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령 -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이순원 외 지음 / 현대문학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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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달 전에 읽었던 책의 감상을 이제서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게 영 찜찜하기만 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 왔던 것을 이제라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들겨 보건만, 횡설수설할 것이라는 예감은 벗어나지 못할 듯 하다. 즉 내 찜찜함은 책이 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과 표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무작정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 이럴 때는 답답하기만 하다. 내내 읽어 내린 모든 것들이 한 데 뒤섞여, 사실과는 다른 기억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허나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아련하고도 은은하게 남아 있다. 수상작인 <은비령>과 자선작 1편을 비롯하여 수상후보작 7편, 역대수상작가 최근작 2편으로 이루어진 <1997 현대문학 수상소설집>은 그렇게 한 편으로는 기분 좋은, 그리고 한 편으로는 서늘한 감정으로 내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단편들 가운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사실 수상작인 <은비령>도 그렇다고 수상후보작이나 김문수나 박완서의 최근작도 아니었다.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였다. 수상작가인 이순원의 자선작이다.

 

- 그런데도 나는 여기 있는 것은 물이든 뭐든 다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물 따라 바다까지 내 발로 걸어가봤는데도. ……난 대관령 이쪽 사람들은 어디서 죽든 혼이 다 거기로 가 모여 있을 거 같은데. 산에 묻어도 비에 씻기고 물에 씻기고 해서. (131~132쪽)

 

 친구 영해의 기이한 죽음과 그의 기일에 만난 이상한 여인. 죽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가겠다던 20여년 전의 친구의 죽음을, 1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며 겪는 묘한 이야기이다. <은비령>에 비해 길이도 짧고 단순한 구조와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가장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은비령>의 바람꽃이나 죽은 친구의 아내, 산, 바람, 별, 천체, 2,500년을 둔 윤회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왜 이리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가 깊이 와닿아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 그 호수를 믿고 싶은 것일까.

 

  그 외에 김병언의 <금색 크레용>이나 이윤기의 <뱃놀이>, 박완서의 <참을 수 없는 비밀> 등도 읽을만 하다. 다만 이 10년 전의 단편들에게선 하나같이 씁쓸하기도 하고 비릿하기도 한 입맛이 감돈다. 수면 아래로 침체되어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사놓은 2007 현대문학상과는 어떻게 다를지, 10년 동안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2007년 12월 31일 사형된 23명의 이름 모를 죄수들이 떠오른다.  사형 판결이 난 죄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 행해지지 않은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2007년의 마지막 날까지 단 1명의 죄수도 사형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실제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된다고 한다. UN에서 지정하기로, 사형이 실행되지 않은 기간이 10년인 지나면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다. 10년이라는 적잖은 시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 단편 문학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 운동의 여운이 남아 있던, 전경린의 <고통> 속에 담긴 그런 마음이 세상 이곳 저곳에서 맴돌았던…….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교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쪽수를 차지하던 운동에 관한 기사가 10년 사이 점점 줄어, 이제는 단 한 건도 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한다.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사형을 실행했다던 기억이 아직 우리에게 있지만, 그런 기억들 때문에 우리가 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사회가 원했던 강하고 폭력적인 무언가가 이제는 유순하고 싱싱한 무언가로 변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무언가로 변해간다. 책 속에 담긴 대부분의 문장들은 현대에 막 발표되어서도 통할 만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 시대 속에 생동하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기에 이 책의 의미는 그대로일 테다. 시대의 흐름에 나 또한 몸을 맡긴 채 변해가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도.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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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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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이라, 제목부터 기묘하다. 시쳇말로 썩소를 날리고 있는 여성이 그려진 표지에서부터 따라 해야할 것 같은 느낌에 피식거리게 된다. 다소 황당무계한 소재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입가에 담뿍 물게 만든다. 센세이셔널리즘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3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윤리적인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상냥한 미소를 가장한 채,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취하는 이들에 대한 일갈을 날리는 것이다.
 

