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죄와 벌>은 시이나 링고의 동명 제목을 가진 노래다. 현대판 죄와 벌을 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미 오래 전에 읽었던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 느낌을 다시 재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뻬쩨부르끄는 우리나라의 1960-70년대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갖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 궤도로 들어 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서울의 팽창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주택 부족, 상하수도 문제, 부동산 투기 열풍 등 생활수준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와 비슷한 1860년대의 뻬쩨부르끄는 농노 해방과 더불어 과다한 인구가 몰려 들면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죄와 벌>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 배경의 서술을 통해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죄와 벌>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으킨 후, 그것을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견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가난한 환경에 찌들어 사는 인물이다. 골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기에는 이 세상의 원리가 황금만능에 찌들려 있기 때문이다.

 

-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상권 73쪽)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전당포의 주인인 노파를 살해하게 된다. 자신을 살해할 용기도 없는 그는 처음부터 노파를 살해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치며 결국 실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죄인과 다르다. 가난과 상처받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나폴레옹이 말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살인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악마가 나를 유혹했어. 그러고는 나중에 그 악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권리르 지니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나를 실컷 조롱한 거야. 자,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왔어! 손님은 맞아들이시지! 만일 내가 <이>가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왔을까? 들어 봐, 내가 그 때 노파에게 간 것은 다만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갔던 거야. (하권 616쪽)

 

 라스꼴리니꼬프가 두냐에게 고백한 이러한 '시험'은 마침내 그가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자신이 행한 범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파를 살해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상권 101쪽)

 

-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상권 163쪽)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론 또한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만다. 그와 같은 생각을 나누던 사람들 또한 직접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논리에 의한 판단으로 범죄를 행하지만, 그것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여 노파를 살해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꼼꼼한 계획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운명의 우연과 논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사형 선고를 받은 어던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상권 231쪽)

 

- 내 장담하건대, 너 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 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 졌어. 네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상권 244쪽)

 

 그렇기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껏 사랑해 왔던 타인을 탓하고, 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의 속에 내재해 왔던 무수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그가 스스로 상처입힌 양심과 내면의 근본적인 선함이 파괴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철저한 무개성을 요구하고, 거기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장 닮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을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상권 293쪽)

 

 이처럼 그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선함을 믿었고, 그것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고 있던 사상에 대해 진심어린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라스꼴리니꼬프의 자신의 동생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비관성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사상에 대한 반대로 또 첨예하게 대립한다. 분명 둘은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비난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가 행한 범죄로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는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다. 이 가운데 더욱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곧 사회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둘 모두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틀림없지만,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서로를 역겨운 존재로 추락시키게 된다.  

 

-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하권 423쪽)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노선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뿐이지, 자신과 관계없는 거창함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것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 서민들은 술에 취해 있고, 젊은 지식들은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영 속에서 할 일이 없어 말라비틀어진 채 이론의 기형아가 되어 버리고, 어딘가에선 유대 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그 밖의 사람들은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하권 710쪽)

 

 하지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말하는 세상의 추악함은 그를 타락한 존재로 이끌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부추긴 것 또한 세상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원인 속에서도 태어나는 사상은 다르며, 그들이 겪는 체험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다르다.

 

- 자연을 변화시키고 조정하는 것은 인간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편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을 거야. (상권 101쪽)

 

 그렇기 때문에 환경론은 물론이오, 유전론까지 버무리지 않으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행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문제점은 환경적인 요인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상과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환경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쳤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형벌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어 좌절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스스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그로써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여드는 압박감과 죄의식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을 결행하는 것에 대해서 망설인다.

 

- 왜 이런 쓸데없는 시련들이 필요하다는 거지?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지? 20년 동안의 유형 생활 이후에 늙어 빠져서 힘없고 고통에 찌들어 백치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지금 깨닫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게다는 데 동의하는 걸까? 아아, 오늘 새벽 네바 강 위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권 766쪽)

 

 그가 자수를 한 이유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추측하건대,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비열해지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압박이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저지른 범죄에 우연성이 큰 작용을 했던 것처럼, 자수를 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이 개입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처럼 표현된다.

 

 또한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지듯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단지 결말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겠느냐는 예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물론 그의 남은 인생까지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남은 유형생활에서 그가 죄를 참회하고 진정으로 벌의 참담함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회개의 예견을 통해, 그가 남은 생을 소냐와 함께 평화롭게 살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적 성향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이 불가지론자인 내게도 그 어떤 불쾌감을 주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도스또예프스끼는 <죄와 벌>을 통해 삶과 인생의 성찰,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과 내면의 탐구를 끝없이 취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이 되려했던 인간의 좌절과 운명의 타락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불운한 인생과 범죄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 것은 분명 훌륭하지 않은가.

