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개미지옥 - 2007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문학수첩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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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스틱과 개미지옥이라는, 서로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두 단어가 만났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중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판타스틱 개미지옥>이다. 이 작품이 제 5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했다며 시커면 휘장을 두르고 나타났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생소한 작가의 이름 탓이리라. 하지만 생각보다 가독성이 좋아, 막힘 없이 술술 읽어 나갔다는 점에서부터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그 막힘 없음이 지나치게 특색없는 무난함이라는 점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듯 하다.


 


 제목에서 지칭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백화점이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통용되는 공간, 그 곳을 바로 <판타스틱 개미지옥>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작품 속의 배경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공간적으로는 백화점, 시간적으로는 세일 기간이다. 바로 이 짧은, 혹은 길다면 긴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로 다양하다. 세일때나 잠깐 일하다가 장기 알바로 전환하게 된 소영이나 판매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샵 마스터, 이름도 모르지만 백화점 안에서만은 단짝마냥 친하게 지내던 옆 코너의 알바, 다이어트로 쌓인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어 버리는 지영 등의 백화점 종사자들과 백화점 앞에 서서 개점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아줌마 군단들, 주말마다 백화점에서 눈요기를 하며 여기저기 클레임을 거는 현주, 매번 비싼 브랜드 화장품을 사가는 남자와 백화점 앞 상점에서 성매매를 알선하는 노인 등 백화점 고객들이 바로 주인공이다.


 


 백화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제시하며, 그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아닌 듯한 시점으로, 마치 카메라 렌즈를 클로즈업 했다가 아웃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시선들이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제시하기에는 손색없는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허나 동시에 특색없는 구성이 되기 쉬워지도록 만든다. 그 탓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초점으로 맞추기 쉽고, 각 인물들의 에피소드 사이에 긴밀성이 부족해진다. 좀 더 깊숙한 곳을 조명하려다 보면, 어느새 카메라 렌즈는 다른 인물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는 다큐멘터리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주는 장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이런 겉핥는 시선으로 인해 이 작품의 주제와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문득 K가 생각난다. 휴학을 하고 백화점 의류매장에서 직원 노릇을 하고 있는 친구인데, 여간 힘들어 하는 게 아니다. 휴학을 하고 나서 자주 보지 못하게 되자, 소홀해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버린 것이다. K도 <판타스틱 개미지옥>의 윤경처럼 그런 마음일까, 싶은 씁쓸함 의문이 생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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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형이상학 정초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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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순수실천이성 비판'이 아니라 <윤리형이상학 정초>라고 정해진 데에는 간단한 이유가 숨어 있다. 칸트가 장차 '윤리 형이상학'을 저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정초를 먼저 출간함으로써, 이것의 기초를 놓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이유 중 한가지, 묘한 점은 독자의 혼란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원리라는 것은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의 통일이 공동의 원리에 의한 것인지를 먼저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동일한 이성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식의 고찰을 끌어 들여야 하기 때문에 독자의 혼란을 야기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칸트의 주장을 명백히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여긴 탓이다. 어쨌든 이 제목에는 그런 묘한 비밀이 숨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 사이에 공동의 원리란 것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공동의 원리가 있어야만 칸트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는 '선의지'의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이후 여러 명령들 중에서 정언 명령만이 도덕법칙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정언 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인 자유와 정언 명령이 가능한 근거를 통해, 이 책의 본질인 '실천 이성 비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선의지란 보통 사람들이 모두 갖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생기는 과정이나 성취한 것으로써 선한 것이 아니라, 선의지 그 자체가 선하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이 선의지라는 것이 어떤 호의적인 경향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인간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선의지는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이 모든 인간에 내재해 있는 선한 본성이라는 점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선의지를 통해, 모든 명령 중 최상위 명령이며 도덕 법칙인 정언 명령만이 도덕법칙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언명령이란 수단과 목적 없이 명령 그 자체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보편적 입법 원칙에 타당한 준칙이어야만 한다. 또한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만 하며, 자신의 행위가 인간성과 조화해야 한다. 이런 개념은 매우 생산적인 개념으로써 '목적의 나라'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자는 이 '목적의 나라'에서 입법적 성원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 네가지 원칙이 바로 정언 명령의 4원칙이다. 이같은 정언 명령은 목적과 수단이 있는 가언 명령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며, 존재 그 자체로써 도덕법칙일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 윤리성의 이성적 근거들, 또 완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이 과연 타당한가. 칸트는 우리 스스로 그 완전성을 직관할 수 없고, 어떤 정언 명령이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에 이 준칙을 제한하는 명령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이 준칙이 강제적인 것이라기보다 다만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자신의 의지일 수 있고, 그러므로 이 의지가 실천적 의도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게 된다.