 나는 센세이셔널리즘을 싫어한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멸한다고 보아야 겠다. 황금만능주의에 휩싸인 채, 대중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경멸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비난하기보다는 다소 비켜서서 블랙유머를 전파한다. 진한 교훈이나 내세워 자랑하고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감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내려다 보는 것이 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더불어 마냥 유쾌한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묘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가상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비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어쩌면 그렇게 비틀린 심사를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뒤 겪게 되는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흑소소설>은 하나하나의 단편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개별적으로 보기에는 무리인 것들도 있다. <최종심사>나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은 기본적인 등장인물들이 비슷하다. 책 전체 목차에서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그 사이에 등장하는 단편들은 이것들 속에 등장하는 단편들이 아닐까, 하는 망상도 들게 한다. 반전의 묘미는 크지 않지만, 이런 소소한 궁금증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일본 작가라고는 하나,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읽는 나로서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서, 이 작품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이 작품 자체만으로써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팬이 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전체적인 평가를 해보자면, 쉬이 여길 성질의 작품은 아닐 듯 하다. <흑소소설> 한 권만으로 따져 보면 박민규나 성석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으나, 박민규보다는 구성력이 뛰어나고 덜 황당하며, 성석제보다는 가독성이 좋고 덜 산만한 점이 마음에 든다. 약간의 텁텁함과 비릿함이 입안을 감돌지만, 이 책 한 권으로 깨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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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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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하면 <북학의>, <북학의>라 하면 기껏해야 수레 따위나 떠올리던 내가 실은 <북학의>를 직접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에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이라는 부제에 마음이 가지 않을리가 없었다. 박제가가 채제공을 따라 중국을 갔다 와서 썼다는 <북학의>의 내편과 외편, 훗날 상소문으로 지은 <진북학의>를 한 책자에 엮어 만든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시대에서 볼 때에 참 놀랍다. 이를테면, 바퀴 하나 만들 기술이 없고, 제대로 된 통역관 하나 없었으며, 비가 새는 배, 먹으면 오히려 병이 걸릴까 겁나는 약재 등 현대에 비하면 미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명의 발달이 더뎠던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문명이,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리 더딘가. 박제가처럼 시대를 아파한 선비라면, 그것을 고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왜 우리가 시대를 앞서 나가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고뇌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개량할 것을 주장했던 것들은 실로 물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의미가 숨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진실로 걱정한 것은 바로 놀고 먹는 양반들이다. 탁상공론은 커녕 탁상에 잘 앉지 조차 않는 사대부들이 날로 늘어가는 데에 비례해, 백성들의 삶이 그만큼 더 곤궁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세를 지향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 들지 않는 그들은 헛된 말만 늘어 놓으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다. 조선은 사대부들에게 그것을 허락했고, 그렇기에 그들은 더 나은 것을 보고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풍속 자체를 비판할 줄도 모른다. 이미 풍요로운 자신의 지위를 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박제가는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배워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일 것을 주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박제가의 주장을 어느 누가 환영하겠는가. 그가 살아 있는 내내, 늘 개혁을 주장했으나 결국 받아 들여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랑캐의 나라라 비난할 줄만 알았지, 그들의 문명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박제가로서는 얼마나 답답하게 느껴졌을지 짐작이 간다. 책에서는 그러한 느낌 또한 고스란히 담아져 있다. 더불어 옛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고자 한다면, 20년 동안 중국을 힘써 배운 후에 그 일을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라며 원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 다만 책에서 안타까웠던 부분은 조선에 대한 자존감을 찾아 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중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라 할지라도 보고 배울 것이 있어 스스로에게 이롭다면, 불치하문하여야 할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라고 말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장을 넘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 아닌지 염려스러운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미국이나 일본 등 강국의 문화에 깊이 세뇌되어 '자신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우며, 그들의 나라에 가서 살겠다'고 말하곤 하는 몇몇 나어린 세대들에게 한숨이 나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이 중에서도 그런 이가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어찌나 한숨이 나던지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어쨌거나 박제가는 기본적으로 백성들을 사랑했고, 또 그들이 잘 살아야만 부국강병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두리뭉실하게 얽어 말하지 않고, 직접적인 실천법을 말하고 있기에 그것이 더욱 신빙성 있다. 비록 그의 상소가 소용이 없었다고는 하나, 또 마냥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이용후생의 중상학파를 대표한다 할만한 그의 주장은 아무쪼록 발전의 원동력을 마련해 주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문물이든 일본의 문물이든 어느 나라의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아니,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막상 실천하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던 박제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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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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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는 발테르라는 인간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불, 땅, 바람이라는 세가지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불은 청소년기, 땅은 청년기, 바람은 장년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보면 줄리안 반즈의 <태양을 바라보며>가 떠오르고, 발테르의 냉소적인 태도를 보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지만, 앞에서 말한 작품들과는 다르게 텁텁함이 느껴진다. 그 텁텁함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면서 느낀 것과 약간 비슷한 감이 있다. 시원한 물 한 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갈증 말이다.