 

 막심 고리끼의 말처럼,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임에 틀림없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무덤 훼손 사건 발생'이라는 기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전개부터 결말까지 어설픈 글솜씨로 내용을 진행한다. 주인공인 청소년 핼이 일기를 쓰는듯한 형식으로 내용을 진행하고 있고, 중간 중간에 핼을 상담하는 사회사업가의 기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사업가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사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사업가라는 말은 사장되어 더이상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한다면 사회복지의 역사까지 파고 내려가야 하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자.

 

 어쨌든 청소년 문제 담담인 듯한 이 사회사업가는 핼에게 친구의 무덤에서 장난을 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끈덕지게 조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만 그에게 선고하는 형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도록 판사에게 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쉽지 않은 사례에 대해 사회사업가가 겪었을 어려움과 핼의 아픈 기억을 건드려야만 하는 고통도 언뜻 이해가 간다. 그의 강요 끝에, 핼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사건의 전말을 글로 설명하려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사전은 어휘의 광산이다. 들이파면 나온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278쪽)

 

 이처럼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쉬울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던 것이다. 핼은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글로 표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더욱 고된 작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소설을 쓴 에이단 체임버스는 12년의 집필기간을 거쳤다고 말하지 않던가. 

 

 흥미로운 것은 핼과 배리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에서는 동성애를 특이한 것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핼과 배리는 물론이오, 주변의 인물들 또한 지나치게 이상하게 여기거나, 역겨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처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매우 이채로움을 느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질감을 느껴지지 않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어쨌든 핼이 사랑한 배리 고먼, 시체가 된 배리 고먼은 매우 독특한 인물로 그려진다. 

 

- 빠른 건 속도를 얻는 수단이야. 간선 도로처럼 좋은 길에서는 빨리 달린다는 느낌이 안 들어. 그저 속도가 저만치 앞에 있고 내가 그걸 쫓아간다는 느낌만 들지. 속도는 언제나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그래서 나는 그걸 잡으려고 점점 더 빨리 달려. 하지만 속도는 늘 저만치 앞쪽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빨리 달리는 걸 느끼지 못해. 아니면 점점 빨라진다는 걸.

 

- 만약에. 네가 그걸 따라잡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나는 꿈에서 그걸 경험해. 그건 보이지 않는 거품 안에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어떤 힘의 장場에 있는 것. 그건 나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어. 눈 깜짝할 새에. 아주 이상해.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아는데, 힘쓰는 느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진동도 없고 비슷한 무엇도 없어. 그리고 위험도 없어. 그 경험 전체가 아주 놀라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에너지의 거품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영원히. (191쪽)

 

 흔히 속도를 즐기는 사람을 위험한 인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배리 고먼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배리는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사를 초월한 듯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스릴과 공포를 가져다 주는 것을 즐기게 되었던 것인데,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그 방법의 일환이었다. 배리의 성격은 여기저기서 독특하게 연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 중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 사람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거야. (223쪽)

 

 특희 배리가 제시한 이 맹세는 이 사건의 출발점이자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 물론 고통 뿐 아니라 잠시지만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가 맹세를 받아 들였기에,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그에 곁에 머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이 황당무계한 약속을 받아 들인 것은 배리의 죽음이라는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 '마치 하늘을 날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확 뛰어올랐죠. 어찌나 황당하던지.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중독된 모양이에요. 아니면 미쳤는지도 모르고요.' 그 어느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기도 했다. 시간 없는 시간의 거품에 취하고, 속도에 중독되고, 비상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미쳤던 것일거다. 그의 꿈이 맞았던 것이다. (272쪽)

 

 핼이 배리와 했던 맹세를 깨버리려고 하자, 배리는 그 맹세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리는 엉망진창이 된 마음으로 핼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 어려운 일이야.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는 건. 그걸 원하는 게 잘못인 것 같아. 시도하는 것도 잘못이고. (295쪽)

 

 카리의 말은 배리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핼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마법의 콩을 찾던 핼에게, 배리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핼은 더욱 그를 강렬히 원했던 것이리라.

 

 결국 불행으로 끝났지만, 그것이 꼭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 죽음으로 인한 존재의 부재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핼은 죽음이라는 관념에 더욱 관심이 있었지만, 그 또한 배리의 부재로 인한 고통으로 그 관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듯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 현실은 알코올 결핍이 빚어내는 환상이다. (128쪽)

 

- 너만 그런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잘 몰라. 끝까지 못 찾기도 하고. 그걸 찾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지. 원하는 걸 알고 그걸 손에 넣는 사람은 더 운이 좋고. (154쪽)

 

