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우주에 마법을 걸다 - 현실에 대한 통합적 비전의 등장
에르빈 라슬로 지음, 변경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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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개인의 해석에 따른 여지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과학과 영성의 긴밀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과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요소, 즉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놀랍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상에 대한 연구 결과 또한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다. 그 탓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이다. 특히 책에서 보여주는 실험결과들, 즉 전생을 체험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여러 노력들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광신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도록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긴밀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긴밀성, 즉 상호연관성은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과 비슷하다. 이 세계, 혹은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모든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제법 일반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스스로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 모든 인간들과 생물, 자연 체계 등의 시스템을 하나로 모아 구축한 것이 바로 지구이며, 이 비슷한 시스템들이 모여 구축하게 되는 것이 또 우주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꾸로 보자면, 스스로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는 '전체로서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일견 확실한 일체감과 소속감을 통해 우리 스스로인 우주를 통해 세계의 근본에 대해서도 체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까지 치닫는다. 그것은 곧 우리 영혼이 우주라는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어떤 곳에서든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간혹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 즉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체험이 가능하며, 이러한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주의 기억, 즉 우주가 체험한 것들을 모두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르빈 라슬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이며, 전일적인 우주에 통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주술사와 샤먼, 구도자와 현자, 그리고 용기를 내어 멀리 내다보고 자신이 본 것에 열린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므로 놀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에르빈 라슬로는 우리가 죽고 나면, 이러한 생각 혹은 가설, 주장에 대해 더욱 더 강한 확신을 품은 채 우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런 견고한 믿음은, 앞서 말했듯이 지나친 미신과 광신의 결정체로 보일 염려가 있다.  쌍둥이 통증 공유(twin-pain)나 임사체험,  전생체험 등을 통한 증명은 더욱 더 믿기 어렵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내가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등은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같은 불가지론자가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해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류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더군다나 과학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또한 현대에 들어 영적 차원에 대한 탐구는 점점 미약해져만 가는데, 간혹 명을 잇고 있는 이들은 더욱 더 광신적인 상황으로 치닫기를 이끌려 하기 때문에 더욱 더 믿기 어렵게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될만 하다.

 

 아마 이러한 간극에서 오는 딜레마는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가능성의 여지까지 짓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코페르니쿠스가 목숨을 걸고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때야 비로소 태양이 멈추고 지구가 돌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태양은 계속 멈춰 있었지만, 우리 믿음 속의 태양은 그때서야, 그것도 깨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멈춰 있지 않았나. 다시 말해, 비록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이 아직 정설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수가 주장하는 의견을 정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옳기 때문은 아닌 탓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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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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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 시인'이라 불리우는 김남주. 그를 잘 모르더라도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이라고 하면, 아마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리라 생각된다. 80년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서 저항을 하던 그를 기억하기에는 내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그의 정신은 가히 짐작이 된다.

 

 그는 스스로를 시인이나 글쟁이라 부르기보다 '전사'라고 불렀다 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에서 풍겨오는 혁명의 냄새, 자유를 향한 부르짖음,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등은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나타난다. 즉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또한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계몽적이다. 물론 그것은 당대 현실속에서 살아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무자비한 남발은 낭패의 여지가 있다. 시로서의 매력이 반감하기 때문이다.

 

 정제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교과서적 대답을 하자면, 시어의 정제는 단어가 본래 가진 단어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며, 비유의 치밀성, 감정의 절제 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시집에서 그러한 시어의 정제미가 없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 국민적 시인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몇가지를 추려 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시집의 제목이자 연작시의 제목이기도 한 '학살, 광주, 젖가슴, 옥좌, 해방, 자유, 투쟁, 정치, 빨갱이, 미국, 대통령' 등, 한 치도 겉돌지 않고 직선적이다. 또한 감정의 절제 없이 분노와 억울함을 극대화한 표현이 가득하다. 지나치게 거침없다는 것이다.

 

대검이 와서

그의 가슴을 찌르자 뒤에서는

개머리판이 와서 그의 뒤통수를 깠어요

으윽- 한낮의 신음소리와 함께

그가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군화발이 와서 그의 턱을 걷어찼어요

피를 토하며 거리에

푸르고 푸른 하늘에 오월에

붉은 피를 토하며 벌렁 그가 대지에 나자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제 군용 트럭이 와서 그를 실어 갔어요

 

                                                      <학살 5> 전문

 