 

 무엇으로부터 도덕 법칙은 구속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도 당연히 부각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정언 명령이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에 이 준칙을 제한하는 명령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준칙의 구속력은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또한 어떤 이유로 구속력을 갖는 것인가. 이것은 도덕 법칙보다는 오히려 사회 법률에 더욱 가까운 개념이다. 칸트 또한 고백하듯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순환론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목적들의 질서 안에서 윤리 법칙들 아래에 생각하기 위해, 우리 이 질서 안에서 자유롭다고 상정하며, 또 스스로의 의지에 자유를 부가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유와 의지의 자기 법칙수립은 둘 다 자율이고, 교환적인 개념들이다. 또한 이런 개념을 세세히 분류하기 위해 아무리 주위를 기울이더라도 그것은 한낱 현상들의 인식에 이를 뿐, 결코 사물들 그 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감성세계와 오성세계, 둘 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속해 있는 것과 같은 결과를 제시할 수 있는 근거밖에 마련하지 못한다. 또 이 두 세계 사이에서 함의되어 있는 자유 의지로써 정언 명령이 실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순환적 논리를 주장한다.

 

 허나 정언 명령이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자유 의지는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좀 더 고민해 볼 문제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율적인 정신에서 나오는 것인데, 정언 명령이 그 자유 의지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며, 이 자유 의지에 의해 지켜지는 도덕 법칙이라 볼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 정언 명령의 틀에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전제 자체의 오류가 아닌가. 또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진정 자유인가. 그저 자유라고 느낄 수 있도록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아닌가. 이 책 한 권으로는 그 모든 문제점에 대해 또 다른 대답을 하지 못 한다. 칸트 또한 이 모순을 벗어 나기는 불가능하며, 그래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변 철학의 과제로 남는다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자.

 

 어쨌든 이성이 무조건적인 실천 법칙의 절대적 필연성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정언 명령이 칸트의 말처럼 최상의 법칙은 아닐 수도 있다. 그 탓에 실질적으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직관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조급한 궁금증이 든다. 이러한 궁금증은 앞으로 서서히 해소될 것이라고 믿으며, 칸트의 고뇌를 들여다 보련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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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우주에 마법을 걸다 - 현실에 대한 통합적 비전의 등장
에르빈 라슬로 지음, 변경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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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개인의 해석에 따른 여지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과학과 영성의 긴밀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과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요소, 즉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놀랍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상에 대한 연구 결과 또한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다. 그 탓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이다. 특히 책에서 보여주는 실험결과들, 즉 전생을 체험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여러 노력들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광신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도록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긴밀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긴밀성, 즉 상호연관성은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과 비슷하다. 이 세계, 혹은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모든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제법 일반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스스로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 모든 인간들과 생물, 자연 체계 등의 시스템을 하나로 모아 구축한 것이 바로 지구이며, 이 비슷한 시스템들이 모여 구축하게 되는 것이 또 우주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꾸로 보자면, 스스로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는 '전체로서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일견 확실한 일체감과 소속감을 통해 우리 스스로인 우주를 통해 세계의 근본에 대해서도 체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까지 치닫는다. 그것은 곧 우리 영혼이 우주라는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어떤 곳에서든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간혹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 즉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체험이 가능하며, 이러한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주의 기억, 즉 우주가 체험한 것들을 모두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르빈 라슬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이며, 전일적인 우주에 통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주술사와 샤먼, 구도자와 현자, 그리고 용기를 내어 멀리 내다보고 자신이 본 것에 열린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므로 놀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에르빈 라슬로는 우리가 죽고 나면, 이러한 생각 혹은 가설, 주장에 대해 더욱 더 강한 확신을 품은 채 우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런 견고한 믿음은, 앞서 말했듯이 지나친 미신과 광신의 결정체로 보일 염려가 있다.  쌍둥이 통증 공유(twin-pain)나 임사체험,  전생체험 등을 통한 증명은 더욱 더 믿기 어렵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내가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등은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같은 불가지론자가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해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류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더군다나 과학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또한 현대에 들어 영적 차원에 대한 탐구는 점점 미약해져만 가는데, 간혹 명을 잇고 있는 이들은 더욱 더 광신적인 상황으로 치닫기를 이끌려 하기 때문에 더욱 더 믿기 어렵게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될만 하다.