 핼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말을 해준다. 하지만 그 말들을 이러한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귓가에서 흘러 사라졌을 말이다. 핼은 값비싼 삶의 경험을 획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겪지 않고서라도 진리를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등가교환의 법칙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분명 그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진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경험은 은행에 돈이 쌓이듯 우리 안에 쌓이는 걸까? 거기에 이자도 붙어서 나중에 그걸로 어떤 근사한 것을 살 수 있게 될까? 거대한 초신성 같은 경험을 가지고? 나는 그렇게 저축한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사게 될까? 우리의 모든 과거를 가지고? (250쪽)

 

 그 탓에 핼은 이 경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당신의 삶을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꽤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인생의 진리와 첫사랑을 경험하고 안타까운 이별과 경험을 얻기까지 핼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파이크에게 사우스엔드의 선물을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핼이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우리는 동정과 깨달음을 얻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역사는 무엇일까, 좀 더 고민해 볼 일이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두 팔을 휘젓는다고 안개가 걷히지 않듯, 내가 아무리 조바심을 내어도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137쪽)

 

 <슬롯>에서 딱 한 문장을 내세우자면, 미래의 불확정성에 대한 이 문장이다. 신경진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쓴 것이 그것이라고 말하듯 말이다. 그렇기에 언뜻보면, 카지노에 대한 이야기는 얼렁뚱땅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 보면 카지노라는 소재는 확실히 그럴듯 하다. 그래도 역시 '도박과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못박는 것은 의아하다.

 

 어쨌든 그가 선택한 카지노라는 배경은 그 자체에 아이러니와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씁쓸하다.

 

- 카지노는 논리나 이성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 곳은 '무작위'의 태양이 군주였고, 양분은 오로지 그에게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졌다. (151쪽)

 

- 어쩌면 도박의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결국 같은 것이다. 그럼 정말 세계가 예정된 것이라는 말인가? 내가 발버둥을 친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수고를 해야 되는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211쪽)

 

 이렇게 카지노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윤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로 도박에 대한 상념을 이야기해도, 기훈처럼 고양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부르주아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훈이 '고양이가 죽었다면 새 고양이를 사면 그만이다' 라고 말할 때, 소름이 돋았다. 그와 같은 무리에게는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노려야 할 절실함도 돈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이나 분노도 없다. 그들에게 인생은 도박이다.

 

 하지만 '나'는 소시민이다.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겁도 많고 게으름도 많다. 그저 물 흐르듯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길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분명, 매력있는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시민은 분명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는 중산층을 대표하는 평면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설픈 소지식인임에도 분명하다. 그는 여러 인용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 하지만, 수진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마치 생각은 상실되어 있고, 인용구만이 전부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력 하는 시도가 헛됨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147쪽)

 

- 그래도 '만약'이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꺾지는 않았다. 생존이란 그런 거라고 교육받았고, 설령 교육받지 않았더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본능에 따라 삶을 유지한다. (211쪽)

 

 게다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하릴없이 살아가는 탓에 신선함을 잃어버린 듯 하다. 제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도 않는다. 삶의 권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탓이라기보다 스스로의 탓이며, 또한 세상의 탓이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깝기 짝이 없다. 희망도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베수비어스의 언덕에 도시를 지을 수 있을까.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하지 못한 것, 자신에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것을 타인에게 명령함으로써 그 안타까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렇기에 도박과 여자, 라는 뻔한 이야기 속에 흐물흐물한 세상을 담아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레논 대 화성인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김옥희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그의 의도대로 <존 레논 대 화성인>은 그로테스크했다. 파격적이고, 포르노그라피적이다.

 

 이 책을 펼쳐 들기 전, 왜 제목에 존 레논과 화성인이 들어가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 존 레논과 요코를 가르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자, 도대체 왜 제목이 <존 레논 대 화성인>인 거야!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자 MBE훈장을 반납했다는 것 때문에 존 레논이라는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후였다.

 

 이 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 사악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레논 대 화성인>이라는 점은 꽤 그로테스크하지만, 어울리는 셈이다. 존 레논은 평화의 수호자, 화성인은 평화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어울린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중 '멋진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파괴자, 즉 화성인에 의해 상처받은 이들의 대표격이다. 주인공 '나'는 '멋진 일본의 전쟁'의 신병인수를 맡는다. 그리고 파파게노, 테이텀 오닐, 이시노 마코와 함께 그를 치료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신병인수를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를 받아 들이고 친구들과 함께 그를 치료하는 데, 이것의 이유는 단순하다. '멋진 일본의 전쟁'은 과격파 시대의 희생물이며, 그를 돕는 이들은 과격파 시대를 피해 살아남는 자들이 가지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시노 마코가 '자본론 할아버지'가 발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처럼, 그들은 평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제 과격파 시대가 묻는 정의 따위는 내버려 두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 따위는 지워버리고, 진정한 평화를 꿈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가 쓰고 있는 포르노그라피의 생명이 길어야 2-30년밖에 남지 않았듯 진정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생명이 2-30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진정 '리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난 세기의 우리는 분명 성급했으며, 평화를 위한 폭력이 허락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조금 다르다. 목적이 평화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수단, 즉 폭력을 사용하여 얻는 평화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단의 모순으로 이루어진 목적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고 있다. 이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가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라도 좋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 세기의 모순을 딛고 다음 세기에 좀 더 진정한 것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자본론 할아버지'가 이시노 마코에 의해 발기에 성공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이 테이텀 오닐에 의해 섹스에 성공했듯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의 의해 우리가 치유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멋진 일본의 전쟁'은 죽었다. 그의 시체 앞에서 그와의 관계를 묻는 이들에게 '나'와 친구들은 할 말이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를 끝내 몰아내지 못한 것일까. 결국 그들의 정신적 외상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치 않다.

