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자연사 대우고전총서 10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아카넷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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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흄을 접하는 것이 두번째다. 덕분에 첫 만남보다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철학에 더욱 깊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흄은 광신을 지양하고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모든 의례와 신화를 거부한 철학자였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기 각 종교가 가진 교리나 믿음을 거부하고, 자연적 성향을 수용하면서 중용을 주장했다. 특히나 종교의 타락과 불합리성, 모호함, 광신 등을 거부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기성 종교인들의 반감을 샀다. 종교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바로 세우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불신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연사>는 흄이 주장하는 종교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종교는 어떤 양식으로 발전해 왔는가, 근대 종교는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등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같은 원시 신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다신교와 일신교, 근대 종교의 발전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다신교가 인류 최초의 종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할 종교인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유일신교의 뿌리가 다신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반발을 사리라.

 

 흄은 고대 그리스, 로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을 빌려 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자신이 그것을 강하게 믿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원시신앙 등의 미신이 이성적으로 자연물을 관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부터 인간이 가진 부조리를 말한다. 고대인은 자연에 대한 경외나 존경, 신에 대한 자연스런 믿음으로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공포, 두려움을 '불완전한 신'들의 변덕스러운 섭리 탓으로 여겼기에, 그 신들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제례 의식을 시작했고 그것이 종교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에 생겨난 원시 종교는 태양이나 바람, 혹은 동물들에까지 신심을 바친다. 종교란 이처럼 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두려움, 무지로 인해 생겨난 것이기에 인간의 지식과 이해가 증진된다면 자연적으로 축소되어야 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현대인 또한 생로병사, 빈곤, 풍요, 자연재해를 예측하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종교의 힘이 존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고대인들보다 수많은 발전을 거듭하기는 하였으나 자연적인 사건의 궁극적 기원이나 원인들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여전히 종교를 존속케 했고, 여러 자연물을 숭배하던 원시 종교는 차츰 나아가 더 발전된 모습의 신으로 존재하기에 이른다. 고대 그리스나 유럽의 신화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나 유럽의 신들은 하나같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은 인간보다 좀 더 발달한 존재, 이성적 존재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신들은 아직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자연에 대항하는 것을 신에 모독을 행하는 길이라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신들과 경쟁했다. 그렇기에 신들의 장난이나 실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제례 의식의 필요성을 증가시켰고, 이것은 종교적 아부의 극치에 다다른다. 마냥 신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장난치고 실수하지 않도록 회유하기 위한 아부를 떨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이해가 발전함에 따라 신들도 발전한다. 신은 언제나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라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마침내 완벽한 힘과 지성, 이해를 지닌 존재로 격상되었고 그에 따라 유일신교가 등장한다. 신이 완벽하려면 오직 유일한 존재라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종교 교리에 철학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종교 철학의 발전은 그들의 교리를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아부와 찬사를 부풀리다 못해 더이상 부풀릴 수 없는 무한자, 절대자라는 개념으로 도달시킨다. 종교에 철학이 유입함으로써 종교는 비로소 한 단계 발전하였고, 그것을 근대종교라 부른다. 이같은 근대 종교는 미신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체계화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신학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독단적인 길로 들어섰고, 상이한 종교들 간에 또는 동일 종교 안에서도 파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철학의 유립으로 인해 서로 다른 것끼리의 양립이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유일신의 교리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로간의 종교적 탄압과 박해,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일신의 등장은 다신교가 가지고 있던 장점을 전혀 수용하지 못 했다. 다신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고,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았다. 다문화적인 성향과 관용의 정신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신교는 유일신만이 신앙의 대상이므로 타종교와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박해하거나 박해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자연히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일신교 스스로가 만들어 낸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같이 자연에서 생겨난 존재라고 여겨졌지만, 일신교의 유일신은 그 스스로가 창조주이며 절대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물론 자연을 창조해 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태초에 자연이 준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만, 마침내 신이란 존재를 절대자로 숭상하게 되며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또한 자연재해는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준 것이므로 거부할 수 없으며,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신에 의해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이므로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믿게 된다. 병을 앓아도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광신은 대중종교에 만연했고, 보다 더 새로운 찬사를 개발하고, 새로운 믿음의 증거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만들어서라도 보여낸다.