 

- 인간 삶의 무시무시하고 절대적인 고독과 정면으로 부딪치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독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몸부림을 친다. 표면에 떠오르는 시체를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캐스터네츠나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춘다. 표면에 떠오른 시체들이 모두 절망적으로 절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독하다고 우리는 움직이는 먼지일 뿐이라고……. (105쪽)

 

 불의 장에서 발테르는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라고 느끼는 소년이었다. 특히 아버지와 관계 속에서 큰 반감을 느끼는데, 그로 인해 가출을 감행하고, 또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발테르는 그 곳에서 안드레아를 만난다. 안드레아는 그가 일생에서 가장 고뇌하게 될 문제점을 이미 고뇌하고 지적했던 소년이었다. 더군다나 안드레아는 자신과 발테르가 슈퍼맨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신과 발테르를 격상시키려는 소년이다. 둘은 사춘기의 정점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교감한다.

 

 소년 시절부터 죽음을 생각하던 발테르는 땅의 장에서 더 깊은 인생의 추락을 느끼며, 좌절한다. 인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오점과 악(惡)한 인간 군상들에 대해 낱낱이 들추는 것이다. 발테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속고, 자신을 숨기고 변화하면서 속세에 찌들어 간다. 자신을 망가뜨릴수록 더 깊은 슬픔과 자기연민 속에 모든 것을 내팽겨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의 입원 소식과 함께 바람의 장이 열린다. 자신 또한 죽음을 결심하고 있던 그는 평생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 아버지가 아기가 되버린 모습에 증오도, 경멸도 수그러 들고 만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경멸한 것이 오히려 스스로가 아니었는지, 혹은 세상이 아니었는지 하는 반문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처자식 또한 사랑할 수 있을리는 없을 터이다.

 

 발테르는 그때서야, 그토록 닮기 싫어했던 아버지를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발테르 또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몰랐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베풀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리 없지 않은가. 자신의 생을 한없이 끝으로 누르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발테르는 자신도 모르게 통곡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것은 유일한 친구였던 안드레아나 안드레아의 마지막을 함께 한 이레네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발테르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라고 생각했던 이들일까. 아니면 발테르에게 사죄를 구하기 위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 자신만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안쓰러움일까.

 

 발테르의 성장기를 통한 사색은 이처럼 계몽적인 우화와 같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수산나 타마로는 내내 간접적으로 그것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장에서 이레네 수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가슴을 짖누르는 그 텁텁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는다. 더불어 신이 아닌 인간이 거만한 지성을 가지게 될 때, 얼마나 괴로워 지는가를 말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수산나 타마로는 자신이 쓴 이 책에 대해 악(惡)에 관한 책, 이라고 하였다 한다. 더불어 역자주에서는 그 악이 바로 안드레아라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했듯 신이 아닌 인간이 거만한 지성을 가지게 될 때, 절망하며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안드레아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가 악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그가 꿈꾸던 이상이나 현실적 모순에 대한 지적은 전혀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가. 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표출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악의 근원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의문들이 갈증 속에 희석되지 못하고 공중을 표표히 떠다닌다.

 

 물론 이레네 수녀의 말처럼 겸손과 동정이 없는 지성은 세상뿐 아니라 자신까지 파괴하기 마련일 수 있다. 역사 속 영웅들이 대개 그런 과정과 방식으로 스스로 괴멸하던 예가 있다. 하지만 지나친 겸손과 동정 또한 같은 결과를 가져 오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겸손과 동정이 없는 지성을 새장 안에 갇힌 새로 비유하는 것은 동감하기 어렵다. 어째서 인간이 스스로를 규제하고 그 안에 갇혀야 하는가. 그것이 새장 밖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의 지성이 신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이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에 앞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계몽의식은 씁쓸하다.

