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태양을 바라보며>는 특별난 이야기가 아니다. 진 서전트라는 여성의 일대기를 주욱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닥 놀라운 반전이나 특별하고 멋진 장면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서도 볼만한 것이 바로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큰 긴박감 없이도 소소한 재미들로 행복함을 주는 힘이 있어, 전체적으로 좋은 느낌을 간직하게 한다.

 

 이 소설은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패배자 내지는 실패자로 낙인 찍힌 레슬리 아저씨와 보낸 즐거운 유년을 그리고 있다. 레슬리 아저씨가 자신을 속여도 그를 탓하기 보다 자신을 속게 한 대상을 탓하는 천진난만함이 한껏 묻어 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따르던 레슬리 아저씨는 3부에서 아들인 그레고리에게도 똑같은 즐거움, 즉 재미있는 놀이나 신기한 마술을 선사하지만, 이미 커버린 진은 변함없는 레슬리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색을 즐기는 진은 그제서야 섬뜩함을 느낀다. 독자조차 놀랄 정도인 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 스스로 깨달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것은 자신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어느 순간 같은 감정을 선사하지 못할 때, 어찌나 놀랐겠는가. 하물며 모두가 레슬리를 비난할 때도 그를 따랐던 진이 그를 비난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중적인 나를 발견할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감정이지만, 언제나 진지한 사색을 하는 진에게는 더욱 큰 고통이였으리라.

 

 2부에서는 진의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만났던  썬업 프로서와는 전혀 다른 류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는 점이 참 아쉬웠다. 잠깐의 시간 동안 태양이 두 번 떠오르는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썬업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던 프로서는 그의 집에서 묶던 군인이었는데, 조종사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워낙 변덕적인 성격과 태양을 향해 날아 오를 때의 행복감에 취해 미쳐가던 사람이기도 했다. 프로서는 진이 경찰인 마이클과 결혼한다고 하였을 때, 그가 좋은 남편감이라고 늘 칭찬하면서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은 프로서의 말을 믿었고, 그런 믿음이 어느 정도 작용하여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불행한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도망자의 인생을 살아 간다.

 

 진이 유년 시절 믿었던 레슬리 아저씨와 썬업 프로서는 그에게 있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둘 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또한 그렇지만, 진이 모르던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서가 <태양을 바라보며> 겪었던 기적은 진에게 평생 동안 동경의 대상이 된다. 3부에서 아흔아홉살의 진이 예순살의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썬업 프로서가 본 기적을 직접 체험하며 이 책은 막을 내린다.

 

 태양을 응시하지 않고도 하루 아침에 태양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던 작은 기적을 평생 동경하던 진이 생의 마지막에 그것을 바라보며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2부에서 썬업 프로서는 항상 그런 말을 하곤 했다. 행복한 죽음은 부족해져 가는 산소 속에서 나른한 행복을 느끼며, 태양을 두 번 바라 보면서 죽는 것이라고. 실제로 프로서는 그렇게 죽었고, 진이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곧 그도 태양의 기적을 체험한다.

 

 3부에서 한가지 독특한 소재는 GPC, 즉 다목적 컴퓨터인데 인간의 모든 지식을 수록한 절대적인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것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은 TAT라는 좀 더 특수한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레고리가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을 때면 늘 '현실적인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한편 그 반대쪽 모니터에서는 질문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제한적인 답만 가르쳐 주는 억제 시스템인 셈이다. 이 두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본인 인증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갑작스레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가 생각났다. '사랑'같은 단어는 부적절한 것이므로 사용해서도 질문해서도 안 된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한 척 해야 했던 조너스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레고리 또한 결국 답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프로그램이 답한 것들에 이해한다는 말을 던지고 나와 버린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이처럼 소소하고도 엄청난 소재를 가지고 묘한 배합을 만들어 냈다. 물론 태양을 바라 보는 것 따위의 소탈한 기적에 목 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래 삶은 그런 소소한 일상들로 이루어져 전체의 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그 나날 중 괴롭고 슬픈 추억이 있더라도 그것은 적당한 페이소스다. 운명의 희생자가 되는 것보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되뇌이는 진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와닿는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고아한 할머니가 된 진,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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