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는 발테르라는 인간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불, 땅, 바람이라는 세가지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불은 청소년기, 땅은 청년기, 바람은 장년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보면 줄리안 반즈의 <태양을 바라보며>가 떠오르고, 발테르의 냉소적인 태도를 보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지만, 앞에서 말한 작품들과는 다르게 텁텁함이 느껴진다. 그 텁텁함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면서 느낀 것과 약간 비슷한 감이 있다. 시원한 물 한 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갈증 말이다.

 

- 인간 삶의 무시무시하고 절대적인 고독과 정면으로 부딪치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독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몸부림을 친다. 표면에 떠오르는 시체를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캐스터네츠나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춘다. 표면에 떠오른 시체들이 모두 절망적으로 절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독하다고 우리는 움직이는 먼지일 뿐이라고……. (105쪽)

 

 불의 장에서 발테르는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라고 느끼는 소년이었다. 특히 아버지와 관계 속에서 큰 반감을 느끼는데, 그로 인해 가출을 감행하고, 또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발테르는 그 곳에서 안드레아를 만난다. 안드레아는 그가 일생에서 가장 고뇌하게 될 문제점을 이미 고뇌하고 지적했던 소년이었다. 더군다나 안드레아는 자신과 발테르가 슈퍼맨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신과 발테르를 격상시키려는 소년이다. 둘은 사춘기의 정점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교감한다.

 

 소년 시절부터 죽음을 생각하던 발테르는 땅의 장에서 더 깊은 인생의 추락을 느끼며, 좌절한다. 인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오점과 악(惡)한 인간 군상들에 대해 낱낱이 들추는 것이다. 발테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속고, 자신을 숨기고 변화하면서 속세에 찌들어 간다. 자신을 망가뜨릴수록 더 깊은 슬픔과 자기연민 속에 모든 것을 내팽겨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의 입원 소식과 함께 바람의 장이 열린다. 자신 또한 죽음을 결심하고 있던 그는 평생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 아버지가 아기가 되버린 모습에 증오도, 경멸도 수그러 들고 만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경멸한 것이 오히려 스스로가 아니었는지, 혹은 세상이 아니었는지 하는 반문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처자식 또한 사랑할 수 있을리는 없을 터이다.

 

 발테르는 그때서야, 그토록 닮기 싫어했던 아버지를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발테르 또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몰랐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베풀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리 없지 않은가. 자신의 생을 한없이 끝으로 누르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발테르는 자신도 모르게 통곡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것은 유일한 친구였던 안드레아나 안드레아의 마지막을 함께 한 이레네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발테르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라고 생각했던 이들일까. 아니면 발테르에게 사죄를 구하기 위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 자신만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안쓰러움일까.

 

 발테르의 성장기를 통한 사색은 이처럼 계몽적인 우화와 같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수산나 타마로는 내내 간접적으로 그것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장에서 이레네 수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가슴을 짖누르는 그 텁텁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는다. 더불어 신이 아닌 인간이 거만한 지성을 가지게 될 때, 얼마나 괴로워 지는가를 말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수산나 타마로는 자신이 쓴 이 책에 대해 악(惡)에 관한 책, 이라고 하였다 한다. 더불어 역자주에서는 그 악이 바로 안드레아라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했듯 신이 아닌 인간이 거만한 지성을 가지게 될 때, 절망하며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상이 바로 안드레아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가 악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그가 꿈꾸던 이상이나 현실적 모순에 대한 지적은 전혀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가. 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표출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악의 근원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의문들이 갈증 속에 희석되지 못하고 공중을 표표히 떠다닌다.

 

 물론 이레네 수녀의 말처럼 겸손과 동정이 없는 지성은 세상뿐 아니라 자신까지 파괴하기 마련일 수 있다. 역사 속 영웅들이 대개 그런 과정과 방식으로 스스로 괴멸하던 예가 있다. 하지만 지나친 겸손과 동정 또한 같은 결과를 가져 오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겸손과 동정이 없는 지성을 새장 안에 갇힌 새로 비유하는 것은 동감하기 어렵다. 어째서 인간이 스스로를 규제하고 그 안에 갇혀야 하는가. 그것이 새장 밖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의 지성이 신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이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에 앞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계몽의식은 씁쓸하다.

 

- 사람들은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자신들이 영원히 젊고 건강하고 힘이 있을 것이라 느끼며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339쪽)

 

 또한 죽음으로써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어째서 진정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성경무오론을 주장하는 근본론자들은 흔히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 들이곤 한다. 어째서 그 안에 숨은 메타포를 거부하는가. 아버지가 인생 전반에서 스스로를 경멸하고 증오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나 안드레아가 삶을 도피하고 스스로를 폐한 것, 이레네 수녀가 인간 본연의 죽음으로 만족하는 것을 어찌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말하던 미안함을 어째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수산나 타마로가 나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고자 한다면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관하여>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그가 학수고대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기적, 즉 신을 통한 안식과 구원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나의 저의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이러한 인간 존재 기저에 깔린 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은 결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끝없는 고뇌 끝에 어렴풋이 스스로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나와 전혀 다른 이상을 세울 수도 있고, 비슷한 이상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옳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생에 정답이 있을 수 있는가. 인생은 수학 공식처럼 반드시 답을 구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나 타마로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자신의 것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그 텁텁함과 갈증의 정체가 밝혀 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 갈증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비판하는 것은 좀 웃기는 모양새임에는 틀림없다. 바로 전에 언급했듯 누군가의 이상을 폄하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니 말이다. 다만, 발테르가 평안함을 찾을 수 있었기를 바랄 뿐.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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