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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기념일
타와라 마치 지음, 신현정 옮김 / 새움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타와라 마치가 스물에서 스무넷 사이의 사 년 동안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라 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모두 기록한 듯한 이 시들 사이에서 그의 사랑법을 본다. 사랑할 때에는 조그만 것도 아끼고 기념하고 싶은 그의 마음, 끝낼 때에는 씁쓸하게 녹아버린 샐러드를 씹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안녕, 하고 인사하고 싶은 그의 마음.
- 「이 맛 좋은데」 네가 말한 7월 6일은 / 샐러드 기념일 (「샐러드 기념일」 144쪽)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들을 모조리 기념일로 만들어 버린다면, 언제나 행복한 날이겠지. 그가 샐러드 기념일을 말한 그 날은 매번 샐러드를 먹이고 싶을 테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샐러드 기념일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별 시덥잖은 사랑놀음이겠지, 라는 생각에 책을 펼쳤을 때 놀랐다. 하이쿠인가, 라는 생각도 잠시뿐. 검색 끝에 와카(和歌)라는 것을 알아낸다. 일본 전통시의 5.7.5 리듬의 하이쿠에 7.7음이 덧붙여진 것이 와카란다. 한국어로 변역해서야 이 형태를 알 수 없잖은가, 라는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여백도 많은데 그 자리에 원문을 실어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 끝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인상을 쓰며 후다닥 종잇장을 넘긴다. 몇 장을 더 넘긴 후, 순간 먹먹해진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뚫어져라 글자를 바라 봤다.
- 에노시마에서의 하루 / 서로 다른 미래가 있다면 사진은 찍지 말자. (「야구게임」 40쪽)
이별 후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보면, 씁쓸해진다. 짧은 두 구절로 인해 이리도 초라해질 줄이야. 그래, 난 이제 헤어짐이 짐작되는 사람과 같이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어느새 잊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오를 때, 문득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진 속의 대화들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얇은 종잇장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서럽다.
- 나를 버리고 갈 사람이 / 내 사진을 열심히 찍는 석양녘 (「사람 기다리기」 123쪽)
시간이 지나면 추억은 언제나 옅은 분홍빛이다. 새파랗던 하늘도 바다도 초록빛 녹음과 강가도 모두 옅은 분홍빛이다. 하지만 사진은 언제나 그 시간 속의 선명한 색깔을 되돌려 놓는다. 그런다고 해서 더이상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진첩을 들쳐 볼 때면, 그것이 모지게도 쓴웃음을 삼키게 한다. 그래서 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지나간 사진을 늘 들춰보지 않는다. 그 순간의 감정이 유지될 때까지만 사진은 내 눈 속에서도 늘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일 뿐, 그 뿐이다.
- 「먹고 싶지만 날씬해지고 싶다」라는 카피가 있다 /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하기는 싫다 (「바람이 된다」 77쪽)
꼭 연인이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야 늘 결핍되어 있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부담일테지만, 사랑하기는 싫어질 때가 있다. 그것이 귀찮아 질 때가 있다. 더이상이 감정 소모는 사양하고 싶어질 정도로 지치고 부담스러운 감정이 바로 그것이기에.
타와라 마치는 유쾌하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기억 언저리에 남겨두고 한 두번 곱씹어 볼 뿐 영원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세대의 특징이고 상처의 증거이리라. 그래서 도쿄에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 어머니의 말은 따끔하다.
- 연애는 하지 말라신다 / 혼수품의 하나인가 나의 노래는 (「좌우대칭의 나」 157쪽)
- 다정함을 잘 표현 못하는 것 / 허락받은 일인지 모른다 아버지 세대는 (「아침 넥타이」 60쪽)
어머니에게는 그의 노래가 혼수품의 하나로 취급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실토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서툴고 모자란 표현을 애틋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언제나 일상 속에서 늘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절실히 느낄 때의 감정은 언제나 눈물겹다. 서로의 감정을 솔직히 나누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고, 때때로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내 머리를 세 번 자른 미용사에게서 / 「처음이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앉는다 (「좌우대칭의 나」 154쪽)
유난히 향수병이 심하다는 타와라 마치는 그래도 도쿄에서 독신 생활을 한다. 늘 가는 미용실에서 처음이냐는 질문을 받아도 그 곳의 공허함이 오히려 그의 쓰라림을 치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회색빛 건물들이 답답하고 쭉 뻗은 도로가 짜증스럽다고도 하지만, 내게는 그 어느 곳이나 똑같다. 시골에서의 달큼함도 도시의 시금털털함도 모두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타와라 마치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어느샌가 한 구석에 쌓아둔 감수성을 찌르는 의표가 있다. 유쾌발랄하게 떠들어대다가도 의뭉스레 얄궂은 미소를 짓는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가 스스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자신을 사랑한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사랑이 그의 사랑과 같지는 않다. 이기와 치기가 섞인 내 사랑을 그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내 삶의 일부이고, 사랑의 과정이며, 성장의 통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상큼한 상큼한 과일 샐러드가 먹고 싶다. 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