 위의 시는 연작시 <학살>중 마지막 편인 다섯번째 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직설적인 해설은 이 시의 한계이자 묘미이다. 산문이라 해도 손색없을만큼 시어의 정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광주 학살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한 이의 울림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에서도 '두부처럼 으깨진 처녀의 젖가슴'이라거나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이라거나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 등의 표현은 참으로 잔인한 표현이지만, 동시에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모순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인 또한 드물다. 서정주나 김동환, 박영희, 이상화 등 훌륭한 문장을 자랑하면서도 친일의 오명을 벗지 못하는 시인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의 비극에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를 높이 받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시인들은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나의 경우, 특히 서정주의 친일 행위에도 <자화상>이나 <귀촉도> 등의 작품으로 그를 대표 시인으로 꼽는데 주저치 않기 때문이다. 애국심 또한 물론 중요하지만, 문장과 표현, 사색도 시인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어쨌든 이러저러한 많은 시인들 가운데, 김남주의 위상은 가히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시대의 고통과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처절한 현실을 노래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용기와 애국심,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는 그러한 격정이 한 치의 낭비없이 표현된다. 비록 그것이 문학성에 있어 한계를 나타내더라도 그의 열정만은 높이 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어두움만 토로하고, 미래의 희망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자유와 혁명의 순결을 노래하는 전사시인, 김남주의 격렬한 외침만은 와닿기에 그의 소중함을 느낀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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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 봐도 <학살>이 없어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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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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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 바라보며>는 특별난 이야기가 아니다. 진 서전트라는 여성의 일대기를 주욱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닥 놀라운 반전이나 특별하고 멋진 장면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서도 볼만한 것이 바로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큰 긴박감 없이도 소소한 재미들로 행복함을 주는 힘이 있어, 전체적으로 좋은 느낌을 간직하게 한다.

 

 이 소설은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패배자 내지는 실패자로 낙인 찍힌 레슬리 아저씨와 보낸 즐거운 유년을 그리고 있다. 레슬리 아저씨가 자신을 속여도 그를 탓하기 보다 자신을 속게 한 대상을 탓하는 천진난만함이 한껏 묻어 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따르던 레슬리 아저씨는 3부에서 아들인 그레고리에게도 똑같은 즐거움, 즉 재미있는 놀이나 신기한 마술을 선사하지만, 이미 커버린 진은 변함없는 레슬리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색을 즐기는 진은 그제서야 섬뜩함을 느낀다. 독자조차 놀랄 정도인 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 스스로 깨달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것은 자신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어느 순간 같은 감정을 선사하지 못할 때, 어찌나 놀랐겠는가. 하물며 모두가 레슬리를 비난할 때도 그를 따랐던 진이 그를 비난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중적인 나를 발견할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감정이지만, 언제나 진지한 사색을 하는 진에게는 더욱 큰 고통이였으리라.

 

 2부에서는 진의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만났던  썬업 프로서와는 전혀 다른 류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는 점이 참 아쉬웠다. 잠깐의 시간 동안 태양이 두 번 떠오르는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썬업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던 프로서는 그의 집에서 묶던 군인이었는데, 조종사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워낙 변덕적인 성격과 태양을 향해 날아 오를 때의 행복감에 취해 미쳐가던 사람이기도 했다. 프로서는 진이 경찰인 마이클과 결혼한다고 하였을 때, 그가 좋은 남편감이라고 늘 칭찬하면서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은 프로서의 말을 믿었고, 그런 믿음이 어느 정도 작용하여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불행한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도망자의 인생을 살아 간다.

 

 진이 유년 시절 믿었던 레슬리 아저씨와 썬업 프로서는 그에게 있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둘 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또한 그렇지만, 진이 모르던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서가 <태양을 바라보며> 겪었던 기적은 진에게 평생 동안 동경의 대상이 된다. 3부에서 아흔아홉살의 진이 예순살의 아들 그레고리와 함께, 썬업 프로서가 본 기적을 직접 체험하며 이 책은 막을 내린다.

 

 태양을 응시하지 않고도 하루 아침에 태양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던 작은 기적을 평생 동경하던 진이 생의 마지막에 그것을 바라보며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2부에서 썬업 프로서는 항상 그런 말을 하곤 했다. 행복한 죽음은 부족해져 가는 산소 속에서 나른한 행복을 느끼며, 태양을 두 번 바라 보면서 죽는 것이라고. 실제로 프로서는 그렇게 죽었고, 진이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곧 그도 태양의 기적을 체험한다.

 

 3부에서 한가지 독특한 소재는 GPC, 즉 다목적 컴퓨터인데 인간의 모든 지식을 수록한 절대적인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것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은 TAT라는 좀 더 특수한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레고리가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을 때면 늘 '현실적인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한편 그 반대쪽 모니터에서는 질문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제한적인 답만 가르쳐 주는 억제 시스템인 셈이다. 이 두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본인 인증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갑작스레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가 생각났다. '사랑'같은 단어는 부적절한 것이므로 사용해서도 질문해서도 안 된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한 척 해야 했던 조너스의 감정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레고리 또한 결국 답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프로그램이 답한 것들에 이해한다는 말을 던지고 나와 버린다.

