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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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트 보네거트 이 소설, <제5 도살장>에서 분열증 환자인 빌리의 입을 빌려,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말한다. 그는 때때로 꿈에서 깨어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트랄파마도어에 갔다 왔다며, '그렇게 가는 거지'를 외치는 그의 정신은 미쳤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익살로 인해 당시의 참상이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처럼, 비현실적인 이 이야기를 사실적인 표현 방식으로 전달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랐으리라. 그렇기에 비이성적인 말로 설명한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시간여행만 할 줄 안다면, 죽음도 죽음이 아니기에, 그는 죽음에 대해 가볍고도 장중하게 읊조린다. '그렇게 가는 거지.' 라고. 드레스덴의 참상이나 검안사 빌리를 잊어버릴지라도 이 한마디만은 절대 잊지 못하리라. 아마, 이 책을 읽어 본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이 의문에 대해 속시원히 대답해 줄 이가 있을까. 빌리의 입을 빌려 말하는 커트 보네거트 또한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의문점에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전쟁은 언제나 대의만 있고, 대안은 없다. 대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그 희생의 대안은 애당초 마련되어 있지 않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 남는 빌리가 그 상황에서 살아 남은 것을 전혀 기뻐할 수 없었던 것 처럼 말이다. 그들이 죽음과 추었던 의무적인 춤을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의무는 있었으나 권리는 없었다.

 

- 알다시피,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 전쟁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야했네. 그래서 전쟁을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치르고 있다고 상상했지.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아이들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면도를 하고 난 얼굴들을 보았을 때, 그건 충격이었네. 나는 혼자 이렇게 말했지. '하느님 맙소사. 이건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야.'

 

- 극장 가까이 가자 영국군 포로 하나가 군화 굽으로 땅에 홈을 내고 있었다. 미군 구역과 영국군 구역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빌리와 라자로와 더비는 그 선의 의미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상징이었으니까.

 

- 그가 껴안고 있는 것은 희박한 공기와 석탄재 뿐이었다. 그의 군화는 누가 가져가 버렸다. 그의 발은 푸르뎅뎅했다. 그가 죽었든 말든, 세상은 그런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전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생각하고 피력해 볼 새도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아이들은 선의 상직적 의미와, 세상은 누군가의 죽음과 눈꼽만치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겪으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의지가 그것을 원했듯 원하지 않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렇기에 커트 보네거트는 아들에게 말한다.

 

-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과는 반대로 행복한 시간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악몽으로만 치부하고 남겨 두기에는 그 슬픔과 통렬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시간여행을 통해, 전쟁을 돌아 볼 수 밖에 없다. 그의 정신은 차차 분열되어 그 속에서만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비극을 경험하고서도 대의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인류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네 목숨이나 그렇게 보내 버려. 병신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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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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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 데 없이 잔인한 결말이라니. 마지막 장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리라. 이 얇은 한 권의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기에 더욱 그렇다. 종국에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책에서는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말과,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온다. 이 말은 곧 내 자신이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한 켠에 자리잡은 죄의식은 곧 내부의 적이며, 그 적의 화장법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치밀하다. 허나 그 치밀함은 결국 스스로의 무방비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무섭기 짝이 없다. 어디선가 닥쳐 올지 모를 적을 맞이하는 것 보다, 내 삶에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무언가가 나의 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온전히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파괴되지 않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비양심적인 것일까.

 

 - 자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네.

 

 모르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무시하고 살아 온 내게, 누군가 이렇게 말을 건네어 온다면 당혹감이 먼저 찾아 올까. 두려움이 먼저 찾아 올까. 나의 경우,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더 걸맞을 것이다.

 

- 강간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꺼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오. 

 