 

-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일신교는 분명 다신교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였지만, 그 믿음이 지나쳐 결국 타락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든 신이든 절대적 권위가 남용되는 경우, 그보다 더 악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유일신을 창조해 냈지만, 그 유일신의 권위를 남발하게 되는 기만을 보게 된다. 대중중교의 기만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고 할 것이다.

 

 종교의 시작이 지성적 창조주가 아닌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 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허나 그가 주장하는 대중종교의 신관이 감각과 상상에 의한 산물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나약성이라는 점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나 해석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흄이 제시한 주장의 부산물들, 즉 대중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과 종교의 난제에 대한 반성과 발전에 대한 길을 모색하는 것에는 종교인들도 수용하고 연구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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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의 삶과 욕망
박희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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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러 시간을 두고 음미하며 천천히 그림을 보고 해설을 읽었다. 특히 그림책들은 그렇게 보지 않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되기 십상인 탓이다. 아마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것들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일상에서도 관심을 갖고 미술관을 찾아 다니거나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거나 하면서 지식을 쌓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자 박희숙이 짚어 주는 것만으로도 받아 들일 용량이 꽉 찬 듯한 느낌이다. 회화든 조각이든 혹은 음악이든 모든 예술은 스스로 생각하고, 그 느낌을 받아 들이는 것일텐데 그렇지 못하는 협소한 지식만 갖고 있어 답답한 점이 있었다. 나로서는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알 수 없는 점들을 꼼꼼히 짚어 주는 해설서들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덕분에 그럴 때마다 창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은 대체적으로 성적 욕망과 열의를 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개 누드화이다. 특히 신화적인 인물들이 많은데, 그것은 중세 화풍이 실제 인물을 그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드화는 특성상 매춘부들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그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저속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남녀 누드 모델을 동석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남녀를 나눠 따로 그려 넣거나 한 쪽의 성만 누드로 있기도 한다. 이런 금기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 화가는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화적 이미지와 이야기를 차용하여 누드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 속에는 쉴레나 클림트, 프란츠 등의 익숙하고, 또 좋아하고 있던 화가들의 그림도 있었지만, 생소한 화가들도 많이 보였다. 그만큼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과 군상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성적 욕망이라는 대주제를 두고, 이렇게나 다양한 썰을 풀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좋다. 다만 그 주제를 벗어나는 이야기들도 가끔 보여 아쉬운 느낌이 들었고, 좀 더 깊숙한 내면의 표현을 잡아 내지 못 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당대의 풍속을 통해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도 좋은 접근법 중 하나이지만, 그런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그 탓에 좀 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삶과 욕망이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상관관계 속에서 명화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려는 시도는 좋았던 듯 하다. 더불어 생소했던 화가와 그림들,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볼 수 있어, 한 층 더 좋은 시간이었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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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 '이해의 선물' 완전판 수록
폴 빌리어드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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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통>이라는 원제를 갖고 있는 폴 빌리어드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그 때 겪었던 성장통을 바탕으로 펴낸 수필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슬픔이나 기쁨, 괴로움이나 즐거움, 눈물이나 웃음을 잘 버무려 내었다 할 수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글이 실렸던 작가답게 지극히 교과서적인 교훈을 주는 점은 왠지 모르게 아쉬웠지만, 그러한 교훈 또한 삶을 살고 겪으며 깨달은 지혜이기에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난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느낀 것을 숨길 줄 모르고, 기분을 감출 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순수한 내면의 세계에서 바라는 것들을 그대로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험난한 모험이나 위기의 순간도 늘 흥미진진하고, 숨 막히는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서 돈 대신 자두씨를 주고 사탕을 샀던 일, 혼자 기차여행을 하다가 머리 위까지 쌓인 눈 속에 떨어져 그 속에서 굴을 파며 놀다가 기차를 놓친 일, 자전거 램프에 가스를 채워 넣으려다 집을 폭파시킨 일,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집을 뛰쳐 나온 일 등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는 이야기들이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는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어린 아이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기억을 돌이켜 보면 누구나 책 한 권쯤은 거뜬히 써낼 수 있을 정도의 추억은 쌓여 있으리라.