 

 <태양을 바라보며>는 이처럼 소소하고도 엄청난 소재를 가지고 묘한 배합을 만들어 냈다. 물론 태양을 바라 보는 것 따위의 소탈한 기적에 목 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래 삶은 그런 소소한 일상들로 이루어져 전체의 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그 나날 중 괴롭고 슬픈 추억이 있더라도 그것은 적당한 페이소스다. 운명의 희생자가 되는 것보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되뇌이는 진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와닿는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고아한 할머니가 된 진,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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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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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쩐의 전쟁>과 비슷한 내용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싶다. 백수인 청년이 재야의 고수에게 발탁되어 돈 굴리는 법을 익히고, 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당하고, 결국 사부의 비법을 모조리 전수받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다는 등 줄거리면에서 굉장히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다. 드라마뿐 아니라 TV 자체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우연찮게 <쩐의 전쟁>의 첫 편과 마지막 편만을 보게 되었는데도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 참 안타깝다. 배금주의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거나 주인공이 죽는다 등의 차이점을 열거해 다르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런 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 책이 그럭저럭 볼 만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소 드라마의 영상미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책의 구성은 단적으로 싱겁기 짝이 없지만, 주인공 시라토의 말처럼 손해 본 느낌은 들지 않아 다행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작은 드라마 <쩐의 전쟁>과 흡사하다. 청춘을 탕진하던 백수 시라토가 고즈카의 손에 걸려, 동기들보다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그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고즈카는 나름대로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돈만 믿으며 성장한 인물인데, 실은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변액보험의 피해자로, 사건이 터진 후에 정신을 놓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버블경제 이후 변액보험의 피해자들이 속속들이 증가하며, 고즈카가 그에 복수하기 위해 가을 빅딜을 준비한다. 이후, 고즈카가 당했던 비극은 시라토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즈카 노인이 그를 속인 것이다.

 

 이시다 이라가 나름대로 준비한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을 뿐더러 사건의 굴곡은 지나치게 완만해서 독자를 데면데면하도록 만든다. 우중충하고 밋밋한 분위기도 변하지 않는다. 허나 이러한 시선은 돈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떠받는 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더욱 강조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중소 기업의 사장이나 입을 법한 정장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먼저 입사한 동기들보다 높은 월급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마켓의 파도 속에 난무하는 숫자와 그래프를 줄줄 외고 다니는 시라토의 모습은 실로 멀게만 보인다. 이같은 괴리는 점차 무뎌지고 있지만, 그 답답한 현실의 숨막히는 뒤쫓김은 잊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이시다 이라가 사회가 고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일테다. 다만 이 사회가 종언하기 전에 현실의 비극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부터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직 늦지 않았다. 스타트! 이제 시작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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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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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그대로 <토끼와 함께한 그해>이다. 일상에 지쳐 무기력하게 매일을 보내는 바타넨이 우연찮게 토끼와 만나게 되고, 그 토끼와 1여년 동안 여행을 하며 겪게 되는 것이 줄거리다. 비교적 이 단순한 플롯 속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작가의 저의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바타넨이 아무리 일상에 지쳤다지만, 시작부터가 난해하다. 요즘 그 어느 현대인이 고정된 직장과 수입, 편한 집, 몇 십년을 같이 한 아내, 할부도 끝나지 않은 보트를 버리고 여행을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바타넨 뿐만 아니다.

 

 직업도 없이 대통령의 신상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불도저를 끌고 강 한가운데에 빠지는 사람이 있고, 장작을 얻기 위해 이웃집 난간을 부러뜨리는 사람이 있다. 뿐만 아니다. 민간인이 살고 있는 산장에 군인들이 몰려와 사령부로 쓰겠다고 하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동면에서 깨어나 성난 곰을 죽이기 전에 구경해 봐야 겠다고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바타넨에게 가장 괴로웠던 일은 곳곳에서 자신의 토끼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에 둘러 싸이게 되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그런 위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한 일들이 법을 저촉하여, 결국 감옥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아르토 파실린나는 이런 요지경 세상 속에서 양심에 손을 얹고 바르게 살아 가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를 주제로 두고 역설하고 있다. 어느새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 바타넨에게 자유란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듯 싶다. 억압과 본능에 의해 일상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육체적 노동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었던 바타넨에게 작은 감옥은 그야말로 지옥이지 않을까. 그 순간 토끼가 곁에 없다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타넨은 결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토끼를 되돌려 받고, 지옥같은 감옥을 탈출한다. 대통령 신상에 관한 연구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지금껏 여행을 하던 도중 그는 나름의 양심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억압하고 절제했지만, 결국 자유를 빼앗기자 허울좋던 약속조차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역설과 풍자들은 곳곳에서 베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토끼와 함께한 그해>라는 열매는 그 빛깔과 향이 배가한다. 단순히 유쾌 발랄한 소극(笑劇)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분명 이 책은 노골적일 정도로 우연성이 넘치고 황당무계하지만, 그 과장은 단순한 웃음만 일으키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사회적 풍자와 해학이 너울치기 때문이다. 다행한 것은 바타넨이 여행한 핀란드가 그렇게 모순이 넘치는 사회였지만, 그의 탈옥으로서 어느 정도의 희망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혹여 자신의 삶과 대비하여 실망할 것은 없다.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간극이 있지만, 그 간극을 메꾸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지 않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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