 게다가 그 치는 당연한 듯이 이런 말을 던질 수 있는 비상식적인 인물이다. 도대체 강간을 저따위로 풀이할 수 있다니, 그 잘난 혀를 뽑아 발로 밟아 치대어 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갖은 철학적 논리를 삼류로 저하시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당위성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해도 들어 맞지 않는다. 당위성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이유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위성을 무시해도 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있을까. 신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멜리 노통브는 이렇게 <적의 화장법>에서 독자를 끊임없이 몰아 치며, 수 많은 경악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매번 증오스러워, 분노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사그라들게 할 수 없다는 데에 특이함을 둔다. 게다가 <적의 화장법>의 결말은 경악과 분노를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문제, 즉 죄의식을 토로함과 동시에 사죄의 길을 막아 버린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궁에 들어선 듯 답답하고, 두렵다. 결코 적과 소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9년 3월 24일 밝혀진 사건의 전말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더욱 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진정, 탈출구는 없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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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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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베케드 자신도 모른다는 고도, 그것의 정체를 독자가 알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다. 감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신적 존재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디디와 고고가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란 그럴만한 대단한 인물인가, 싶다. 어쨌든 한없이 기한을 늦추는 능청스러운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늙어 기억력도 좋지 않은 두 인물은 항상 기다림에 동반되는 지루함과 초조함을 느끼며, 그 전의 일은 싸그리 잊어 버린다. 포조와 럭키, 고도의 전언을 토해내는 소년과의 만남 또한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것만은 잊지 않고 반복한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답답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지 않을 이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어떻게 매일같이 극복해 내는 것일까. 게다가 소년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보아, 고도가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정말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신(新)세상일지도 모른다. 더 아름답고 더 나은 세상 말이다. 디디와 고고는 그것을 기다리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며, 소년은 그것이 곧 온다고 말하며 기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없는 기다림을 언제나 초조해 하면서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1막과 2막으로 끝나는 이 극에 3막이 이어지더라도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도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의 정체를 모르듯이 독자 또한 고도의 도착을 알지 못한다. 막막한 기다림은 결국 허무로 대치된다. 또 그렇기에 디디와 고고가 혼돈스러운 세계, 즉 포조와 럭키가 판치는 세상을 참고 넘기며 고도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허무함이 그들을 감싸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희망이지만, 허무한 희망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극이 비극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들이 희망을 지속하는 한, 언젠가 고도를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물의 대사 속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디디는 그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고고의 기억력은 디디보다 한없이 뒤떨어지기도 하고, 더욱 더 어릿광대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에 반해 디디는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포조와 럭키의 등장이나 그것이 혼란스러운 세상의 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 그들에게 확실한 것은 혼돈 가운데서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고도가 과연 오기는 할까, 싶은 의문과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목을 매어 죽자, 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목을 매어 죽자는 다짐을 아무리 하더라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게 보여진다. 그들은 고도가 도착해야만 해방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 어떤 소망과 꿈, 미래를 한없이 그리며 기다린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때문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나 또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막연히 고도를 기다리며 삶은 연명하지는 않겠다. 맞서 싸우든 그가 오는 것을 돕든 생각과 행동을 전제한 기다림을 하겠다는 것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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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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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나 역시 이러저러한 수사로 <달과 6펜스>의 위엄을 깍아 내릴까봐 겁이 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 하고 하찮은 입을 놀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을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한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개인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대부분 달의 세계를 흔히 몽환과 신비의 세계, 혹은 예술의 세계로 말한다. 그리고 6펜스를 세속의 세계로 칭한다. 하지만 6펜스라는 아주 작은 화폐 단위를 갖고 굳이 세속의 세계로 칭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것 역시 달의 세계로 가기 위한 지극히 단편적이고 저렴한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를 우러러 보든지, 짓밟든지 개개인의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 하지만 더 잔혹한 것은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이엇다.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그 참혹한 일이 있고 나서도 더 불행해졌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블란치가 자살을 하고 난 뒤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달의 세계를 우러르든 짓밟든 그것은 개개인의 욕망의 차이일 뿐이니까. 또한 블란치가 달의 세계로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고갱의 삶을 스트릭랜드로부터 살짝이나마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읽게 되었지만, 나 또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역시'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자꾸 겹친다 싶더니, 마침내 고흐와 고갱의 관계가 떠올랐던 것이다.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와의 관계가 마치 고흐와 고갱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스트로브는 고흐와 달리 얼치기 화가였지만, 서로의 관계만 따지고 보면 그리 다를 것이 없지 않던가. 고갱이 자신을 떠나자 귀를 잘라내 버린 고흐처럼, 스트로브의 괴로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인생 최대의 걸작을 완성하게 되지만 그것을 불사르고 만다. 도대체 왜 그것을 불사르도록 그의 아내에게 시켰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이전에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도대체 왜 그림을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인지에 대해서에 논할 때였다.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만약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 간다면, 계속 그림을 그리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나'는 그 질문을 하면서, 작가인 자신은 만약 무인도에서라면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럴 것 같다. 분명 타인에게 평가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아 줄 누군가가 없다면 도대체 왜 그것을 완성하려 들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달의 세계가 훨씬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검증된 달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중에게 검증받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은 달이 아니라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언젠가 쓰레기였던 것이 달이라 칭송받게 된다면, 대중은 다시 그 쓰레기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달의 아름다움을 논하느라 바쁘다. 나 또한 달을 알아볼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욕설을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대체 달의 세계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달의 세계가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쓰레기가 되는 것일까. 정말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것일까. 서머싯 몸은 책 속의 '나'를 통해 알렉 카마이클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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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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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몸의 눈을 감기는 주저하면서, 마음의 눈을 감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것에 대해 눈뜬다면 양심의 가책과 진실의 두려움에 떨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혹은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집 앞의 쓰레기가 더러워 그것을 외면하고 쏜살같이 달려 들어간다고 해도 다음 날 집을 나설 때 그것을 누군가 치워놓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외면할수록 쓰레기는 더욱 쌓여 간다. 그것은 진실이지만, 눈을 감고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오냐, 아예 눈이 멀어 버려라, 하고 백색 질병이 퍼진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가운데,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눈먼 사람들이 유츄한 것처럼, 그가 선하기 때문에, 혹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눈이 멀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는 그의 악함을, 그리고 두려움을 이 책 속에서 속속들이 보았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의 살인과 살인의 방치 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기에 '그의 다짐이 그를 지킨 것이 아닐까', 혹은 '적어도 남편에게서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를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성자로 이끌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선함과 악함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어차피 기준의 잣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이치에 따라, 혹은 시대의 깨달음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눈이 멀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차를 훔쳤던 남자가 죽고 난 후, 그를 용서하려 하자 의사의 아내가 말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

 

 죽은 자는 언제나 착한 자다. 무덤 앞에서 고하는 이별사에는 언제나 선행만 가득하다. 간혹 그의 악행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갖은 변명 끝에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되고 만다. 의사의 아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선한 것은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는 것이다. 죽고 난 뒤에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장부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이 글 속에서 독자는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답답함보다 더욱 답답한 것은 눈먼 자들이다. 그들의 이기심 때문에, 숨막힐 듯 달려가는 글자들 사이에서 한숨을 쉬는 것으로 쉼표를 대신하는 듯 하다. 기나긴 답답함의 한숨 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 독자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사의 아내는 마음의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몸의 눈이 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혹은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때때로는 눈이 먼 사람이 훨씬 더 잘 볼 수도 있고,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못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산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그것을 선명하게 드러 낸다.

 

 눈뜬 자들이여, 보라. 눈이 멀고 싶지 않다면.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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