 

 나 또한 철 없는 꼬마 시절, 갖은 장난과 위험한 놀이로 부모님의 속을 새까맣게 태웠던 일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이웃집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다 부셔 놓기도 하고, 옥상에서 수퍼맨 놀이를 하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옥상에서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풍선을 던지고 숨은 것이 들켜 혼나기도 하고, 빌딩에 들어가 미로탐험 놀이를 하다가 경비 아저씨에게 쫓겨 나기도 하고, 건설 현장에서 놀다가 석면 파이프에 머리를 깨기도 하고...... 수많은 장난들이 떠오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그땐 그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며 미소 짓게 되는 좋은 추억들이다. 간혹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아찔한 추억들도 있지만.

 

 그렇기에 누구나 이 책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고, 더러 눈시울이 붉어 지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요즘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 다음에 떠올릴 그런 추억이 있으려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너가지 학원과 공부에 치이고, 컴퓨터를 붙잡고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신나고 아찔한 추억들이 있으려나. 멋 모르고 뛰어 다니고, 다치고 깨지고 울어도 마냥 즐겁고 신나는 그런 추억 말이다. 나 어릴 적만 하더라도 놀이터에는 항상 또래들이 그득했는데, 요즘은 놀이터에 아이들이 거의 없다. 골목길에서, 혹은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놀다 보면, 저녁 밥 먹으러 얼른 들어 오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가끔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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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의 시집 37
도종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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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8
데이비드 흄 지음, 이태하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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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흄은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기적을 자연 법칙의 위반으로 정의하고, 기적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기적을 만든다며 미신과 광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이 기적을 만든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써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보인다. 실로 종교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그 수단을 강화시키기 위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라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 기적을 통해 종교를 믿게 되며, 종교가 강요한 실천을 허물없이 비판하는 것이다.

 

 흄은 미신과 광신이 절대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종교가 기적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절대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행한 기적으로써 종교는 입지를 강화하며, 절대자를 향한 믿음이 바른 것임을 주장한다. 기적을 산출하는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이것은 신의 권능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증언에 의해서도 입증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이미 배후에 둔다. 신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신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에 의해 부가되는 모순을 모순이라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든다.

 

 흄은 가톨릭의 기적 가운데 많은 것이 신뢰할 만한 기적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가시적인 힘에 의해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신이 발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갖은 이유를 찾아 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이 기적을 신성시하는 것이 왜 해악인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실로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갖고 있다. 신의 권능이 일으키는 기적에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면, 그러한 인간들이 이 사회의 짐일 수밖에 없으며 무익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기적을 만드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쨌든 기적에는 증거가 없다. 그것은 신의 권능에 의해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진기한 사실이 일어 나게 되면, 그 증거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리거나 증거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기적에 관한 흄의 정의는 가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종교론자들은 이보다 더한 방식으로 흄의 정의에 대해 비판한다. 신의 권능에 의한 기적은 신의 권능을 추앙하기 위한 것이지, 기적을 기대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탓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 기적을 통해 인간이 구원받을 것이며, 따라서 특정 종교에 투신할 것을 주장한다. 그 주장의 바탕에는 신의 기적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광신론자들에 의해 흄은 극단적 회의론자로 지적받는다. 따라서 대개의 철학자들이 흄의 철학을 회의론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에 대한 회의이지, 이 사회에 대한 회의라고 까지 확장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나같은 불가지론자에게 그것은 이미 회의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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