 

 아마 이러한 간극에서 오는 딜레마는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가능성의 여지까지 짓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코페르니쿠스가 목숨을 걸고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때야 비로소 태양이 멈추고 지구가 돌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태양은 계속 멈춰 있었지만, 우리 믿음 속의 태양은 그때서야, 그것도 깨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멈춰 있지 않았나. 다시 말해, 비록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이 아직 정설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수가 주장하는 의견을 정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옳기 때문은 아닌 탓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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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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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 시인'이라 불리우는 김남주. 그를 잘 모르더라도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이라고 하면, 아마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리라 생각된다. 80년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서 저항을 하던 그를 기억하기에는 내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그의 정신은 가히 짐작이 된다.

 

 그는 스스로를 시인이나 글쟁이라 부르기보다 '전사'라고 불렀다 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에서 풍겨오는 혁명의 냄새, 자유를 향한 부르짖음,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등은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나타난다. 즉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또한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계몽적이다. 물론 그것은 당대 현실속에서 살아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무자비한 남발은 낭패의 여지가 있다. 시로서의 매력이 반감하기 때문이다.

 

 정제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교과서적 대답을 하자면, 시어의 정제는 단어가 본래 가진 단어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며, 비유의 치밀성, 감정의 절제 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시집에서 그러한 시어의 정제미가 없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 국민적 시인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몇가지를 추려 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시집의 제목이자 연작시의 제목이기도 한 '학살, 광주, 젖가슴, 옥좌, 해방, 자유, 투쟁, 정치, 빨갱이, 미국, 대통령' 등, 한 치도 겉돌지 않고 직선적이다. 또한 감정의 절제 없이 분노와 억울함을 극대화한 표현이 가득하다. 지나치게 거침없다는 것이다.

 

대검이 와서

그의 가슴을 찌르자 뒤에서는

개머리판이 와서 그의 뒤통수를 깠어요

으윽- 한낮의 신음소리와 함께

그가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군화발이 와서 그의 턱을 걷어찼어요

피를 토하며 거리에

푸르고 푸른 하늘에 오월에

붉은 피를 토하며 벌렁 그가 대지에 나자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제 군용 트럭이 와서 그를 실어 갔어요

 

                                                      <학살 5> 전문

 

 위의 시는 연작시 <학살>중 마지막 편인 다섯번째 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직설적인 해설은 이 시의 한계이자 묘미이다. 산문이라 해도 손색없을만큼 시어의 정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광주 학살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한 이의 울림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에서도 '두부처럼 으깨진 처녀의 젖가슴'이라거나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이라거나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 등의 표현은 참으로 잔인한 표현이지만, 동시에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모순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인 또한 드물다. 서정주나 김동환, 박영희, 이상화 등 훌륭한 문장을 자랑하면서도 친일의 오명을 벗지 못하는 시인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의 비극에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를 높이 받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시인들은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나의 경우, 특히 서정주의 친일 행위에도 <자화상>이나 <귀촉도> 등의 작품으로 그를 대표 시인으로 꼽는데 주저치 않기 때문이다. 애국심 또한 물론 중요하지만, 문장과 표현, 사색도 시인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어쨌든 이러저러한 많은 시인들 가운데, 김남주의 위상은 가히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시대의 고통과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처절한 현실을 노래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용기와 애국심,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는 그러한 격정이 한 치의 낭비없이 표현된다. 비록 그것이 문학성에 있어 한계를 나타내더라도 그의 열정만은 높이 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어두움만 토로하고, 미래의 희망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자유와 혁명의 순결을 노래하는 전사시인, 김남주의 격렬한 외침만은 와닿기에 그의 소중함을 느낀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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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 봐도 <학살>이 없어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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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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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 바라보며>는 특별난 이야기가 아니다. 진 서전트라는 여성의 일대기를 주욱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닥 놀라운 반전이나 특별하고 멋진 장면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서도 볼만한 것이 바로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큰 긴박감 없이도 소소한 재미들로 행복함을 주는 힘이 있어, 전체적으로 좋은 느낌을 간직하게 한다.

