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 이너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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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테를링크는 벌집을 움직히는 힘이 여왕이 아니라 '벌집의 정신'에서 나왔다고 강조한다. 분봉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도, 여왕벌의 질투에 의한 살인을 막느냐 막지 않느냐 하는 것도, 수벌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살인의 시기를 정하는 것도, 심지어 일벌들이 각자 할 일을 토론이라도 한 것처럼 필요한 비율로 나누어 일하는 것도 '벌집의 정신'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메테를링크가 벌을 대하는 방식이다. 마치 인간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살갑게, 애정을 담아 표현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육각형 방이나 한 몸이 되어 행하는 동면에 대해서는 경외감마저 표한다. 

 

 메테를링크는 이 책에서 꿀벌의 양봉과 사육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은 없다고, 단호한 투로 시작한다. 따라서, 학계에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점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이실직고한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쓴 것일까. 실용서도 아니고, 입문서도 아니다. 다만 대중에게 꿀벌의 생태에 대해 알릴 따름이다. 아마 곤충의 사회를 통해 인간의 사회를 보려함이 아니었을까.

 

 허나 메테를링크가 감탄해마지 않는 '벌집의 정신'이나, 그토록 칭찬하는 근면성과 성실성은 놀랍지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게 하지도 않았다. 꿀벌이 모은 양식을 누가 강탈하는지 그들 자신은 모른다는 점을 인간사회에 비유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기보다 억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꿀벌의 논문도 아니고, 비유한 소설도 아닌 이 책에서 자연의 사고방식을 인간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꿀벌들이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를 알 수 없듯이 인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허나, 이 불확정성은 꿀벌이나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 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황한 비유도, 최고 걸작이라는 신뢰성 없는 수식어도 메테를링크의 글 속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한 점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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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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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인정받는 60년대 작가, 김승옥의 전집을 시작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접한 작가, 김승옥. 그 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이 들어간 이 전집은 책 스스로 반짝 빛나는 듯 하다. 한국전쟁 이후, 이념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이 깊어져 가는 50년대를 거쳐,  60년대에는 다양한 문학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급부상했다. 그런 시대에 최인훈이나 이청준, 황순원같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김승옥의 존재는 두드러 진다. 이상문학상의 첫 수상자라던가, 당시 문학권력의 중심인 <현대문학>에 단 한 번도 소설이 등재된 적이 없었다던가, 호텔에 붙잡혀 소설을 쓴 적도 있었다던가, 하는 강의 시간 잡담 속의 여러가지 이야기는 일단 제쳐두자.

 

 15편의 단편이 담긴 <무진기행>은 표제작 「무진기행」을 비롯하여,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章」같은 그의 대표작이 눈에 띄인다. 소설 쓰기가 생의 구원 수단이었다는 김승옥의 글은 자위와 영혼의 구토였음이 환히 드러난다. 그래서 그의 글을 보면 한없이 부끄럽다. 스물에 「생명연습」을 들고 문단에 나온 그의 티없는 영혼이 부럽다.

 

-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서울 1964년 겨울」, 286쪽)

 

 모든 근심을 쏟아 부은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이 주어지는 듯 하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던 안과 김이 숨을 헐떡거리며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느냐는 소리가 들릴 때, 「무진기행」에서 윤이 아침에 일어나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무진을 삥 둘러싼 안개속에 서 있을 때,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에서 소설쓰기가 먹고 살기의 방편일 뿐이었느냐고 자문하며 진정한 삶을 절규할 때, 나는 숨이 가빠진다. 당시에 팽배했던 결핍의 순간을 체험하며, 갈증은 깊어진다.

 

 헐레벌떡 달려 온 시간 앞에서, 나는 무엇을 다짐했던가. 그 순간을 모두 잊어 버렸나. 단조로움과 위태함에 빠져, 반성조차 갈기갈기 찢어 버렸나. 

 

-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 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무진기행」, 159-160쪽)

 

 안개를 헤칠 수도 흩을 수도 없는 이 순간, 갑작스레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더라도 이제 더는 멈추지 않겠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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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
필립 리브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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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크라이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영토를 우주까지 넓힌 대제국이라는 전제 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우주의 창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창조한 자가 존재한다는 이 기발한 상상력에서 아트와 머틀이 태어난 것이다.

 

 '최초의 존재'인 우주 거미들의 공격으로 고아가 된 아트와 머틀은 구명보트를 타고 라크라이트를 탈출한다. 우주 거미들의 거미줄로 꽁꽁 묶인 라크라이트로 다시 돌아오게 될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달에 착륙하여 우주나방의 공격을 받은 그들은 우주 해적 잭 해벅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남매와 해적들은 잭의 소프로니아호로 화성으로 피한다. 그 곳에서 다시 우주 거미들의 공격으로 머틀이 잡혀 간다. 잭의 부하들은 아트까지 넘기라고 하지만, 머틀에게 반한 잭은 머틀을 구하기로 마음 먹는다.

 

 갖은 고행 끝에 우주 거미의 본거지인 토성에 도달하게 된 아트와 잭 무리는 큰 위험을 당한다. 하지만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를 깨워 그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아트는 어머니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의 변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아트와 머틀의 어머니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또 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만드는 자'이며, 라크라이트가 '만드는 자'의 배라는 것이다. 이는 곧 그의 어머니가 지구를 창조한 자라는 뜻이다.