 

- 야옹 야옹 빨리 죽어버려 죽음이란 재미있는 거야 고양이도 인간도 죽는다 즐겁군 사실은 나도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척하거나 열심히 사는 척하고 있으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 없이 만사쾌조.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단지 이렇게 끝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가 응원하는 쪽이 존 레논인지 화성인인지 분명히 구별하기란 어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는 분명 평화를 응원하리라.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30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부대, 허나 이 300명의 전사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스파르타인'이다. 이 말 한마디로 스파르타인의 대한 이미지는 기존의 것과 합해져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펼쳐보기도 힘들 정도의 거대한 판형인 이 만화책은 스파르타인이 등장한다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피를 뿌릴 것으로 예상되었고, 실제로 그것은 적중했다.

 

 스파르타식 학원, 이라는 간판이 즐비하던 90년대 학원가를 상상하면 쉽게 그 엄격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약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그들의 방식은 마치 맹수를 연상케 한다. 사자는 제 자식을 물어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살아 돌아오길 기다린다지 않던가. 물론 이것은 그저 과장에 불과하며, 초원에 사는 사자가 절벽을 만날 일은 전무하다. 어쨌든 그러한 맹수에 비견될 정도로 강하게 키워지고, 양성된 전사의 무리가 바로 스파르타인인 것이다.

 

 한 번 전투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는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있었기에 스파르타가 한 때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현대에 들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죽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스파르타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지배족은 이주민으로,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피지배족인 선주민을 억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식할 정도로 지독한 훈련을 통해 전사로 키워지고, 지배계급인 귀족의 직업은 오로지 전사였으며, 전사가 아닌 농경이나 상업에 종사한 이들은 피지배족, 즉 노예였다고 한다.

 

 이러한 스파르타인에게 3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그야말로 평범한 부대가 아니었다.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300명이라는 소수의 부대를 본 타국에서 항의를 하는 것이 그 장면이다. 그러자 왕, 레오니다스는 가소롭다는 듯 묻는다. 저기 있는 자네의 직업은 무엇인가? 조각가, 대장장이, 빵장수 등 실로 그들의 직업은 가지각색이다. 대답을 들은 왕은 말한다. 스파르타여, 그대들의 직업이 무엇인가?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대답 대신, 창과 방패를 치켜든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전사였던 것이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이들. 왕비조차 말하지 않던가. 스파르타이시여! 방패를 잃느니 그 위에 누워 돌아오세요.

 

 생명을 경시하는 듯한 그들의 풍조에 내심 잔인함과 공포를 느끼지만, 그 시대의 풍조를 마냥 탓할 수 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철저히 군사중심적인 사회에서 커온 그들의 가치관은 전투에서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이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300명이라는 군대가 정말 소규모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페르시아의 군대와 맞선다면 매우 부족하지만, 스파르타의 인구는 7-8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3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적절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국 내통자에 의해 이 부대는 전멸하게 되지만, 스파르타가 3일간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그리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300>에서는 기형아로 버려질 뻔 했던 에피알테스가 산을 넘는 우회로를 가르쳐 준 덕분에 전원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마치 하나의 작은 무덤처럼 방패로 온통 덮어 창만 내밀어 싸우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레오니다스는 결국 페르시아의 군대에 무릎 꿇지 않았고, 그것은 죽음으로 대체된다.

 

 이제 지휘관 딜리오스가 풀어놓는 최고의 이야기는 이제 '소년과 늑대 이야기'가 아니라 '뜨거운 문 이야기' 이다.

 

- 이 곳을 지나는 자유인은 들어라. 언제까지나 영원히…. 세월이 깃든 바위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그대에게 속삭일지니. 스파르타에 전하라, 지나는 이여. 스파르타의 법에 따라 여기, 우리가 누워 있다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하다. 그리고 안타깝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그것이 페르시아인인가, 스파르타인 그 자신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인가.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