 

 이 소설은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패배자 내지는 실패자로 낙인 찍힌 레슬리 아저씨와 보낸 즐거운 유년을 그리고 있다. 레슬리 아저씨가 자신을 속여도 그를 탓하기 보다 자신을 속게 한 대상을 탓하는 천진난만함이 한껏 묻어 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따르던 레슬리 아저씨는 3부에서 아들인 그레고리에게도 똑같은 즐거움, 즉 재미있는 놀이나 신기한 마술을 선사하지만, 이미 커버린 진은 변함없는 레슬리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색을 즐기는 진은 그제서야 섬뜩함을 느낀다. 독자조차 놀랄 정도인 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 스스로 깨달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것은 자신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어느 순간 같은 감정을 선사하지 못할 때, 어찌나 놀랐겠는가. 하물며 모두가 레슬리를 비난할 때도 그를 따랐던 진이 그를 비난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중적인 나를 발견할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감정이지만, 언제나 진지한 사색을 하는 진에게는 더욱 큰 고통이였으리라.

 

 2부에서는 진의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만났던  썬업 프로서와는 전혀 다른 류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는 점이 참 아쉬웠다. 잠깐의 시간 동안 태양이 두 번 떠오르는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썬업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던 프로서는 그의 집에서 묶던 군인이었는데, 조종사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워낙 변덕적인 성격과 태양을 향해 날아 오를 때의 행복감에 취해 미쳐가던 사람이기도 했다. 프로서는 진이 경찰인 마이클과 결혼한다고 하였을 때, 그가 좋은 남편감이라고 늘 칭찬하면서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은 프로서의 말을 믿었고, 그런 믿음이 어느 정도 작용하여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불행한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도망자의 인생을 살아 간다.

 

 진이 유년 시절 믿었던 레슬리 아저씨와 썬업 프로서는 그에게 있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둘 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또한 그렇지만, 진이 모르던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서가 <태양을 바라보며> 겪었던 기적은 진에게 평생 동안 동경의 대상이 된다. 3부에서 아흔아홉살의 진이 예순살의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썬업 프로서가 본 기적을 직접 체험하며 이 책은 막을 내린다.

 

 태양을 응시하지 않고도 하루 아침에 태양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던 작은 기적을 평생 동경하던 진이 생의 마지막에 그것을 바라보며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2부에서 썬업 프로서는 항상 그런 말을 하곤 했다. 행복한 죽음은 부족해져 가는 산소 속에서 나른한 행복을 느끼며, 태양을 두 번 바라 보면서 죽는 것이라고. 실제로 프로서는 그렇게 죽었고, 진이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곧 그도 태양의 기적을 체험한다.

 

 3부에서 한가지 독특한 소재는 GPC, 즉 다목적 컴퓨터인데 인간의 모든 지식을 수록한 절대적인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것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은 TAT라는 좀 더 특수한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레고리가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을 때면 늘 '현실적인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한편 그 반대쪽 모니터에서는 질문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제한적인 답만 가르쳐 주는 억제 시스템인 셈이다. 이 두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본인 인증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갑작스레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가 생각났다. '사랑'같은 단어는 부적절한 것이므로 사용해서도 질문해서도 안 된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한 척 해야 했던 조너스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레고리 또한 결국 답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프로그램이 답한 것들에 이해한다는 말을 던지고 나와 버린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이처럼 소소하고도 엄청난 소재를 가지고 묘한 배합을 만들어 냈다. 물론 태양을 바라 보는 것 따위의 소탈한 기적에 목 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래 삶은 그런 소소한 일상들로 이루어져 전체의 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그 나날 중 괴롭고 슬픈 추억이 있더라도 그것은 적당한 페이소스다. 운명의 희생자가 되는 것보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되뇌이는 진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와닿는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고아한 할머니가 된 진,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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