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책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분류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독이 코끼리의 이름인 줄 몰랐던 탓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오래된 도시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표지의 아이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브람이 남자라고 하자 또 놀랄 밖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소설은 동물 조련사가 쓴 글답게 화려한 기교는 없었지만, 그 탓에 더욱 아름다웠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남자 아기 '브람'과 암코끼리 '모독'의 사랑과 우정은 시종일관 코끝이 찡했고, 또 안타까웠던 것이다. 처음부터 남다른 인연에 묶여 있던 둘은 단순히 코끼리와 조련사라는 관계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서커스단의 해체에 의해 동물들이 모두 미국으로 팔려가자, 브람은 미국행 배에 숨어 든다. 아버지의 유언이 모독을 돌보라는 것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 말이 없었더라도 브람은 그 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부모님이나 연인인 게르티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모독이었으니까.

 

 인간의 욕망에 의해 브람과 모독은 이리저리 실려 다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들은 몇 번의 생을 거쳐도 모자랄만한 모험을 겪으며 성장한다. 노스가 브람의 애원을 거절했을 때, 폭풍우에 의해 배가 난파당한 후 죽은 줄 알았던 모독이 살아서 브람의 곁으로 왔을 때, 구조하러 온 배가 작아서 모독이 탈 수 없자 브람이 구조를 거절하고 같이 죽을 것을 결심했을 때, 도적떼의 탐욕에 의해 모독이 끌려가다가 그들을 짓밟고 브람을 찾아 왔을 때,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인들에게 끌려 갔을 때, 전투에 의해 많은 코끼리와 시안이 살해당했을 때, 노스가 결국 그들을 찾아내어 미국으로 끌고 갔을 때, 많은 코끼리들이 어리석은 조련사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셀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쓰라린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기억 때문에 물을 두려워하게 된 모독에게 람스는 이런 말을 한다.

 

- 괜찮아, 모독. 나도 때로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걸. 끔찍한 날들이었어. 우리는 영원히 그때를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그게 다 지난 일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래... 알게 될 거야. (179쪽)

 

 그래, 모든 고통은 단지 지나간 추억으로 남아 곱씹어 보게 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처의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것인가.

 

- 인간은 조율법을 배워야 합니다. 음악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인간이 조물주보다 더 나은 것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듣는 법을 가르치세요. 특히 당신의 적에게 가르치세요. 자연의 교향곡을 들으세요. 장님도 그것을 볼 수 있고, 귀머거리도 그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천지창조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동시에, 따로 또 같이 듣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연과 신은 하나입니다. (189쪽)

 

 인간은 지나치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조율법을 알지 못한다.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주어도 귀를 틀어 막고, 보여 주어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이다. 마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럼, 보여도 보지 않았기에 장님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 끝도 없는 것일까. 씁쓸한 질문에 대답은 뻔하다.

 

 노스의 계략으로 돈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들이 마침내 재회했을 때 기쁨과 슬픔, 노여움이 동시에 뒤섞여 엉망이었다. 오랜 지기와의 재회가 기뻐서, 브람과 떨어져 지낸 동안 죽어가던 모독이 슬퍼서, 구제불능인 인간들을 처단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노여워서.

 

 저자 랠프 헬퍼와의 만남은, 만감이 교차하던 둘의 재회와 연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 끝에 이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경이로운 존재가 될 거야. 너는 우주로 날아올라 삼라만상의 일부가 되고, 조물주 곁에 앉아서 모든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돕게 될 거야. (383쪽)

 

 모독과 브람의 애정을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일흔 여덟 해 중에서 떨어져 지낸 날도 있었지만, 함께 한 나날이 더 많았던 그들 사이에서 묻어나는 내음 또한.

 

- 나무는 사람과 마찬가지란다. 인간이 나아갈 길에 대해 해답을 주지. 나무는 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자라. 아이들은 나무 꼭대기처럼 젊음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고, 밑에 있는 어른들보다 많이 흔들리지. 아이들은 자연력에 더 영향을 받기 쉽고, 인생의 거친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있는지를 시험당하고 끊임없이 도전당하지. 어느 정도 자라면 아이들은 나무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족을 강화하여, 언젠가는 크고 튼튼한 가지가 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아래쪽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위에서 압박을 받지 않고 노년의 느긋한 평온에 잠기지. 나무 밑동은 언제나 더 뜻하고 안전해. 밑동은 나무 전체의 무게를 견디고 떠받치기 때문에 보호받고 튼튼하지. (55-56쪽)

 

 그들은 정말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만났을까.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무게를 견디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며 더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었을까. 나무가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자연과 사람의 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을 말한다. 모독을 통해 자연을 느꼈던 브람과 그런 브람을 통해 사랑을 느꼈던 모독.

 

 늦은 봄,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옅은 눈물을 머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로 착잡하고 쓰린 마음을 외면하며 껴안았던 소설이 이렇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코끼리 모독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인간으로써 고맙고 또 미안하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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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지적 : 다른쪽 발을만을 사용했다. > 다른 쪽 발만을 사용했다. (370쪽 9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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