한 사건과 그 밖의 일에 대해 나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기도 해, (197쪽)

 

 그리하여 가시도치는 책임을 지기 위해, 해로운 분신과 싸우는 길을 갈 것을 다짐한다. 이것이 가시도치라는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독자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여러 불행과 슬픔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가시도치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나보다 높으신 이의 뜻으로 살아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분이 그리 결정하셨다면 필경 나에게는 이승에서 다해야 할 마지막 임무가 있다는 뜻이잖아 (198쪽)

 

 그래, 나에게도 그럴 의무가 있다.

 

 마침표나 물음표 따위를 없앤 쉼표의 대행진으로 나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고마워, 가시도치.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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