 

- 사람들은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자신들이 영원히 젊고 건강하고 힘이 있을 것이라 느끼며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339쪽)

 

 또한 죽음으로써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어째서 진정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성경무오론을 주장하는 근본론자들은 흔히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 들이곤 한다. 어째서 그 안에 숨은 메타포를 거부하는가. 아버지가 인생 전반에서 스스로를 경멸하고 증오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나 안드레아가 삶을 도피하고 스스로를 폐한 것, 이레네 수녀가 인간 본연의 죽음으로 만족하는 것을 어찌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말하던 미안함을 어째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수산나 타마로가 나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고자 한다면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관하여>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그가 학수고대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기적, 즉 신을 통한 안식과 구원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나의 저의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이러한 인간 존재 기저에 깔린 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은 결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끝없는 고뇌 끝에 어렴풋이 스스로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나와 전혀 다른 이상을 세울 수도 있고, 비슷한 이상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옳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생에 정답이 있을 수 있는가. 인생은 수학 공식처럼 반드시 답을 구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나 타마로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자신의 것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그 텁텁함과 갈증의 정체가 밝혀 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 갈증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비판하는 것은 좀 웃기는 모양새임에는 틀림없다. 바로 전에 언급했듯 누군가의 이상을 폄하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니 말이다. 다만, 발테르가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기를 바랄 뿐.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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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8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재준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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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의 미학. 솔직히 말해 이 책은 지금 시절에 맞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나의 견해에 대해, 미학이라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그것의 주관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으로 본다면, 정확한 판단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혹하게 하는 것에 대한 가치와 미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다.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지성과 감성에 대한 무게에 차별을 두고 싶은 게 아니라, 그의 미학이 현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칸트는 숭고함이란 감동시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다움이란 매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숭고한 성질은 존경을 환기시키고, 아름다운 성질은 사랑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 본성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보편적인 근거로서 그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허나 그 감정이 절대적이며, 보편성이 아니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감이 든다. 어째서 성별(性別)에 따라, 민족에 따라, 인종에 따라 그것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화가 났던 여성의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은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것을 가장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지적이며, 더욱 숭고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러한 감정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 유럽 각국의 민족적 특성을 통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알아 본 것 역시 의아하다. 어느 정도 각 민족의 특성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테지만, 갈수록 세계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764년이다. 칸트가 그 시대의 '심오한 지성'이었다고는 하나, 또 이러한 심미적인 감정이 이론과 일상의 내용에서 유리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것을 변명의 여지로 남길 수 있을까. 물론 18세기에는 칸트뿐 아니라 많은 이론가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런 미학체계는 시대적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입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로서는 그들이 미숙한 경험의 한계점에 부딪힌 것으로 밖에 여길 수가 없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언명령이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자유의지가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하던 칸트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게다가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선의지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인간 감정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또한 자연적으로 본성에 내재해 있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이 더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성과 감성의 종합을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

 

 칸트는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내리는 미적 정의, 즉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그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숭고한가 지적인가를 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을 남발하며, 또한 여성이 지적이려 시도하는 것이 몹시 추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분노까지 할 정도였다.

 

 미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그것에 발맞춰 나가는 사회 속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는 전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칸트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그는 미학에 관한 자신의 주관적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 분류화, 일반화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젊은 칸트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더불어 그 또한 18세기의 사람으로써 당시 미학 이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내 스스로의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론은 물론 대개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축적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와 더불어 비판은 그 이론의 비논리를 짚어 가며 발전하는데 앞장선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의 근원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칸트 미학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자위하련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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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11-04-19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칸트의 미학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지만, 님의 견해는 틀렸습니다. 칸트는 취미 판단이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참고로 미학과 졸업생입니다.

Lomain 2017-12-2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칸트의 다른 비판서가 쓰여지기도 전인 초기 저작입니다. 그의 미학 관점을 좀 더 세밀하게 알기 위해서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저작을 보셔야 원하는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