 

 온갖 위험 끝에, 결국 지구는 물론 우주를 구한 그들은 라크라이트호로 다시 돌아간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트과 머틀 모두 말이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를 만난 그들은 그동안 겪은 고행보다 더 큰 행복을 얻는다. 게다가 엉터리 요조숙녀인 머틀은 용감한 남자친구 잭과 함께다. 이러한 해피엔딩은 그 사이의 긴장과 흥미를 놓치지 않고 잘 이끌어 나가고 있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허나 대영제국의 우주 영토 확장은 기발한 상상력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제국주의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져 아쉽다. 이것이 영국 작가인 필립 리브의 지나친 애국심의 발로인지, 제국주의라는 허상에 대한 비웃음의 일갈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덕분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신기한 온갖 우주생물들과 인체실험을 서슴지 않는 인간들의 잔인함에 대한 폭로들은 매력적이다. 또 우주선들이 어떤 물질의 연소가 아닌, 의지를 통한 화학적 결합, 즉 연금술에 의해 움직여 진다는 것 또한 기발해, 눈을 반짝이게 만든다.

 

- 배를 둘러싸고 있는 연금술적으로 변성된 입자들이 일으키는 그 반짝이는 선수파 때문에 에테르 항해자들은 천체들 사이를 빠른 속도로 여행할 때 '아이작 뉴턴 경의 황금길을 탄다'고 말한다. (93쪽)

 

 나 또한 기회가 된다면, 아이작 뉴턴 경의 황금길을 타보고 싶을 정도로 설레인다. 아트와 머틀과 함께 한 모험이, 나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도 무럭무럭 빛나는 것 같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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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삿갓 -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이청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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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네 다리 소나무 밥상에 올려놓은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오락가락하는구나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주인 양반 무안해하지 마오

吾愛靑山到水來 오애청산도수래

청산이 물에 비치니 그 아니 좋소

 

 김삿갓을 좋아하게 된 건 이 시 덕분이었다.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던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이 시는 오래토록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김삿갓, 하면 이 시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어쨌든 그런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하니 기대가 안 될 수 없었다. 이미 그를 소재로 많은 책이 쓰여 졌고, 읽혀 왔으나 역사소설을 즐겨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고 나면 헷갈리기 마련이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읽고 난 지금은 더 헷갈리기 그지없다. 전설 속의 인물로 자리잡힌 그에게 인간적인 면모라 칭하며 한꺼풀 더 씌워 놓은 것이 살갑다기 보다, 씁쓸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인간적인 면모란 것이, 또 고뇌란 것이 어쭙잖게 가벼운 느낌이었다. 우리는 김삿갓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았지, 무책임한 영혼으로 본 것은 아니다. 비범인으로 보았지, 범인으로 본 것이 아니다. 명인으로 보았지, 무뢰한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청은 이 점에 대해 단호하다. 사람들은 김삿갓의 실존보다 전설을 더 좋아하지만 자신은 전설 뒤에 있던 김삿갓을 만나겠다, 고 말이다. 허나, 진정 이것이 김삿갓의 진정한 모습이며, 고뇌인가.

 

 물론 이것은 픽션일 따름이며, 그가 보는 김삿갓은 내가 보는 김삿갓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를 논할 수 있었어야 했다. 연재하던 글을 엮어 묶은 것이라서 더 안타까웠던 것일까. 연재물의 특성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나의 취향에는 더욱 부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여기까지가 그의 역량이라면, 그냥 웃고 말지요.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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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머물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김활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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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쓴 일본어로 읽었더라도 이렇게 느껴졌을까. 글쎄, 딱히 번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갑자기 아무렇지 않던 것이 내 눈 앞에 선명히 나타나 살짝 어지럼증이 일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딱딱한 문체에, 무미건조한 어투에, 세상사에 관심없다는 듯한 냉소적 관조에 몸이 마치 얼음에 덴 듯 서늘해진다.

 

 잉꼬같이 다정한 두 부부가 사실, 서로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외면에서부터 그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 마음까지 얼어 붙을 것 같았다. 냉정한 평화를, 그 따위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미움보다 무서운 건, 무관심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그 둘을 바꿔놓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šœ이치는 사에코가 대리모를 하겠다는 것조차 좋을 대로 하라며 손사레를 쳤고, 사에코는 šœ이치가 불임에 대한 죄책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그것에 대해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의 침묵은 서로에게 상처만 깊어가게 할 뿐이었고, 결국은 사에코의 정신 이상까지 가져오게 된다.

 

 평소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의견을 나누고 사랑을 말했더라면 그들에게는 분명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수십년을 살아 온 부부처럼, 늘 편안한 그늘을 제공했을 테니까.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된 이유였던 눈물과 고독이, 부부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기 여겼기 때문일까. 혹은 그 고독이 인간에게 언제까지나 따라 붙는 멍에와 같은 것임을 잠시 잊었던 것일까. 언제나 인생의 단면에 드리우는 그것을.

 

 결국 유산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사랑을 되찾는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일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끊임없이 피를 묻히게 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그것이.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를 중얼거려 본다. 'X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느냐?'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다. 서로가 상처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 꼭 상처를 주어 봐야 아느냐, 라고.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지탄받을 대상은 아니리라. 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따끔해지는 것일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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